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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끊기가 유일한 대처인 이유 -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심리 관점

Dirt Mentalist 2022. 5. 16.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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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함께 갇혀 있는 굶주린 사자들의 목적은 가지, 당신을 잡아먹는 뿐이다. 정신적 뱀파이어인 나르시시스트의 목적 역시 가지, 주변인이 가진 것을 빼앗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주변 사람은 먹잇감이지 동등한 소통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르시시스트와 관계 지속하려면 그만큼 빼앗기는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으면 관계도 지속되지 않는다. 결국 나르시시스트와 지내면서 피해 당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빼앗기면서 빼앗기지 않는 방법이라는 형용모순과 같다. 애초에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나르시시스트 앞에서 당당하게 굴고 똑똑하다는 것을 보여주면 피해를 당할 거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당당하고 똑똑하게 보이면 나르시시스트의 면전에서 막말을 듣고 갑질을 당하는 일은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면전에서 듣는 모욕이나 무시가 나르시시스트의 유일한 착취 형태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르시시스트가 누군가를 알게 되는 순간부터,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 나르시시스트가 있는 모든 것은 나르시시스트의 자원이 된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장점은 장점대로, 단점은 단점대로 이용한다. 나르시시스트가 자기 멋대로 지어내는 판타지 세계관 속에서, 주변 지인은 모두 창작 시나리오의 캐릭터가 된.

 

나르시시스트의 지인이 되는 순간부터, 당신은 정체성을 도둑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훔쳐간 신분증으로 신나게 명의의 대출을 받고 다니는 사기꾼처럼, 나르시시스트는 당신에 대해 알게 정보를 자기 멋대로 찢어발겨 자신만의 목적에 맞게 사용할 것이다. 당신의 이름을 팔아 당신의 가족이나 친구에게 이상한 목적의 접근을 수도 있고, 당신에 대한 뒷담화를 매개로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려 수도 있으며, 당신에 대한 헛소문을 일부러 퍼뜨려 명예를 실추시킴으로써 권력감을 느끼거나 유리한 거래를 시도하려 수도 있다.

 

모든 것은 내가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통제가 불가능한 것들이다. 내가 똑똑하고 당당하게 대처하면 문제없을 거라는 생각은 환상일 뿐이다. 당신이 단점 하나 없고 실수 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인격자라 해도 상관없다. 나르시시스트는 완벽한 아무개의 친구로서의 자신을 세상에 어필하며 당신 앞으로 신나게 외상값을 달고 다닐 것이며, 이를 대신 책임져주지 않을 경우 동네에 당신에 대한 흑색 선전을 하고 다닐 것이다.

 

이처럼 나르시시스트에게 모든 관계는 착취와 동의어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상대적 우위를 누리거나 이익을 추구하려고 하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관계에는 흥미도 관심도 없다. 일방적인 이익을 창출할 없는 대인관계는 나르시시스트에게 거추장스러울 뿐이며 그러한 대인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무의미한 노동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 만만치 않은 관계 또는 동등한 관계는 나르시시스트 쪽에서 먼저 파토를 내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나르시시스트의 옆에서 관계를 지속하면서 피해만 받는 것이 가능하려면, 결국 겉으로는 은근히 착취하게 것처럼 여지를 주고 공수표를 날리면서 실제로는 나르시시스트가 원하는 것을 하나도 주지 않고 몰래 실속을 챙겨야 한다는 뜻이다. 이건 상대 나르시시스트가 꽤나 멍청하다 해도 난이도와 리스크가 만만치 않은 이중스파이 짓이다. 어쩌다 성공할 있다 쳐도 시간과 에너지를 심하게 갉아먹는 일이다. 상대 나르시시스트가 똑똑하기라도 해서 나르시시스트에게 본인의 수가 읽힐 경우에는 훨씬 위험해진다. 음흉한 배신자나 사기꾼으로 찍혀 나르시시트의 보복 표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와 연을 끊는 것이 부담스럽거나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현상 유지를 하며 자기 방어를 한다는 것도 생각만큼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르시시스트는 아무리 자신이 세뇌와 장악에 성공했다 해도 상대가 패턴을 배우고 시스템에 익숙해져 일정 통제력을 갖게 되면 상대방에게 독립적 영역이 생기고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든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나르시시스트는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자주 예고 없이 규칙을 바꾼다. 나르시시스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몰래 자기 잇속을 챙기려고 열심히 규칙과 패턴을 수집하고 배워봤자 어느날 갑자기 모든 기준이 뒤집혀버리기 일쑤라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 마음에 들게 행동하기게임의 규칙은 어디까지나 나르시시스트 맘대로 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주변인에게서 약점을 잡아 무언가를 뜯어내고 얻어내려 하기 때문에 평화로운 관계 유지가 불가능하다. 건강한 사람들 간의 관계는 서로 일을 알아서 하며 서로를 존중하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나르시시스트는 그런 관계를 추구하지 않는다. 한쪽이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나르시시스트는 끊임없이 상대방을 건드린다.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불평해야 상대방이 자신에게 봉사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할일 했으니까 누가 뭐라 사람 없겠지라는 기대는 나르시시스트에게 먹히지 않는다. 나르시시스트는 억지 트집과 명분을 잡아내서라도 상대를 채무자나 죄인으로 만든다. 정말 잘못해서 죄인을 만드는 아니고 죄인을 만들어야 하니까 잘못을 창조해낸다

