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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멘탈리스트/나르시시스트 부모

‘널 사랑해’와 ‘날 사랑해줘’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Dirt Mentalist 2022. 5. 25.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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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의 성격을 냉혹하고 감정이 없을 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나르시시스트의 계산적인 면모를 이성적 면모로 오해하거나, 나르시시즘과 소시오패시즘 또는 마키아밸리니즘을 혼동해서 일어나는 착각이다. 나르시시즘과 소시오패시즘은 유사한 면도 많고 현실적으로 가지 기질을 동시에 가진 경우가 매우 많기는 하나, 그럼에도 둘은 개념적으로는 분명 차이가 있다. 편의적으로 둘을 순도 100% 나르시시즘과 순도 100% 소시오패시즘으로 나눈다면, 후자는 냉정한 심리를 동반할 있지만 전자는 그렇지 않다.

 

나르시시스트는 오히려 감정적이 되기 쉽다. 다만 감정이 자기중심적인 것으로 한정되어 다채롭지 않을 뿐이다. 나르시시스트가 냉정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사람들이 극단적 자기중심성의 폭력적이고 잔인한 면모를 냉정함으로 잘못 인식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이와 달리 나르시시스트는 감정 과잉에 빠지는 경우가 많고 감정 상태도 불안정하며 이를 타인 앞에서 절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자체적으로 활력을 만들어내지 못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관심, 애정, 충성, 서비스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관심과 애정을 충분히 원하는만큼 받지 못하면 자기연민과 우울증에 곧잘 빠지기도 한다. 때문에 나르시시스트가 불행해하거나 슬퍼하는 경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이다.

 

타인에게서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할 , 나르시시스트는 진심으로 상처를 입고 슬퍼한다. 자신이 냉혹한 세상에 부당하게 피해를 입거나 버림받은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지독한 상사병에 빠진 것처럼 괴로워하기도 하고, 울부짖으며 나를 봐달라고 격하게 감정 폭발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다. 일례로 연인이나 짝사랑 상대에게 미친듯이 집착하다가 스토커가 되고 급기야 범죄를 저지르는 유형은 대개 악성 나르시시스트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상처와 슬픔은 오직 본인이 원하는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와 속상함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멋대로 비합리적인 기대를 해놓고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상대방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나르시시스트의 감정은 절대로 교감 공감이 가능한 종류가 아니며, 남이 이해해줘야 대상도 아니다. 단순히 감정 자체가 강렬하고 진심으로 보인다고 해서 나르시시스트의 입장이 정당할 것이라고 넘겨짚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단지 감정 존재만으로 나르시시스트의 위험성을 감지하지 못하고 나르시시스트에게 연민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울고 있는 사람에게는 가드를 풀고 빗장을 내리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감의 부재는 나르시시즘의 원인이 아닌 결과' 포스트에서 이야기했듯, 진짜로 무서운 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한쪽으로만 발휘되는 기울어진 감정이다. 나르시시스트의 감정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본인의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욕구와 충동을 사회적 압력과 때문에 마음껏 발산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오직 자기 자신만이 불쌍하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었다 주장하며 흐느끼는 나르시시스트의 강렬한 감정만은 진심이지만, 애초에 본인이 상처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말도 되게 자기중심적인 경우가 많다. 막말로 나르시시스트가 주장하는 상처의 실체는 사람들에게서 빼앗고 싶은 것을 빼앗지 못해서 속상하다라는 주장이다. 과연 이런 슬픔도 공감해줄 가치가 있을까?

 

간단히 말해 나르시시스트식 사랑은 너를 사랑해 아닌 사랑해 라고 있다. 본인이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을 표현하는 아니라, 상대방의 관심과 애정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나르시시스트식 사랑 고백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점이 나르시시스트의 애정을 더욱 강렬하게 보이도록 한다. 결핍과 갈구의 정도가 심각해서 상대방의 애정 없이는 죽을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원하는 사랑과 숭배를 받지 못하는 나르시시스트는 진심으로 상처를 입는다. 상처의 실체는 일방적 애정과 봉사를 받지 못해 특권 의식이 충족되지 않아 불만스럽다는 뜻이다.

