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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부재는 나르시시즘의 원인이 아닌 결과

Dirt Mentalist 2022. 3. 25.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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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공감 뒤에 '능력'이 붙어 '공감 능력'이라는 해괴한 표현이 트렌드가 되었다. 그러나 공감은 그냥 결과적인 현상에 가깝지 능력이라고 보기 어렵다. 공감이란 타인의 입장에 자신을 이입해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를 능력이라고 보기에는 공감 여부와 정도를 결정하는 요인에 개인의 자질 외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인이 너무 많다.

 

이를테면 흑인 노예 제도가 아직 있던 시절에 백인들은 흑인들의 입장에 공감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그렇다면 그 시대의 백인들은 다른 인종이나 또는 현 민주주의 시대의 백인들에 비해 본질적으로 공감 '능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당연히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 당시 특권층이었던 백인이 노예 계급이었던 흑인에게 공감하지 않았던 것은 흑인은 동등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공감 대상에서 애초부터 제외해도 된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공감할 능력이 없었던 게 아니라 공감할 이유와 동기가 없었던 것이다.

 

공감 능력이라는 괴랄한 조어가 유행하다보니 '공감 능력이 없으시네요'와 같은 말을 욕처럼 쓰는 경우도 많아졌다. 흔히 나르시시스트와 소시오패스/사이코패스가 공감 능력 없는 이들이라고 하니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의 도덕성과 인간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공감은 인류가 문명 사회를 이루고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인간의 주요 속성 중 하나이고 이를 중시하는 것은 나쁠 게 없지만, 마치 공감을 스펙화할 수 있고 재능마냥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나눌 수 있다는 인상을 주는 이러한 인식은 공감의 개념을 심히 왜곡하는 면이 있다. '공감 능력'을 운운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사실 그냥 대신 '이해력'을 사용해도 무방하며, 오히려 이 편이 더 정확한 경우가 많다.

 

나르시시스트/소시오패스/사이코패스가 되는 원인을 흔히 공감 능력 부재로 꼽지만, 공감의 부재는 이러한 증상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가깝다. 타인과 상호작용을 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공감할 여유가 잘 생기지 않는 자폐 스펙트럼과 나르시시스트/소시오패스/사이코패스의 극명한 차이를 보아도 공감 능력 부재가 그 근본 원인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타인에게 공감하는 빈도와 정도가 낮다고 해서 반드시 이기적이거나 부도덕해진다고 볼 수 없으며, 반대로 그 정도가 높다고 해서 이타적이거나 도덕적이라고 볼 수도 없다.

 

사실 인간이 가장 잔인하고 위험해지는 순간은 일관된 무관심으로 공감 대상이 아예 없을 때가 아니라, 본인의 입맛대로 특정 조건에서만 공감 기능이 발휘되거나 발휘되지 않는 등 일관성과 공정성을 잃을 때이다. 즉, 공감 기능은 잔인함의 최고 무기가 되기도 한다. 나르시시스트/소시오패스/사이코패스 역시 공감할 수 있는 기능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공감 대상이 자신에게 분명한 이익이 되는 대상만으로 아주 좁게 제한될 뿐이다. 그 외의 대상에 대해서는 아예 인간으로 인식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공감 기능이 발휘되지 않는다. 이런 태도의 바탕이 되는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본질적으로 잘났거나 특별하다는 극단적 특권의식이다.

 

외부 상황에 그냥 일관된 무관심을 보이는 자폐 스펙트럼은 타인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경우가 없지만, 나르시시스트/소시오패스/사이코패스는 외부 상황과 타인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그들 중 자신이 착취해도 뒤탈이 없고 사회적으로 변명거리가 있을 것 같은 프로필만을 골라 피해를 끼친다. 자기 깜냥으로 나름의 자격 조건을 선별하는 것이다. '몸 함부로 굴리는 여자'만 골라 죽였다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연쇄살인범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는 자신(및 사회)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자의적으로 심판한 결과이지 공감 기능 자체의 부재나 마비로 인한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공감 기능이 아예 없다면, 사회가 어떤 피해자를 더 동정하거나 덜 동정할지에 대한 예상 자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교활한 수를 쓰지 않는다.

 

즉, 나르시시스트/소시오패스/사이코패스는 공감 능력이 없어서 착취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착취적이기 때문에 공감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고방식의 문제이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동기와 의지의 문제이지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어가고 있지만, 한국인 대부분에게는 이보다 자신의 집값 문제, 연봉 협상 등의 다른 문제가 더 절실하다. 한국인들이 공감 '능력'이 없어서일까? 그게 아니라 공감이 애초부터 자신의 세계관, 인생관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많은 경우에 명백한 동기와 의지가 없으면 발휘되지 않는 기능이라서 그렇다. 

 

그러므로 공감 '능력'이라는 유행 표현에 휩쓸려 설득과 인내를 통해 성인의 공감 '능력'을 길러줄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누구는 운동을 잘 하고 누구는 못하듯이 공감 '능력'도 타고나지 못한 사람도 있으니 내가 보듬고 이해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착취적인 나르시시스트/소시오패스/사이코패스형 인간을 받아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상대에게 모욕과 상처를 안겨주고, 비아냥대고, 비난하고, 요구사항을 늘어놓고, 속속들이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스토커처럼 취조하는 등 끊임없이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하면서 유독 공감에만 인색한 사람은 그저 공감 기능을 발휘하지 않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내 발 아래의 존재이므로 감히 내 공감 대상이 될 자격이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공감 기능이 아무리 자주 발동되는 사람이라 해도 정육점을 지나며 그곳에 걸린 돼지에게까지 인간과 동일한 수준의 감정이입을 하지는 않는다. 나르시시스트/소시오패스/사이코패스에게 착취 대상자는 바로 그 돼지와 같다. 이들의 문제는 공감의 부재가 아니라, 타인을 정육점의 돼지고기 쯤으로 보는 시선과 사고방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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