 

따라서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는 하기 나름 없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의 요구와 이익을 들어줄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다. 따라서 만만한 사람으로 찍힌 사람에게는 비상식적인 요구도 거침없이 하고 그것이 만족되면 다른 허들을 세운다. 알코올 중독자가 상한선 없이 앞에 보이는 술이면 모두 마셔버리는 것처럼, 나르시시스트는 상대방에게 무한대의 요구를 한다. 기준이나 한계가 없기 때문에 현실에서 정말 불가능한 상황에 부딪칠 때까지 계속해서 요구를 한다. 끔찍하게 들리겠지만 한계가 죽음인 경우도 많다. 막말로 누구 하나가 죽어야만 끝난다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가 오래되다 보면 누구나 어느 정도 이를 느끼게 되기 때문에 나르시시스트와 싸우고 충돌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그런데 시중에 돌아다니는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대처법을 살펴보면 나르시시스트와 싸우지 말라고 조언하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싸운다고 해서 나르시시스트가 달라지는 경우가 없고, 일이 너무 커지고, 시끄러워지고, 나르시시스트에게 끔찍한 보복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견 사실이긴 하다. 아무리 논리로 무장하고 나르시시스트에게 조목조목 따지며 맞서도 나르시시스트는 달라지지 않는다. 또한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게 맞서는 사람이 생기면 일을 드라마틱하게 크게 만들어버린다. 워낙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거 봐라, 나한테 아주 큰일이 일어났다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고,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일념 하에 자신의 모든 권력, 영향력, 연기력, 사기술을 동원해 상대방을 음해한다.

 

과정에서의 피해가 극심할 것을 우려해 싸우지 마라는 조언이 나오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붙어야 단서가 있다. 반드시 일정 기간 내에 관계에서 탈출한다는 계획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연을 끊을 테니 감정 낭비를 하지 않기 위해 일시적으로싸우지 않겠다는 결심은 그럴싸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싸움만 피하는 것은 위험하다. 탈출 계획 없이 그저 싸움만 피하다 보면 죽을 때까지 나르시시스트가 짜놓은 프레임 안에서 고통받게 된다.

