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정상 부모와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통제를 구별하는 방법 본문

흙멘탈리스트/나르시시스트 부모

정상 부모와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통제를 구별하는 방법

Dirt Mentalist 2021. 9. 6. 08:01
반응형
반응형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아동 학대는 크게 통제형 학대와 방임형 학대로 나뉘는데 한 사람에게서 두 가지가 모두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한국에서는 특히 통제형이 두드러지게 자주 나타난다고 이전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 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지대한 관심, 간섭, 참견, 강요 등의 통제는 자식이 부모 당사자나 주변인에게 아무리 괴롭다고 호소한들 부모님이 다 사랑해서 그러시는 거니 이해해라는 조언 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들은 통제의 내용이 비합리적이고 결과적으로 자식에게 피해만 끼치는 경우라 해도, 부모가 나쁜 뜻으로 그랬겠느냐, 적어도 의도는 좋았을 것이라는 의견에서 벗어나는 조언을 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사랑의 반대가 무관심이라는 말도 있으니 맞는 말인 걸까? 어찌됐든 모종의 관심을 보였다면 애정이 있다는 뜻 아닐까? 애정이 아예 없다면 그냥 지나가는 사람 취급을 하고 참견도 하지 않을 테니 부모가 뭔가 나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진 것은 맞지 않을까? 그러니 부모의 의견을 다 따를 필요는 없더라도 부모의 진심을 의심하거나 경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고정관념은 많은 사람들에게 나르시시스트 부모를 객관적으로 보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다. 사랑의 반대가 무관심이고 어떤 형태의 관심이든 무관심보다는 좋은 것이며 따라서 감사해야 한다면, 폭력을 일삼는 배우자나 스토커도 나에게 모종의 관심을 가진 것이니 기분 좋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이 비유가 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실제 절대 다수의 가정폭력범이나 스토커의 심리적 프로파일은 나르시시즘과 강한 양의 상관관계를 보이며 이는 부모라는 명칭을 달아도 달라지지 않는다. 절대다수의 배우자 폭력범들이 자식에게도 폭력을 휘두르는 나르시시스트이며, 이들이 밖에 나가 제3자를 희생양으로 찍으면 스토커가 된다. 상대방을 자신의 물건으로 여기고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동일한 행동인데 단지 관계에 따라 매우 다른 사건으로 보일 뿐이다.

 

나르시시스트 부모 밑에서 강한 통제의 희생양이 된 자녀들이 자라 스토킹,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의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될 가능성 역시 압도적으로 높다. 어릴 때부터 경험한 부모와의 관계가 스토커/폭력범과의 관계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태어나자마자 경험하는 부모와의 관계는 사람이 평생 만들어나갈 모든 대인관계의 원형이 된다. 여기에 더해 한국의 문화에서는 감히 부모를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으니, 잘못된 부모를 만난 사람은 일평생 부모처럼 잘못된 사람들만 만나고 살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진다

 

물론 정상적인 부모도 때로는 참견과 간섭을 하며 이를 두고 자식과 갈등을 겪기도 한다. 의도가 좋다고 해서 모든 결과가 좋게 나오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르시시스트 부모와 정상 부모의 간섭과 참견 간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는데,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에 대한 분별력이 상당히 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아무리 기분나쁘고 이상해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사회적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뚜렷한 경고 신호가 보여도 이를 스스로 부정하는 상황에 빠져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부모의 통제와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통제를 구별할 수 있는 특징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 번째, 통제에 일관성이 없다.

나르시시스트는 내면적으로 깊이가 없기 때문에 사람이든 가치관이든 무언가에 본질적인 관심을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자식에게도 꾸준한 양육 철학을 유지하지 못하고 변덕이라 할 만큼 즉흥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로 인해 통제의 기준과 양상에 일관성이 없으며 심지어 모순적인 통제를 가하는 경우도 많다. 당연히 자식 입장에서는 기준을 명확히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 기준의 비일관성이나 모순을 지적하거나 명확한 설명을 요구할 경우,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윽박지르며 화를 내거나, 과거의 기준에 대해 내가 언제 그랬냐고 부정하거나, 논리적 궤변을 통해 자신의 모순이 모순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그때그때 알아서 달라지지 못하는 자식을 융통성과 응용력이 모자라는 것으로 몰아부친다.

