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본인의 약점도 강점으로 만드는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연금술(?) 본문
나르시시스트는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좋은/유리한 방식으로 해석한다. 고지식하고 나이브한 사람들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상황 해석이 주관적이라지만 명백히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이 구별되는 상황도 있는데 어떻게 모든 상황을 본인에게 유리하게 몰고 갈 수 있을까?
이를테면 어떤 시험을 치렀는데 시험을 잘 봤다면 누가 봐도 본인에게 좋은 상황이지만 시험을 잘 보지 못했다면 반대로 누가 봐도 본인에게 나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지식한 이들은 시험 결과에 따라 본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르시시트는 그렇지 않다. 나르시시스트는 아무리 객관적으로 본인에게 불리한 상황마저도 얼마든지 본인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유도하는 다수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명문대 체육 전공자인 A는 평소에 자신이 운동과 학업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완벽한 사람인 것으로 이미지메이킹하기를 즐긴다. 그런 그가 필기시험과 에세이만으로 학점을 따야 하는 과목에서 친구들 중 유일하게 낙제했다. 그러자 A는 ‘천재일수록 분야별 재능 격차가 크다더라. 한쪽에서 재능이 넘사벽으로 뛰어나면 다른 것을 못할 수밖에 없다.’라는 상반된 주장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그 모순을 지적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부를 너무 못하는 건 문제지만 나 정도 수준부터는 이제 공부를 더 잘할수록 오히려 운동 재능이 부족하단 뜻이란 거지.'
@ 70대 노인인 B는 건강에 자신이 있고 여태까지 살아오며 병원 신세를 진 적이 거의 없다. 그는 주변 또래가 아프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들을 은근히 비하하며 상대적으로 자신의 유전적 우월함과 고급스러운 라이프스타일을 자랑한다. 그러던 그가 예기치 못하게 건강에 문제가 생겨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그는 자신의 병을 훈장처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병이 든 것은 자기 관리를 못하는 다른 한심한 노인들과는 달리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결과라며, 자신의 병이 완벽한 도덕성과 책임감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 20대 C씨는 연인에게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신의 악행을 가리고 실제 모습을 부풀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다가 거짓말이 들통나자 C씨는 연인에게 자신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며 내가 얼마나 정신적 고통이 심했으면 그랬겠느냐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연인에게 ‘네가 그걸 제대로 위로해주기만 했어도 내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은근히 연인을 탓하고 결과적으로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인이 자신에게 더욱 헌신적으로 잘해줘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 50대인 D씨는 제3자 앞에서 화려한 겉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며,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길 즐긴다. 그런 그는 자식들 앞에서는 희한하게 유독 용모 관리와 행동 통제를 하지 않는다. 자식들이 본가를 방문하는 날이면 그는 일부러 가장 허름한 옷을 입고 씻지도 않는다. 자식들이 이해가 가지 않아 그의 모순을 지적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니까 네가 나를 모시고 매일매일 꾸며줘야지. 계속 내가 이러고 다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보겠냐.', '넌 내가 이 지경인데 불쌍하지도 않냐.’, ‘내 이런 모습이 다 너희들 망신이 되는 거다’라며 합가와 수발을 요구한다.
@ 초등학생 자식을 둔 40대의 E씨는 자식의 성적에 관심이 많지만 자식은 그의 기대를 늘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의 자식이 다니는 학교에는 영재로 소문난 아이가 있다. 학부모들 사이에서 그 아이가 화제의 대상이 되자 그는 ‘요새는 IQ보다 EQ가 중요하다’면서 영재 아이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모습으로 인해 정서가 불안정할 거라며 자신의 아이 정도의 성적이 ‘딱 완벽한 IQ와 EQ의 조화를 갖춘 아이들이 보이는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 장성한 두 아들의 어머니이자 두 며느리의 시어머니인 60대의 F씨는 며느리들에게 수시로 연락하여 일을 시키기를 좋아한다. 큰 며느리는 소위 스펙이 좋지 않으며 임신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고 현재 2명의 취학 전 아이를 키우고 있다. 작은 며느리는 반대로 아이는 없으나 전문직으로 바쁘게 일하며 높은 경제력을 갖추고 있다. F씨는 주변에서 자신에게 '요새는 그러면 안 된다'라는 조언을 자주 듣지만 본인은 두 며느리에게 일을 시켜도 당당한 이유가 있다며 상반된 이유를 내세운다. 큰 며느리는 '잘난 것도 없으니 굳이 대우해 줄 이유가 없어서' 일을 시켜도 되고, 반대로 작은 며느리는 '그렇게 잘난 애는 나같은 사람한테 봉사하고 베풀며 살아야 도리'이므로 일을 시켜도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나르시시스트는 주로 여우의 신포도 논리나 아전인수식 정신승리로 주관적인 해석 부분을 비틀어 증명 불가능한 유사 논리를 펼치거나, 부정적 상황에 대한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고 본인은 순전히 해당 상황의 피해자인 것으로 규정해 위로나 수혜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본인의 특별함 때문에 남에게는 망신인 것도 본인에게만은 명예인 것처럼 묘사한다. 물론 남에 대해서는 정반대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세계관 속에서 타인의 장점은 장점이 아니라 오히려 단점인 것으로 바뀌어버린다. 학력이 낮으면 무식하다고 무시하고 학력이 높으면 건방지다고 비난한다. 돈이 없으면 가난하다고 무시하고 돈이 많으면 돈x랄을 한다고 비난한다. 한마디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수준의 논리를 펼친다.
