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자기중심적 정당화는 아이를 어떻게 망치는가 본문
만 4세인 A는 엄마 B씨와 함께 외출길에 나섰다. A는 엄마와 외출하는 것이 좋지 않다. 엄마는 늘 A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속도대로 걸어가는데 또래에 비해서도 키가 작은 편인 A는 어른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이 힘겹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힘들다 말할 수도 없는 것이 그랬다가는 “엄마가 더 힘들어!”라고 눈을 부라리는 B씨의 불호령에 혼쭐이 난다. 하지만 엄마인 B씨의 속도를 따라가려면4세에 불과한 딸 A는 반 뛰다시피 해야 하고 그런 페이스로는 금방 숨이 차기 때문에 오래 걸을 수가 없다. 그러면 엄마인 B 씨는 딸인 A의 팔을 아프게 잡아당기며 질질 끌듯이 이동하고 A는 팔이 아픈 것은 물론 때로는 넘어져서 다치기도 한다. 외출길이 일종의 고행인 셈이다.
그날도 여지없이 B씨는 딸인 A의 짧은 보폭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속도대로 딸을 질질 끌며 길을 걸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은 유독 날씨가 더웠고 A는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숨이 차거나 팔이 아픈 건 참을 수 있었지만 갈증은 참기 힘들었던 A는 용기를 내어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목 말라.”
그러자 B씨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딸을 쳐다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너 아까 아침에 물 먹었잖아.”
A는 말문이 막혔다.
‘아침에 물 먹었으면 지금은 먹으면 안 되는 건가?’
A는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러나 엄마가 자신의 볼 일을 보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1시간이 지나도록 갈증이 해소되지 않자 A는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다는 생각에 한 번 더 용기를 냈다.
“엄마 나 물.”
B씨는 아까보다 명백히 화가 난 표정으로 눈을 무섭게 치켜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진짜 이상하다. 무슨 물을 그렇게 찾아대니? 너 무슨 물 먹는 하마야?”
지나가는 행인들이 엄마가 큰 소리로 자신을 ‘물 먹는 하마’라고 표현하는 것을 듣고 흘깃 쳐다보자 A는 어린 나이지만 창피하고 모욕적이라고 느꼈다. 강한 수치심이 느껴졌고 목이 자꾸 마른 자기 자신이 미워지기까지 했다. 목마름 자체도 참기 힘들었지만 이젠 그보다는 제발 목이 마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엄마 B씨가 딸인 A를 대하는 이런 태도는 양육 과정의 거의 모든 사안에서 유사한 패턴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A는 자연스레 엄마인 B씨에게 요구 사항이 매우 적은 아이로 자라났다. 요구 사항이 있을 때마다 엄마 B씨는 좋게 해주는 법이 없었고 늘 딸을 이상한 아이 취급하거나 모욕했기 때문에 A는 자기의 상태나 의사를 표현하지 않고 스스로 욕구를 충족하려 노력하게 되었다.
