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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 부모 – 부당한 착취가 지속되는 메커니즘

Dirt Mentalist 2021. 8. 4.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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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제대로 보살핌도 못 받고 자랐지만 늙은 부모 안쓰러워서 지는 게 이기는 셈 치고 최선을 다해서 효도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름 최선을 다해서 해드려도 늘 불만이시고 칭찬 한 번 해주시는 법이 없네요. 거기다가 맨날 카톡으로 자기 살 베어서 부모 봉양한 효자 얘기같은 극단적 효 사상 강요 메시지를 줄기차게 보내셔서 정말 정 떨어집니다. 조금만 살갑게 해주셔도 훨씬 힘이 나서 더 잘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그걸 모르실까요? 이런 태도가 오히려 역효과난다는 걸 정녕 모르실까요?”

 

 

이런 사례를 보고 부모가 어리석다, 자기 복을 자기가 차고 있다는 식의 평가를 하기는 쉽다. 무리한 요구로 반감이 들게 만들면 그것 자체가 '역효과'가 일어난 것이라고 판단을 끝내버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럴까?

 

무리한 요구로 상대가 반감이 들었다면 정말로 역효과가 났다고 볼 수 있을까?

지나친 요구로 반감을 불러일으킨 부모는 정말 본인 이익의 관점에서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걸까?

어느 정도 배려해주면서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나르시시스트 부모로서도 현명한 선택인데 저러다 연이 끊어지면 그들도 나중에는 후회하게 될까?

 

놀랍게도 세 질문에 대한 답은 모두 아니오.

 

첫 번째, 혼자만의 단순한 반감은 '역효과'가 아니다. 최소한 본인이 하던 효도를 그만두거나 연을 끊는 수준의 변화가 있어야만 역효과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당하는 사람 쪽이 저 혼자 속으로 반감을 가졌다고 해서 상황에 변화가 생기지는 않는다.

본인 감정은 본인에게나 중요하지, 표현하지 않으면 타인은 이를 알 수도 없고, 안다고 한들 당연히 자기 일처럼 생각해주지 않는다. 상대가 나르시시스트라면 더더욱 그렇다.

 

자식 입장에서야 본인이 부모를 진심으로위하는 마음이 우러나지 않게 되는 것 자체가 심각한 현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본인이 세뇌 교육을 통해 내면화한 도덕/윤리의 본질을 본인만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몰라서 일어나는 일방적 착각이다.

 

애초부터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조종이 목표이고 도덕/윤리 강요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식의 진심이 없어졌다는 것 자체에 그다지 충격받지 않는다. 본인 진심은 본인한테나 중요하지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는 그 자체로 아무 가치가 없다.

 

'그래도 반감이 들었다면 결국엔 자식이 자신이 베풀던 모든 것을 중단하지 않을까? 그러면 역효과가 났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고, 그러한 통계를 알기 때문에 나르시시스트 부모들은 현실적으로 이를 별로 겁내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반감이 들면 저절로 세뇌가 풀린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반감은 반감이고 세뇌는 세뇌이다.

 

반감은 심신이 고통스러워지면 당연히 일어나는 감정이다. 동물이라면 거기에서 행동 결정이 끝나겠지만, 인간만큼은 같은 고통도 대뇌가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행동 양상을 보인다. 아무리 반감이 들어봤자 이성적으로 '그래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한, 세뇌는 굳건히 유지된다.

 

사회적 세뇌 기술이 극에 달했을 경우에는 이성적 세뇌가 거꾸로 동물적 본능을 훼손시키는 단계까지 올라와 심지어 감각 이상 증상까지도 불러올 수 있다. 실제로 일본의 한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는 폭력을 당연시하게 된 아이들이 맞아도 '아프지 않다'고 느끼게 된 사례가 있었다.

이 역시 인간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세뇌당해온 가치관이 사회 통념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일 경우, 이를 객관적으로 보게 해 줄 외부 기준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세뇌라는 것은 특정 사상 주입을 위해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중지시키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라는 것이 외부에 선택 가능한 다른 비교 대상이 없을 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제 사회라는 외부 세상이 있기 때문에 식민지 독립이라는 것은 가능해도, (아직) 우주 연합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지구 행성으로부터의 독립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회 통념에 부합하는 가치관은 다른 종류의 가치관을 부도덕한 것으로 낙인찍으며, 이 낙인이 두려워 벗어날 생각을 원천차단하게 되면 '외부'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세뇌로부터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수준의 요구 및 강요가 많을수록, 상대적 효과로 웬만한 부탁은 다 들어주게 돼 있는 사람의 심리도 고려해야 한다. <설득의 심리학> 같은 책에서 대조 효과로 설명한 원리인데, 나르시시스트는 대개 이 부분을 매우 잘 악용한다.