 

싸움을 벌여서 나르시시스트에게 심각하고 드라마틱한 급성 피해를 입는 것과 모두 맞춰주면서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복종의 사이클을 도는 , 가지만을 비교해 보자면 그래도 장기적 관점에서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싸우는 편이 낫다. 아무리 나르시시스트가 당장 심각한 피해를 끼친다 해도 일단 맞서게 되면 나르시시스트의 기대 수준은 당연히 낮아질 수밖에 없고 향후 자연스럽게 주요 착취 대상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와 싸우는 역시 나르시시스트로 하여금 자신의 일정 영향력을 확인하는 동시에(상대방에게 분노를 유발하는 것도 일종의 영향력이다) 사람들 앞에서 피해자나 선역 코스프레를 통해 정치질을 하게 만드는 자극제가 되기 때문에, 자체로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근본적이고 올바른 대처라고는 없다. 싸움판이 클수록 자극도 커진다. 특히 나르시시스트 부모라면 한국 사회가 거의 절대적으로 부모의 편을 들어주기 때문에 자식의 눈에 띄는 저항과 반항은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아주 좋은 자극제가 된다. 부모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식을 철없는 불효자로 몰고 것이며, 이를 통해 스스로의 자존감을 채우고 자기연민의 근거를 찾고 주변의 동정심을 사려 것이다. 순종하는 자식을 통해 임금님 놀이를 없다면, 반항하는 자식을 통해 순교자 놀이라도 하려 것이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어떤 종류의 관계에서든 최대한 사회의 고정관념을 활용해 상대를 착취하거나 상대에게 해를 끼칠 있는 포지션을 잡는다.

 

따라서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가장 좋은 대처는 순종도 싸움도 아닌 관계 단절이다. 관계 자체가 해제되어야 부모가 악용할 지렛대도 없어진다. 태어나서 연을 맺은 (?) 당분간 일방적 괴롭힘을 당할 수는 있겠지만, 소통과 정보 제공을 중단한 시간이 지나면 점차 모르는 사람 영역으로 들어가 멀어지는 것이 가능하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무반응과 무관심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고 괴로워한다. 관종 기질이 강해 악플이 무플보다 낫다는 연예인의 생태계와 비슷한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기도 하거니와, 상대가 자신에게 말을 하지 않으면 정보를 알아낼 없어 상대방을 이용하기 힘들어지고, 계속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사람에게 싸움을 거는 역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남의 눈을 피해 계속해서 일방적 고문을 가할 있는 환경은 제외).

 

따라서 끊기는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가장 좋은 보복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어릴 당한 학대에 울분히 맺혀 보상심리에 적극적인 보복을 하고 싶어하기도 하지만, 단언컨대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무반응과 무소식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다. 자식의 강렬한 분노는 어쨌거나 부모 자신이 자식의 인생에 크나큰 발자취(?) 남겼다는 증거가 된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이왕이면 존경과 순종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된다면 차선책으로 분노의 대상이라도 되고 싶어한다. 테러가 일어나면 세상의 온갖 테러 집단이 앞다투어 자기들 짓이라며 범인 자리를 찜하고 연쇄살인범이 피해자들의 물건이나 신체 일부를 잘라 자신만의 자랑스러운 콜렉션을 남기듯, 나르시시스트 부모 역시 본인이 유발한 자식의 고통을 자신의 트로피로 여긴다.

 

물론 이런 끔찍한 심리는 사회 통념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대다수 부모 본인은 의식적 차원에서 절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으로 인해 자식이 강렬한 감정을 분출할 때마다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마음 속에 끓어오르는 묘한 희열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한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식의 무심하고 무표정한 얼굴보다는 차라리 자신에게 상처를 받아 고통스러워하는 자식의 얼굴에서 삶의 활기와 의욕을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식이 자신을 싫어하면 할수록 스토커처럼 집착하고, 자식이 싫어하는 언행 역시 오히려 강박적으로 반복하게 된다. 자기가 유발한 자식의 고통, 분노, 상처를 직접 목격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아직도 자식의 인생에서 차지하고 있는 존재감과 지분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결국 결론은 하나이다. 연을 끊고 접촉면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나에 대한 정보를 차단해 이상 나의 정체성을 본인 인생의 장식품으로 쓰지 못하게 하고 내가 바치던 , 시간, 관심, 반응을 끊어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중독되어 있는 정신적 마약 공급을 차단하는 것이다. 인생에서 나르시시스트를 아예 없는 존재로 지워버리는 외에 고통에서 벗어나는 다른 정답은 없다. 인생의 많은 문제에는 정답이 없지만, 나르시시스트와 관련해서는 이것만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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