 

내가 아니면 누구한테 이런 얘길 하겠냐.”

내가 가장 편하게 생각하니까 막말도 하고 화풀이도 하는 거지.”

내가 워낙 든든하고 믿을 만하게 생각하니까 이런 부탁도 하는 거야.”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식에게 애정을 주려고 하는 아니라 받으려고만 한다. 그리고 절절하게 받고만 싶은마음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너한테 관심과 애정과 서비스를 집중적으로 받고 싶으니, 이게 내가 특별하게 생각해서 그런 아니냐는 식의 논리이다. 세상의 통념은 부모를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하지만 나르시시스트 부모와의 관계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식에게 '아낌없이 빼앗는' 유일한 존재가 됨으로써 자신의 특별함을 보장받고자 한다. 자식에게 한없이 빼앗을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본인의 강렬한 욕망이 곧 자신의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자신에게 낙점받아 착취당하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여기라는 식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인정을 두고 경쟁을 벌이는 하등 종자라고 인식하는 나르시시스트는 사고 구조상 그것 외에 다른 사랑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은 그런 아냐식의 설교를 해봤자 알아듣지 못한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신 때문에 자식이 꿈을 펼치지 못하고, 건강을 해치고, 행복을 잃더라도, 자기의 칭찬 한 마디가 자식 인생에서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는 더 크고 중요한 성취라고 여긴다.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심각하게 과대평가를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착각이다. 별점 테러로 갑질을 하려는 블랙 컨슈머마냥 서푼어치도 되지 않는 본인의 평가질이 남의 인생을 좌우하는 기준이 되길 바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자식들은 진정한 애정 표현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라게 되고, 부모가 오로지 자기 만족을 위해 자식에게 품는 온갖 사적 기대와 욕심을 사랑의 징표로 착각하게 된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 라는 메시지에 사랑해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고 착각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이런 착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상대가 정말로 특별하게 생각하니까,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무리한 요구와 부탁을 하는 거겠지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르시시스트의 공짜 자판기 노릇을 한다. 그러나 가지는 엄연히 다른 말이며, 전자의 메시지에서 후자를 멋대로 추정하고 읽어내서는 된다. ‘ 사랑해 ’, ‘ 받아줘라는 말은 절대로 나도 사랑해’, ‘나도 받아줄게라는 뜻을 자동으로 포함하지 않는다. 이것을 알지 못해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전락한 많은 자식들은 네가 편하니까온갖 화풀이, 더러운 뒷담화, , 막말을 쏟아내는 거라는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말을 칭찬과 애정으로 착각한다.

 

이런 부모는 거꾸로 자식이 힘든 감정 상태가 되어 타인의 인정과 교감을 필요로 때는 자식을 전혀 받아주지 않는다. 대개 이런 부모는 자식이 힘든 감정 상태에 있을 오히려 타인의 편을 들고 자식을 비난하거나, 본인이 힘들다며 대화를 다시 본인 중심으로 돌려버리거나, 일은 네가 알아서 해야 한다며 선을 그어버린다. 본인이 타인을 필요로 때는 자식과 몸이 되려고 들러붙던 부모는, 막상 자식이 타인을 필요로 때는 갑자기 자식을 타자화하며 누구보다도 빠르게 도망쳐버린다.

 

내가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실제적인 관심, 배려, 이해, 도움은 하나도 없는 같은데 상대방은 나에게서 그것을 일방적으로 심하게 갈구하는 같은가? 갈구하는 정도가 너무 절실하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일 것이라 추정하고 상대방의 애정을 믿어왔는가? 자신을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상대방의 강도 높은 불평과 비난이 곧 상대방도 나를 그만큼 사랑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해왔는가? 그렇다면 관계는 필시 나르시시즘적 착취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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