 

무난한 관계 유지를 중시하는 사람일수록, 아무리 무리한 요구도 100번이나 부탁하면 최소한 한 번은 해줘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는 경향이 크다. 한국처럼 관계지향성이 중시되는 곳에서는 사회적으로도 100번 부탁을 100번 모두 거절하면 내용과 상관없이 단지 거절을 많이 했다는 이유만으로 거절하는 사람을 독종으로 몰아버리는 경향이 적지 않다.

 

마찬가지로 줄기차게 수준 낮은 효도 강요 메시지를 보내 자식의 반감을 사면 손해일 것 같지만,

이미 그토록 심한 강요를 받아 본 사람은 역치가 올라가 웬만한 강요에는 순응하는 경향이 커진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 살펴보면,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본인의 이익을 발로 차 버리는 어리석은 행위를 한다는 관점은 철저히 제3자의 관점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이익이란 무엇일까? 나르시시스트에게는 타인을 무시하고 타인에게 정당한 대가를 주지 않는 것이 하나의 매우 큰 심리적 이익이자 쾌락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가에는 물질적인 것과 무형적인 것이 모두 포함된다.

 

자식이 어떤 것을 해줘도 시큰둥해하고, 어떤 큰 일을 성취해도 별 거 아닌 식이라고 말하는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단순히 더 좋은 걸 달라고 투정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5성급 호텔 스위트룸도 성에 차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자식의 1억 연봉에 대해 그 정도는 당연하다고 말할 때, 그들은 나는 그것보다 더 높은 수준이다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 자식이 해 주는 일이나 자식의 성취가 정말로 별 거 아니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그것보다 더 훌륭한 것으로 규정해 서열을 잡기 위함이다.

 

때문에 이는 본질적으로 사회의 객관적인 기준과도 무관하다.

 

자식이 부모에게 대통령급 귀빈 대접을 해줘도, 자식이 올림픽 금메달에 노벨상까지 받아와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르시시스트 쾌락의 핵심은 비난하는 즐거움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해 그들은 이런 과시를 하지 못하면, 대통령급 귀빈 대접을 받아도 아무런 즐거움이나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자식의 수고로움을 폄하하는 행위는 명백히 본인의 심리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다.

3자들은 이 이익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부당한 비난이 어리석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그들은 자신에게 명백히 이익이 되는 방향을 선택한 것이다.

 

세 번째 질문을 살펴보자.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나중에 자식이 반감이 커져 관계 유지가 불가능해졌을 때 이를 후회할까?

 

대개는 그렇지 않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가장 본질적인 쾌락, , 본인에게 가장 큰 이익은 어디까지나 심리적 우월감과 서열화이다.

이것을 느끼지 못하면 나르시시스트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다.

 

때문에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가장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은

자식의 존재 자체도 아니고

자식이 베풀어주는 물질이나 서비스도 아니고

자식을 통제하고 자신의 소속 아래 둠으로써 느끼는 심리적 우월감과 사회적 정복감이다.

 

이를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제아무리 잘난 자식도, 잘해주는 자식도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자식이 연을 끊으면 자식으로 인해 보던 이익이 있을 경우, 그 이익이 아쉬울지언정, 자식의 존재 자체를 아쉬워하지는 않는다.

 

자식을 애초에 잃지 않기 위해, 또는 뒤늦게나마 자식을 되찾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자식에 대한 진정한 존중과 인정이라면 더더욱 아쉬워할 이유가 없다.

 

심리적 우월감과 정복감을 얻을 수 없는 자식과의 관계는 그들에게 남는 장사가 아니며, 유지할 이유가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자식에 대한 부당한 착취는 필연이며, 배려나 절제가 가능한 부분이 아니다.

합당한 배려나 절제를 해야 유지되는 관계라면, 높은 확률로 그들 쪽이 먼저 알아서 관계를 끊어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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