 

두 번째, 통제의 이유가 없거나 거짓이다.

정상적인 부모가 자식을 통제하는 이유는 자식을 보호하고 성장시키기 위해서지만,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자식을 통제하는 이유는 본인의 통제욕 때문이다. 정상적인 부모는 자식을 통제할 때 외견상 설정하는 규칙 뒤에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으나, 나르시시트 부모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똑같이 안전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자식에게 통금 시간을 적용하더라도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실제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식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뿐이다. 따라서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본인이 내세우는 명분에 맞지 않는 모순을 자주 노출한다. 안전을 이유로 통금을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본인이 내킬 때는 자식에게 거리낌없이 위험한 일을 시킨다든가, 남자는 모두 위험하니 연애를 절대 하지 말라 해놓고 혼인 적령기가 되자마자 아무 상대하고나 속전속결로 결혼하라고 밀어부치는 식이다. 이러한 부모는 모두 통제를 위한 통제를 하고 있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통제 규율의 내용이 황당한 경우가 많으며, 적용 역시 비합리적으로 경직되어 있다.

위에서 말했듯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통제를 위한 통제를 하기 때문에 통제의 내용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으며, 합리적 수준의 유연성과 융통성이 없이 기계적인 통제를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자녀가 아침 6시에 일어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녀의 생활 패턴이나 시기적 특수성 등을 고려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아침 6라는 것에만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녀에게 동일한 습관을 심어주겠다고 마음 먹은 정상 부모라면 어떨까? 정상적인 부모는 아침 6시 기상이라는 규칙을 정했다 하더라도 그 기저에 언제나 더 중요한 본질적인 목적(자기 통제력 향상이라든가 건강한 수면 습관 들이기라든가)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본질적인 목적이 손상되는 것이 아니라면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 유연성을 발휘하거나 규율 자체를 변경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반면에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통제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이런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하며 자신이 세운 규율에서 벗어나는 다른 의견도 용납하지 못한다. 통제의 내용이 자식에게 정말로 도움이 되는지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명백히 잘못된 정보, 시대착오적인 발상,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규칙을 지속적으로 자식에게 강요하는 경우도 많다. 많은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심지어 자신의 생각이 객관적으로 잘못되었거나 최선이 아니라는 것이 만천하에 알려진 이후에도 물러서지 않는다. 애초부터 자식의 순종을 받아내는 것이 목적이지 올바른 통제로 자식을 성장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 번째, 통제의 효과 및 통제하지 않았을 때의 문제를 과장한다.

거짓말, 과장, 감정적으로 드라마틱한 오버액션은 나르시시스트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전략이다. 나르시시스트 부모 역시 자신이 설정한 통제 규율이 훌륭함을 설명하기 위해 자식 앞에서 거짓말과 연극을 동원한다. 나르시시스트가 사용할 수 있는 거짓말과 연극의 종류는 무한대로 다양하며, 부모의 판단상 현재의 상황과 자식의 성향에 가장 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용된다. 이는 내가 말한대로 살지 않으면 나는 병에 걸려 죽을 것이다와 같은 자학적 연극일 수도 있고, ‘이런 규칙을 안 지킨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쫄딱 망했더라는 식의 저주성 과장일 수도 있으며, ‘이런 것조차 못하겠다면 넌 진짜 세상에서 제일 못된 자식이다와 같은 극단적 평가일 수도 있다.

