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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의 장기적 착취 피해자들에게 나타나는 정신승리 증상

Dirt Mentalist 2022. 5. 14.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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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가 유발하는 괴로움을 줄이기 위한 가장 확실하면서도 올바른 대처법은 어떤 경우에도 가지 뿐이다. 연을 끊는 것이다. 그런데 연을 끊어야 한다고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손을 내저으며 이렇게 말한다. “아이, 그런 말구요, 전 관계를 매끄럽게 유지하면서 피해만 당하는 현명한 방법이 필요한 거거든요.” 이렇게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본인이 원하는 바를 모두 충족시킬 있는 맞춤형 답안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진 사람들은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올바른 대처 방법이 끊기라는 조언을 들으면 자기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바로 귀를 닫아버린다.

 

그러나 여기에서 잘못된 것은 끊기라는 답이 아니라 본인의 질문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어떻게 대처하는가라는 질문을 하려면 먼저 질문에 관계 지속이라는 잘못된 전제가 포함되어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전제는 질문을 무력화하고 문제해결을 원천봉쇄하는 독소 조항이나 다름없다. 한국인들은 사고방식의 차이와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을 죄악시한 나머지 무엇이든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것이 '현명함'이며 차이와 충돌을 드러내는 모든 행위는 '어리석음'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한국인을 불행으로 몰고 가는 최악의 어리석음 중 하나이다. 잘못된 세뇌 교육이 심어놓은 습관대로 무조건 외부 조건에 비굴하게 순응하기 전에, 본인이 상대하고 있는 나르시시스트가 세상의 중심도 아니고 왕도 아닌데 왜 그와의 관계를 좋게 좋게 유지하는 것이 언제나 최종 목표가 되어야 하는지, 그게 진짜 나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부터 물어야 한다.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 지속이라는 전제가 포함된 모든 질문은 답이 없는 질문이다. 관계 지속이라는 착취 지속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가 지속되는 고통과 위험은 지속되며 심지어 악화된다. 여기에는 한계가 없으며, 정해진 기간도 없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착취당하는 관계를 지속하면 착취는 사람의 인생과 정체성이 완전히 파괴되고 모든 이익이 바닥까지 빨아먹힐 때까지 지속된다. 정도껏 하겠지, 하기 나름이겠지 하는 막연하고 나이브한 믿음은 나르시시스즘의 원리상 실현이 불가능하다.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를 절대 없다면서 적당한 대처법을 찾는 것은 사자굴에 머리를 스스로 집어넣고는 머리를 빼는 것만은 절대 없으니 머리를 넣은 상태에서 잡아먹히는 다른 좋은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현인이 와도 말이 없다. 행운을 빈다는 말밖에는.

 

아닌게아니라 나르시시스트와의 착취적 관계에 매저키즘적으로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은 바로 행운을 잡겠다는 헛된 희망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어쩌다 좋게 사자굴 속에서 (완전히) 잡혀먹히지 않는 기적적 행운에 당첨되는 것이 바로 인생 성공이라는 잘못된 사고를 가지고 있다. 나르시시스트 곁에서 가끔 찾아오는 바로 행운이라는 느낌을 자기 인생의 바로미터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고 체계에서 어느날은 나르시시스트에게 흠씬 두들겨맞다가 다음날에 화려한 꽃과 선물을 받는다면 자신이 까다로운 나르시시스트로부터 드디어 인정과 사랑을 받아 무언가를 성취하고 발전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 마련이다. 도박과 동일한 중독 메커니즘이다. 실제로는 발전이 아닌 쳇바퀴일 뿐이지만 나르시시스트의 이런 변덕과 양면성 전략에 말려들면 하기 나름으로 나르시시스트와의 해피엔딩이 가능할 거라 믿게 된다.