어릴 때는 이것이 불가항력적으로 안 되는 경우가 많아 싫어도 엄마에게 요구를 하고 수모를 겪어야만 했으므로 그녀의 어린시절은 온통 잿빛 기억 뿐이다. A의 집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경제적으로 크게 문제가 있는 집은 아니었으나, A가 자신에게 필요한 의사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마치 풍요 속의 빈곤처럼 배고프고, 목마르고, 피곤하고, 아픈 기억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을 보냈다. A는 아무리 아파도 엄마에게 이상한 아이로 보일 것 같으면 아프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냉장고 안에 먹을 것이 있어도 ‘엄마에게 이상한 아이로 비난받지 않을 시간’에 ‘엄마에게 이상한 아이로 비난받지 않을 만큼의 양’만 먹어야 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이상한 아이로 보이지 않는' 기준에는 이렇다할 객관적 근거가 없었으며 심지어 일관성도 없었기 때문에 A는 이를 오로지 순간 순간 엄마의 기분과 반응에 따라 '눈치껏' 파악해야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본인이 처리할 수 있는 영역이 커짐에 따라 A의 생활도 나아졌다. 엄마에게 요청하지 않고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자 그만큼 엄마의 비난과 모욕을 피해가기도 쉬워졌다. 성인이 되어 경제적으로 독립까지 하게 되자 A는 비로소 편안함과 자유를 느꼈다. 다른 친구들이 어린 시절이 그립다고 할 때마다 A는 자신은 반대로 어른의 인생이 훨씬 좋다고 말하곤 했다. 신기하다고 생각한 친구들이 ‘뭐가 그렇게 좋냐’고 물으면 A는 ‘내가 목 마를 때 마음대로 물 마실 수 있어서’라고 대답한다. 그녀의 친구들 중 상당수는 이게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A가 독립을 하고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된 것은 아니다. 사실 A는 자신의 일상생활이 매우 버겁다고 느낀다. 직장에서는 나름 인정받고 있지만, 그런 자신이 종종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일상의 작은 일에 전전긍긍하거나 심지어 공포를 느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A는 사소한 일에서 결정장애를 겪는 경우가 많고, 결정을 한 후에도 이 결정이 옳았는지를 놓고 지나치게 스스로를 들볶곤 한다. 자신이 결정이 최선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근거가 조금이라도 나오면 A는 심하게 자학을 하며 수치심을 느낀다.
심지어 좋지 않은 일이 있어 기분이 최악의 컨디션을 찍는 날이면 ‘마음대로 물을 마실 수 있어서 좋다’던 상황마저도 180도 뒤집혀 엄청난 무기력을 느낀다. 이제 비록 옆에서 핀잔을 주고 비웃던 엄마 B씨는 없지만 하도 어릴 때부터 들어 내면화되어버린 B씨의 목소리는 A의 내면에서 가면을 바꿔쓰고 끊임없이 재생된다.
‘방금 전에 물 마셔놓고 또 마셔? 너 일하기 싫은 거 아냐? 그것도 두 잔이나 마셔? 왜 이렇게 많이 마셔? 한 잔이 적당한 거 아냐? 아니, 오히려 세 잔 마셔야 하나? 회의 시간에 오래 버티려면?’
겨우 물 좀 마시는 데 이렇게 생각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A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충분히 갈증이 해소되었다고 느낄때까지 마신다. 그러나 A는 자신이 지금 물을 마셔도 되는지, 얼마나 마셔야 되는지 등 가장 기본적인 생명 유지 활동마저도 자신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기준을 찾으려는 부질없는 고민으로 우물쭈물하는 경우가 있다. 이 때문에 모든 결정과 행동이 느려지고 머리에는 늘 고민이 가득하다.
A의 엄마인 B씨는 왜 어린 시절 목이 마르다는 아이를 이상하게 취급했을까? 두 시간 전에 물을 마셨으면 정말 갈증을 느끼면 안 되는 것인가? 성인은 당연히 이 논리가 개소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직 엄마가 세상의 전부인 네 살 꼬마는 이것을 알 수가 없거나 알아봤자 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는다. 목이 말라 괴로운 것 뿐인데 잘못도 없이 비난을 받으니 무언가 억울하고 부당하다는 억하심정은 들겠지만, 여기에 논리로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아직 네 살 꼬마에게는 없다.
사실 B씨는 물을 달라는 딸의 요청이 귀찮아서 들어주기 싫었던 것 뿐이다. 그런데 본인이 나쁜 엄마가 되기는 싫으니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딸인 A를 이상한 아이 취급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는 그 부당한 모욕과 프레임을 그대로 뒤집어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엄마의 말이 틀렸다는 걸 지적해봤자 물은 한 방울도 못 얻어먹고 야단만 맞을 것이다. 네 살 꼬마는 어디 가서 생수를 사 먹을 돈도, 이동의 자율권도 없기 때문에 문제를 ‘독립적’으로 해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결국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은 자신의 기본적 감각, 불가항력적으로 타고난 조건, 생물학적 욕구마저도 죄 아닌 죄가 되는 상황을 자주 겪게 된다. 이런 성장 환경 속에서 아이는 자기가 잘못하지도 않은 일에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느끼는 습관이 들게 되고, 스스로의 판단을 믿지 못하게 된다. 단순히 ‘목이 마르다’는 감각마저도 스스로 의심하고 정당성을 증명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의사결정은 비효율적으로 매우 느려지고,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어 남에게 휘둘릴 가능성이 커진다.
