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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의 이중적 가족주의

Dirt Mentalist 2022. 4. 3.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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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모든 사람의 눈에 완벽하게 보이는 사람은 없다.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잣대로 인해 그 어떤 사람도 비난하기로 작정을 하면 난도질할 명분을 무한하게 뽑아낼 수 있다. 세상을 대상으로 여론 몰이를 잘만 하면 한 사람을 괴롭히고 무너뜨릴 사냥 원정대 한 팀 정도는 거뜬히 꾸리고도 남는다. 대한민국 최고의 먼치킨 영웅 김연아도 여성의 사회생활이나 노출 등을 죄악시하는 히잡의 나라로 가면 전국민의 돌팔매 대상이 될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누구에게나 흠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매우 좋아한다. 세상의 많은 일들은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인간의 현실 인식은 객관적이지 않다. 저마다 자신의 관찰이 정확하다고 믿지만 단순한 시각, 청각, 미각, 촉각에서마저도 인간의 뇌는 강력한 주관적 개입을 행사한다. 하물며 가치 평가의 영역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이는 나르시시스트에게 '누구든 공격해서 파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뜻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인, 나아가 할 수만 있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이 주관적 해석 기준을 본인 중심적 세계관으로 설정하기 위해 노력한다. 본인이 키가 크면 '키 큰 사람이 최고', 반대로 키가 작으면 '키 작은 사람이 최고'라는 가치관을 주변에 열심히 강매하고 다닌다. 그런 압박에 성공적으로 세뇌당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면, 세상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자기 밑으로 굴복시켰다는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그 세뇌당한 사람들을 패거리로 몰고 다니며, 그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파괴하려 든다.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의 이러한 계획이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그럴싸하게 사회 통념을 기초로 양념해버리면 쉽게 흠을 잡고 파괴할 수 있다고 여긴다. 자기 편의적으로 급조한 사상을 바탕으로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를 수집하고 사회 통념에 그럭저럭 부합하는 가치관으로 포장하면서 그 자신도 자신만의 희망사항이 팩트라고 믿어버리게 된다.

 

예를 들어 유능하고 성격 좋고 성실한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단점을 찾은 끝에 그의 젓가락질이 정석이 아님을 발견하게 되면 '젓가락질 하나만 봐도 가정교육 상태를 알 수 있으므로 다른 거 볼 것도 없이 게임 끝'이라고 주장하고 다니는 식이다. '젓가락질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집안'에 대한 부정적 추정과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사람의 위험성'에 대한 끈질긴 공포 유발을 할 수 있는 기본 말빨만 따라준다면, 이런 식의 전략은 실제로 한국 사회 통념상 상당한 지지를 얻는다.

 

그러나 이런 나르시시스트의 삶의 전략은 시간 프레임이 길어지면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한다. 필히 어디에선가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키 작은 게 최고라고 주장하고 다녔는데, 자신보다 키가 더 작은 사람이 직장 내에서 자신의 가장 큰 경쟁자로 나타났다면? 갑자기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주장을 반대로 뒤집어야 할 처지에 놓인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실제로 그렇게 한다. 해당 나르시시스트를 바로 어제 알게 된 사람이라면 모순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몇 년 전만 해도 키 작은 게 최고라고 떠들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앞뒤가 안 맞는 나르시시스트의 모순을 인지할 수밖에 없다.

 

나르시시스트를 알고 지낸 지 오래될수록 나르시시즘의 치명적인 무논리를 더 많이 목격하게 된다. 학벌이 좋은 나르시시스트는 평소 왜 학벌이 올바른 평가 기준인지를 설파하고 다니다가도, 자신보다 더 학벌이 좋은 사람을 상대하게 되면 갑자기 정반대로 입장을 바꿔 학벌보다 다른 것들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처럼 굴 것이다. 피부가 까만 나르시시스트는 평소에는 까만 피부의 장점만을 설파하고 다니다가도, 자기보다 피부가 더 까만 사람을 공격하고 싶을 때는 까만 피부에 대한 사회적 통념 중 부정적인 부분만을 골라 상대를 모욕하기 위해 애를 쓸 것이다. 결국 진짜 기준은 학벌도 피부색도 아니다. 오로지 '나', '나', '나'인 것이다.

 

이 때문에 나르시시스트는 장기적인 대인관계를 잘 맺지 못하거나 버거워하고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주변인들의 기억 때문에 자기가 한 말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카멜레온처럼 상황에 맞게 유리한 것만 취하고 싶은 나르시시스트에게 이는 짜증나는 족쇄가 아닐 수 없다. 나르시시스트가 가족에게 특히 더 냉혈한이 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가족이 가장 쉽게 착취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도 있지만, 가족이야말로 자신을 가장 긴 기간 동안 보아 온 관찰자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뒤가 켕기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 가족은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고 언제든 그것을 볼모로 인질극을 벌일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잠재적 스파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가족의 '배신'에 대한 극단적 분노와 공포를 가지고 있으며, 과도한 의심과 감시를 일삼는다. 감정적 애정은 없지만 물리적으로는 안전 거리조차 없이 밀착되는 '적과의 동침' 상태를 가족에게 강요한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족은 무조건 신성한 것이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끼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수용해야 하고, 외부에 가족을 고발하거나, 남에게 가족의 단점을 공개하거나, 객관적으로 가족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적이고도 경직된 '가족 윤리'를 강조한다.

 

가족 중 누군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나르시시스트는 이를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나르시시스트는 가족 중 누군가가 자신과 거리를 둔다거나 연을 끊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이는 상대를 사랑해서가 아니고 자신의 기밀 자료가 잔뜩 보관된 핵심 전략 영토를 잃어버리는 손해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을 누구보다도 착취하고 경계하고 괴롭히지만, 가족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떨어지지 않고 영구히 유지되어야 하는 이율배반적 가족주의는 나르시시스트의 중요 특징 중 하나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배우자와 자식들을 경멸하고 증오하면서도 붙어있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배우자에게 명백히 애정이 없고 외도를 일삼으면서도 (다른 더 좋은 배우자감으로 갈아탈 준비가 완료되지 않는 한) 절대 이혼하려 하지 않고(특히 상대가 먼저 이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자식을 짐덩어리 취급하면서도 자식의 독립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등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적 행태를 자주 보인다.

 

나르시시스트는 반대로 새로 만난 사람은 마치 새 물건처럼 매우 좋아한다. 새로 만난 이들은 자신의 이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자신의 최신 버전 모습만을 보여주며 속일 수 있고, 과거에 자신이 했던 모든 언행과의 불일치를 지적하는 '못된' 짓거리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새로 만난 사람과의 관계는 자신의 모든 전과가 지워진 깨끗한 새 신분증과도 같다. 때문에 나르시시스트는 (비록 얄팍하고 일시적이지만) 진심으로 새로 만난 사람을 좋아하며 그들에게 잘 보이려 한다. 반면에 이미 과거의 기억 때문에 져야 할 빚만 산더미인 '오래된 관계'에는 노력을 기울일 아무런 동기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가족에게는 개차반처럼 굴면서 이상하게 남한테만 잘해주는' 사람들 중 대다수가 이런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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