 

나르시시스트의 착취에 장기적으로 노출되어 이를 자기만의 논리로 정당화한 이들은 이미 한쪽, 다리 한쪽을 뜯겨 먹힌 채로 나머지도 언제 먹힐지 모르는 상황에 있으면서도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래도 살아서 관계를 성공적으로 지속하고 있다 점에서, 완전히 잡아먹힌 뼈만 남아 잔인하게 버림받은 이들이나 사자에 놀라 일찌감치 도망쳐버린 (나르시시스트 관점에서의) ‘배신자또는 낙오자또는 인정받지 못한 들보다 내가 낫다는 정신승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정신승리는 나르시시즘의 오랜 피해자가 자기방어를 위해 발현시키는 일종의 뒤집힌 나르시시즘이다. 즉, 나르시시스트는 피해자에게도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그대로 전염시키기 때문에 여기에 완전히 세뇌된 피해자 역시 원본 나르시시스트와 동일한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원본 나르시시스트가 철저히 자신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면, 피해자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원본 나르시시스트 바로 아래에 위치한 충신 서열 1위이자 전체 서열 2위로 규정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오랜 착취 관계를 유지하려면 피해자가 알아서 나르시시스트를 정당화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본인의 사고 역시 완전히 나르시시스트 중심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이런 정신승리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면 이는 당연히 주변인들에게 혐오감을 주기 때문에 피해자는 동정조차 받지 못하게 된다. 원본 나르시시스트 앞에서는 철저히 아랫것이지만, 다른 제3자들에게는 원본 나르시시스트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원본 나르시시스트는 이 메커니즘을 본능적으로 잘 알기 때문에 주변인들에게 이러한 매저키즘적 특권의식을 끊임없이 심어준다. 폭행을 해놓고 "넌 그래도 이뻐서 내가 다섯 대만 때린 거야. 예전에 딴 애들은 무조건 열 대 이상씩 때렸어."라는 식으로 말한다거나, 부당하게 과도한 업무를 시켜놓고 "이게 다 내가 널 인정한다는 뜻이야. 네가 멍청하면 내가 이런 걸 시키겠냐?"라고 말하는 식이다. 인정 욕구에 취약한 사람일수록 이런 감언이설에 잘 넘어간다. 나르시시스트가 제한적으로 던져주는 이런 식의 인정에 중독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나르시시즘이다. 어찌 보면 피해자 버전의 나르시시즘이라 할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이처럼 피해자를 옭아맬 때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나르시시즘적 본능을 자극해 자신처럼 병리적인 수준으로 팽창시키려 한다. 다만 피해자의 나르시시즘은 본인이 절대 서열 1위는 될 수 없으며, 기껏해야 2위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나르시시즘이다. 이는 원본 나르시시스트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나르시시즘 다단계 체계라고 볼 수 있다. 아무리 건강했던 사람이라도 나르시시스트의 인정에 따라 감정이 좌지우지되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이 다단계 체제에 말려들어 정신이 병들어간다. 따라서 의도가 불순한 나르시시스트의 평가는 칭찬이든 비난이든 무시하고 귀에 담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이런 의미에서 나르시시스트의 피해자들 역시 진정한 회복을 위해서는 자신의 사고방식을 점검하고 반성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서 반성해야 한다는 것은 피해의 원인이 본인에게 있으니 그 잘못을 뉘우치라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르시시스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분명 잘못된 방향으로 자라난 사고 체계, 감정 체계가 있을 테니 이를 인정하고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를 어떻게든 좋게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주워섬겨야 했던 여러 말같지도 않은 논리가 본인의 머릿속 어딘가에 떠돌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이를 인식하고 제거해야 한다는 뜻이다.

 

원본 나르시시스트가 피해자를 잡아놓기 위해 '네가 서열 2위다'라는 감언이설을 늘어놓았다면 피해자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세상의 '서열 2위'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너는 효자/효녀라 나중에 복 받을 것이다'라는 칭찬을 듣는 맛에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휘둘렸던 자식이라면 효도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 믿었던 본인의 희망부터 버려야 부모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원본 나르시시스트와 함께 했던 기간 동안 자신의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인생 기준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이는 지난 세월 동안 본인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많은 것들을 내다버리고, 실패를 인정하고, 잃어버린 세월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과거의 괴로움 뿐 아니라 영광까지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므로 생각보다 쉽지 않다. 많은 이들이 지옥같은 관계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한 번 빠져나왔다가도 자꾸 되돌아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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