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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 부모와 논쟁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Dirt Mentalist 2022. 4. 14.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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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계에서의 이론 논쟁을 제외한 다른 종류의 논쟁, 특히 사회적 관계에서의 가치관 논쟁에서는 사실상 합의된 논리 체계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즉, 사회적 사안에 대한 논쟁이나 일상 대화 속에서는 논리라는 게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저마다 자기 주장이 논리적이며 상대방은 감정적이라고 비난하기 바쁘지만 사회적 문제는 실험적 검증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고 사람마다 다른 가치 평가 기준을 통일시킬 수 없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무엇이 정말 논리적인지 따지기 어렵다. 사회적 관계에서의 논쟁은 논리보다 어떤 가치관이 더 인정받느냐의 문제이며, 여기에서 논리가 수행하는 역할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대화 속에서 논리의 기능과 효과를 과대평가한다. 이런 기대는 굉장한 시간 및 에너비 낭비를 야기한다. 특히 세계관 자체가 자신만을 중심으로 설정되어 있는 나르시시스트와의 대화에서 논리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나르시시즘의 본질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나르시시스트와 진지한 대화를 하면서 논리적으로 조곤조곤 반박하고 설득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에 시달리는데, 이런 시도는 문제를 도리어 악화시킬 뿐이다. 

 

나르시시즘의 핵심은 '나는 특별하다'는 세계관이다. 쉽게 말해 나르시시스트 본인은 왕이고 나머지는 신하들이다. 왕과 신하에게 적용되는 규칙이 같을 수가 없다. 이것을 모르는 외부인은 나르시시스트를 다른 사람과 같은 선상에 놓고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논리를 내세우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이런 민주적 시스템을 좋아하지 않으며,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나르시시스트의 세계에서는 내로남불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질서이다. 모든 종류의 기본적 상식과 규약은 오직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될 뿐, 본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신하가 왕에게 반말을 하면 대역죄인이 되지만 왕이 신하에게 반말을 한 것은 마땅한 순리에 해당되는 것과 같다.

 

나르시시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르시시스트가 비합리적인 언행을 보이거나 내로남불을 시전할 때 이 부분을 '논리적'으로 지적하면 나르시시스트를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나르시시스트의 말이 왜 앞뒤가 안 맞고 왜 일관적이지 않은지를 조목조목 설명하면 나르시시스트를 당황시킬 수 있고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낼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막상 이런 기대를 걸고 나르시시트와 논쟁을 벌이면 현실적으로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비논리적 행위를 지적당했을 때 심적으로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본인의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내로남불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애초에 본인은 특별한 신분이므로 특별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비논리나 내로남불을 지적당하면 오히려 그러한 사회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극상을 저지른 상대방을 준엄하게 꾸짖고 처벌하는 태도를 취한다. 존엄한 존재인 본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천민들에게나 적용될 규칙을 들이대는 '못배워먹은/무식한/세상 물정 모르는/눈치 없는' 존재로 몰아부치는 것이다. 물론 제3자들 간의 관계에서 대놓고 '나는 존엄하다!'를 외치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사회적인 관계에서 이들이 사용하는 구체적인 전략은 좀 더 교묘하다. 이를테면,

 

지적당한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아무런 방어도 해명도 하지 않은 채 논점을 돌려 상대방의 약점이나 단점을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순식간에 상대방을 피고인 입장으로 만들어버리거나('너는 뭐 완벽하냐?', '너도 잘못한 거 많아'),

알맹이는 없지만 상대방에게 틈을 주지 않는 빠르고 화려한 말잔치로 자신과 남과는 전혀 다른 입장이므로 같은 규칙을 적용받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거나('너랑 나랑은 엄연히 상황이 다르지', '나는 이유가 있잖아'),

자신의 지위나 힘을 과시하고 상대방을 깔아뭉개는 기 싸움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가 상대방보다 더 크다는 식으로 상대방을 겁박 또는 가스라이팅하려 들거나('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네까짓 게 뭔데 지적이야?'),

상대방의 공격성 및 까다로움을 과장하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시도하는 식이다('너같이 피곤한 애 처음 본다', '너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거든?').

 

이 모든 전술의 공통적 핵심은 나르시시스트 본인은 어떻게든 평가 대상에서 벗어나고, 오직 타인만을 규칙의 적용 대상인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자신을 중심으로 타인을 대상화하고 그 구도를 타인에게 관철시키면, 본인은 무슨 짓을 하든 애초에 평가당할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비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이들은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본인이 당황하게 되고, 특히 깊은 생각을 할 시간이 없는 상황에서는 이런 나르시시스트의 프레임에 정신 없이 말려들어 종국에는 거꾸로 본인이 죄인 입장이 되고, 잘못한 것도 없이 사과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나르시시스트가 나에게 폭행을 가하긴 했지만 '나도 말을 예쁘게 못한 건 사실이니까', '그 사람이 원래 유달리 힘든 일을 해서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이니까', '그래도 그 분은 권위가 있는 분이니까', '맨날 맞고 사는 사람도 있는데 난 많이 맞지도 않고 시끄럽게 유난 떨어서' 내가 사과할 일도 있다고 느껴지는 식이다. 

 

특히 부모가 나르시시스트인 경우, 자식 입장에서 그 어떤 논리적 설명을 동원해도 부모의 생각을 바꾸거나 부모의 잘못을 인정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에서 부모라는 지위는 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나는 존엄하다!'를 직접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지위이며, 때문에 사회에서는 나르시시스트가 겉으로나마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인정해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어도 자식과의 관계에서는 그런 경우가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는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완전체로 정당화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한국 문화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부모의 내로남불을 승인한다. 한국에서는 맥락과 무관하게 부모에게 잘 대해드리지 않는 자식의 태도는 무조건적인 비난의 대상이 된다. 법적으로도 자식이 부모를 살해했을 경우에는 가중 처벌이 적용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가중 처벌이 없다. 사회적으로 내로남불이 보장되는 이런 관계를 나르시시스트가 십분 활용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따라서 자신이 논리와 합리로 무장하고 나르시시스트 부모와 논쟁을 벌여 부모를 이기거나, 설득하거나, 부모에게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다는 기대는 접는 것이 좋다. 이런 어설픈 시도는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오기 십상이며, 본인의 시간과 에너지만 낭비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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