 

 

사례:

20대 직장인 A씨의 어머니는 A씨의 통금 시간을 10시로 정해놓았다. A씨는 성인에게 10시는 심하다고 반발했지만 A씨의 어머니는 험한 세상에 딸을 내놓은 부모의 입장에서 당연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데 A씨는 저녁에 일하는 학원강사이고 학원 일정이 11시에 끝나기 때문에 근무일에는 이를 지키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A씨의 어머니는 통금을 휴일에만 적용한다. (통제에 일관성이 없음)

A씨의 10시 통금에는 단 1초의 여유도 없다. 어머니는 스마트폰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정말 1초만 늦어도 A씨에게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야단을 친다. 어디 가서 토막 시신이 된 줄 알았다는 식의 극악한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그 뿐만이 아니다. 휴일에 모처럼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면 A씨의 어머니는 심할 경우 저녁 7시부터 전화를 해대며 딸의 귀가 일정을 확인한다. 10시 안에 분명히 들어가겠다고 확답을 해도 걱정된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다며 계속해서 전화를 한다. 9시 전후가 되면 5분에 한 번씩 전화를 하며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을 한다. 친구들 보기에 민망해진 A씨가 반발하면 어머니는 심장이 터져 죽을 것만 같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며 과장된 연기도 서슴지 않는다. (통제의 내용이 황당하며, 적용이 비합리적으로 경직되어 있음)

그러나 A씨가 정말로 위험하다고 느끼는 것은 휴일 밤 9시가 아니라 학원에서 근무를 하는 평일 퇴근 시간이다. A씨의 직장은 집과 거리가 있어 집에 도착하면 자정을 훌쩍 넘기게 되고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오는 길은 인적이 드문 골목길이다. 그런데 휴일에는 저녁 9시만 되어도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며 친구와 함께 있는 딸에게 계속 전화를 해 딸을 난처하게 만드는 어머니는 정작 딸이 나머지 주 5일 동안 자정이 넘은 시각에 혼자 골목길을 걸어 퇴근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심지어 시험 기간에 늦게까지 보충수업을 하다가 새벽 1시가 다 된 시간에 퇴근하게 된 딸이 먼저 무섭다고 말하며 차를 가지고 데리러 와줄 수 없냐고 부탁했을 때는 나보고 그 시간에 운전해서 널 데리러 가라고?’ 식의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거절하기도 했다. (통제의 이유가 거짓)

그런데 어느 휴일 A씨는 지하철 연착으로 인해 10 5분 가량에 집에 도착하고 말았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A씨는 아슬아슬하게 출발한 본인을 탓하며 집에 오는 내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는 시간을 인지하지도 못한 듯 어머, 왔니?’ 하며 평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거실 쪽을 보자 독립한 오빠가 오랜만에 집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A씨는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변명을 하려고 엄마, 제 시간에 출발은 했는데 지하철이 중간에 한참 멈추고 있어서…’ 라고 운을 뗐지만 어머니는 듣지도 않고 이내 시선을 돌려 오빠와의 대화로 돌아갔다. (통제에 일관성이 없음)

오는 내내 1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스스로를 들볶은 A씨는 허탈하기도 하고 본인이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랑하는 아들과 재미나게 놀고 있으면 평소엔 그렇게 위험하다던 딸이 갑자기 안 위험해기라도 하나 싶어 엄마의 통제가 애정의 발로라는 것에도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평소의 늦은 퇴근 시간도 걱정되던 A씨는 해결책이 독립 뿐이라 생각해 돈을 열심히 모아 독립 자금을 마련했다.

그런데 A씨가 직장과 가까운 곳에 작은 집을 얻어 독립하겠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평소에 나이든 딸 먹이고 재우는 것에 대한 불편과 피로를 호소하던 어머니인지라 A씨는 어머니의 반대가 예상 밖이었다. 게다가 평소에 안전을 강조하던 어머니가 이사를 하면 퇴근 후 훨씬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A씨의 설명에 대해 그까짓 이유로 집을 나가겠다는 거냐?’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한층 더 충격이었다. A씨가 ‘평소에는 그렇게 안전 타령을 하더니 이젠 내 안전이 그까짓 이유라고 표현할 만큼 별볼일 없느냐?’라고 받아치자 어머니는 말문이 막혀 씩씩대더니 안방으로 들어가버렸다. (통제의 이유가 거짓)

몇 시간쯤 지났을까, 친구들과 친지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A씨에 대한 뒷담화를 하고 의견을 구한 것으로 보이는 A씨의 어머니는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 억울하다는 듯 새로운 논리를 들고 나왔다.