웃기게도 차라리 엄마인 B씨가 솔직하게 ‘야, 귀찮으니까 이따가 집에 갈 때까지 기다려. 집에서 가서 네가 물 꺼내먹든지 맘대로 해.’라고 말했다면 이 편이 정신건강 면에서는 딸에게 더 나았을 것이다. 겉으로는 더 잔인한 말처럼 들리지만 적어도 메시지에 기만성이 없고 명확한 약속을 주기 때문에 이쪽이 아이로서는 견디기가 훨씬 쉽다. 엄마의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최소한 아이가 자신의 감각을 의심하게 되거나, 목이 마른 자신을 탓하게 되지는 않는다. 이처럼 말하는 부모도 절대 좋은 부모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악의 사례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이 강한 부모일수록 위처럼 솔직하게 자기 심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드물다. 특히나 내현적 나르시시즘이 압도적으로 강한 한국 문화에서는 그렇다. 외부 이미지를 중시하는 나르시시스트들은 곧 죽어도 착한 척을 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착한 척을 하려면 어떻게든 괴상한 해석을 동원해서라도 상황의 책임이 상대방에게 있는 것으로 몰아부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상황은 '목 마른 아이를 방치하는 나쁜 엄마'가 아니라 '물 먹는 하마 같은 이상한 아이'가 문제인 것으로 귀결된다. 아이와 엄마가 단 둘이 있을 때, 그곳에는 상황을 제3자 입장에서 판단해줄 배심원도 판사도 없다. 결국 목이 마른 아이는 목 마른 것만 해도 괴로운데 그에 더해 자기 자신이 이상한 아이라는 생각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물론 본인이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누구 눈치도 볼 필요 없고 거추장스럽게 착한 척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 때는 나르시시스트도 자기 본색을 거리낌없이 드러낸다. 미국 대통령직에 있을 당시의 도널드 트럼프를 생각하면 쉽다. 그러나 그런 권좌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많지 않으며, 대부분의 나르시시스트들은 현실에서 자신이 가진 권력이 불안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훨씬 더 야비한 기회주의적 전략을 사용해야만 하는 상황에 있다.
B씨는 자신의 딸이 나중에 컸을 때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 효도를 포기할까봐 걱정되기도 하고, 혹여라도 누가 봤을 때 명백히 ‘나쁜 엄마’라고 볼 만한 상황을 벌이기에는 심적으로 버겁고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목이 마르다는 아이를 이상한 아이로 몰고 '물 먹는 하마'라고 공격하며 딸의 입 자체를 틀어막으려 한 것이다.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이러한 자기중심적 정당화는 매우 기만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부정확하기 때문에 자식을 끊임없는 고통의 인지부조화 사이클로 몰아넣는다. 차라리 자식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사실을 잔인하지만 솔직하게 드러낸다면 자식이 알아서 선을 그어버리기 쉽겠지만,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절대 자식에게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때문에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말과 행동은 자주 모순을 노출한다. 이들은 입으로는 자식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손으로는 잔인한 폭행을 가하고, 실제적으로 끔찍한 손해를 입히면서 말로는 세상에서 나만큼 너를 위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자식이 부모의 이런 말을 믿지 않으면 ‘불효자/불효녀’의 낙인이 찍힌다. 때문에 많은 아이들은 이 믿기지 않는 메시지를 어떻게든 믿기 위해 꾸역꾸역 자신의 멀쩡한 판단력과 정신을 파괴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었을 때 부모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또 다른 착취 사이클에 빠진다.
‘사랑하니까 때리는 거야.’
'날 좋아하니까 잘되라는 의미에서 모욕하고 비난하는 거야.'
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최초에 말이 되는 것처럼 심어놓은 당사자는 부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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