때문에 지나치게 열린 태도와 수용적 태도로 나르시시스트와 대화를 하다 보면 속수무책으로 비하를 당하거나 부당한 책임을 떠맡게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잘난 사람이라도 문제이고 못난 사람이라도 문제이며, 키가 커도 문제요 작아도 문제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장점으로 바꿔버리고, 반대로 타인의 장점과 단점은 모두 단점으로 바꿔버린다. 남의 성적 불량은 그냥 성적 불량이고 철저히 본인 탓이지만, 본인의 성적 불량은 순전히 남탓이거나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는 기질을 보여주므로 오히려 나중에 큰일을 할 증거’가 된다. 본인의 우수한 학벌은 본인의 빛나는 성취이고 굉장한 스펙이지만, 남의 우수한 학벌은 ‘머리도 나쁜 게 고액 과외로 쳐바른 결과’이거나 ‘대한민국 학벌주의를 심화시키는 악당의 조건’이 된다.
이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에 불가능한 주장과 틀린 취향이란 거의 없으며, 그 어떤 주장도 나름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이 가능하다. 때문에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다양한 잣대’는 그 본래의 가치와 달리 나르시시스트에게 말만으로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신나는 뷔페 이용권이 되어버린다.
특히나 부모와 같은 윗사람이 이런 나르시시스트 성향을 가지고 있고, 아랫사람이 이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 도리라고 믿고 있다면 이 관계에서 아랫사람은 날마다 정신적 샌드백이 될 수밖에 없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무엇을 해도 대단한 것이고, 심지어 명백한 잘못을 해도 자식이 이를 동정하고 책임져야 하지만 반대로 자식은 무엇을 해도 비하당하고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 ‘내 것도 내 거, 네 것도 내 거’라는 놀부 주제가와 같은 상황이 매일같이 펼쳐진다. 좋은 것은 모조리 ‘내 거’지만 귀찮은 책임과 불명예는 모조리 ‘네 거’가 되는 상황이다. 자식의 경제적 무능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부모의 경제적 무능은 오히려 동정받고 효도받아야 할 이유가 되고, 자식의 외모 치장은 쓸데없는 짓이지만 부모의 외모 치장은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스킬로 여겨지는 식이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라게 되면 자식은 뭘 해도 비난받는 상황에 자주 놓이게 되기 때문에 건강한 자의식을 가질 수 없음은 물론, 전체적으로 삶의 의욕을 잃게 된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식이 자신의 자랑거리가 될 때는 좋아하던 자식의 특성마저도, 자신과 사이가 틀어지는 순간 해석의 관점을 완전히 바꿔 악덕으로 묘사하기 일쑤다. 이를테면 공부를 잘하는 자식도 본인에게 반항하면 ‘이기적이어서’, ‘성질이 독하고 못돼서’, ‘속물적이고 욕심 많아서’, ‘공부 하나만 미친개처럼 거품 물고 한다'라고 폄하하며 자식이 공부를 잘하는 이유를 온통 부정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식이다. 그 와중에 스스로를 '성적보다 인성을 중시하는 훌륭한 부모'로 규정할 수 있는 이득도 덤으로 얻는다. 한국에서는 이런 경우에 보통 주변인들이 부모의 저의를 의심하지 않고 '공부만 잘하고 성질이 못됐으면 문제는 맞지 않느냐'는 식의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부모들은 매우 손쉽게 자식을 모함할 수 있다. 사회가 부모를 완전체로 인식하기 때문에, 부모의 말이 팩트가 아니고 그저 비하와 조종을 위해 만들어낸 프레임일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합리적인 피드백은 인간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데 성장기를 이런 부모 밑에서 보내면 자식은 옳고 그름 및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 기준이 완전히 흔들리게 된다. 좋은 부모들은 합리적인 피드백을 통해 좋은 것을 강화하고 나쁜 것을 약화시키는 사이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이런 균형을 위한 노력은커녕, 자식이 애초부터 타고난 본능적 균형 감각마저도 무너뜨려버린다. 시시때때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대로 자식을 끌고 가려면 자식이 자신만의 안정된 가치 체계를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위의 사례들에서 대부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추정하는데, 악성 나르시시스트 수준이 아닌 일반인들도 위와 같은 나르시시즘적 방어 기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는 왜 인생에서 주변인들의 피드백에 일일이 신경쓰거나 반응하지 말고 주관대로 사는 것이 중요한지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어느 정도의 나르시시즘적 방어 기제 본능을 가지며 때로 이를 억제하지 못한다. 때문에 타인의 나르시시즘적 해석을 본인에 대한 객관적 점수로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남에게 인정받는 것을 인생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 생존이 우선이므로 누군가가 자신의 이익에 복무할 때나 좋아하지 그 사람이 진정 자신의 입장에서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며, 나르시시즘이 강한 인간일수록 오히려 타인이 건강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가진다. 때문에 남의 칭찬은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하며, 반대로 남의 비난이 내가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되지도 못한다. 나르시시즘적 방어 기제에 의한 타인의 평가는 어디까지나 그런 방어 기제를 쓰는 사람 본인의 정신승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맞춰 적응하려 해봤자 기준은 늘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며 그걸 충족시켜주기 위해 하는 행동이 본인에게 이익으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타인이 자기 기분 내키는대로 내 인생을 해석하려는 시도에는 반응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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