, , 생각해보니까 여자 혼자 사는 게 얼마나 위험한 줄 아니? 생각 좀 해봐라. 주인 없는 물건이 막 싸돌아다니면 어느 놈이든 집어먹으려고 하게 돼 있어. 주제를 좀 알아라. 여자 혼자 사는 건 백배 더 위험해. 그리고 집만 가까우면 뭐하니? 혼자 산답시고 퇴근 후에 네가 밤늦게 놀러다니는지 내가 알 게나 뭐야? 네가 얌전히 집에 안 들어가고 엄한 데 싸돌아다니면 다 소용없잖아.”

A씨는 본인이 고른 집이 지역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퇴근 직후 꼬박꼬박 영상통화를 통해 집에 들어왔음을 알리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또 다시 극렬하게 분노했다.

그래봤자 세상에 100%는 없잖아! 네가 안전한 데 가봤자 100% 범죄 안 당한다는 보장이 있어? 네가 뭘 알아? 영상통화로 보고를 한다고? 그렇게까지 해서 꼭 집을 나가려는 이유가 뭐야? 집을 안나가면 안되는 이유가 있는 거네? 어느 놈팽이가 밖에서 꼬시더냐? 너 되게 수상하다?” (통제의 효과 및 통제하지 않았을 때의 문제를 과장)

 

이 사례에서 참견과 간섭이라는 이 글의 주제와 직접 관련은 없으나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언어 습관 하나를 더 지적해보려 한다. A씨는 모태솔로에 남들이 봤을 때는 답답할 정도의 모범생으로만 살아왔다. 그런데 어머니가 하는 말 속에서 A씨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언가 음흉한 캐릭터가 되어 있다. 또한 걱정된다는 이유로 위험한 상황을 묘사하는 어머니의 말 속에는 언제나 A씨를 향한 경멸과 인신공격이 들어있다.

 

예를 들어 아무 놈이나 집어먹을 수 있는 주인 없는 물건과 같은 표현은 어머니가 A씨를 보는 시선을 드러낸다. 본인은 십중팔구 내가 그렇게 본다는 게 아니라 세상이 험하다는 말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본인이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굳이 이런 적나라한 표현을 본인의 딸에게 투척할 이유가 없다. 이는 본인의 명을 거역하는 딸은 그 정도 물건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어머니 본인의 평가이다. 본인이 앞장서 딸을 비천한 존재로 먼저 묘사하는 A씨의 어머니는 A씨에게 잠재적 범죄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도록 강요하고 본인은 그에 동조해 딸을 비웃고 있다. A씨의 어머니는 말로는 자식을 보호한다지만 실제로는 자식에게 자신의 우월한 위치를 강조하기 위해 범죄자의 시선과 한 편에 서서 딸에게 고의적으로 모욕감을 주고 있는 것이며, 당연히 이러한 언어폭력은 실제 범죄를 당한 것과 유사한 심리적 피해를 일으킨다. 딸을 진심으로 아끼는 정상적인 부모라면 이를 직관적으로 알기 때문에 절대로 이런 표현을 쓸 수 없다.

 

어디 가서 토막 시신이 된 줄 알았다는 표현은 한층 더 우려스러운 수준이다. 이것은 걱정을 가장한 저주이다. A씨의 어머니는 본인의 권위에 완벽하게 복종하지 않는 자식의 불행을 내심 바라고 있으며,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식은 죽어 마땅하다는 본인의 세계관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 A씨의 어머니가 가진 세계관 속에서 딸이 잠재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범죄는 사회악이 아니라, 엄마 말을 듣지 않는 자식에게 내려지는 마땅한 처벌이다. 막말로 본인이 때리고 싶은 것을 범죄자가 대신 때려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A씨 어머니의 머릿속에서 자식은 오직 내 말을 잘 듣는 자식과 아닌 자식으로 나뉘며, 자식이 인생에서 겪는 모든 일은 순종에 대한 상 또는 불순종에 대한 벌로만 해석된다. 이런 부모는 딸을 실질적으로 보호할 능력도, 의지도 없으며 오히려 함께 있는 것이 딸에게 위험이 된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