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나르시시스트 부모 - 통제했다가 방임했다가 본문

흙멘탈리스트/나르시시스트 부모

나르시시스트 부모 - 통제했다가 방임했다가

Dirt Mentalist 2021. 6. 29. 23:29
반응형
반응형

부모의 자식에 대한 과도한 통제는 보통 ‘과잉보호’, ‘헬리콥터 부모’ 등의 키워드로 대변되고, 자식에 대한 과도한 방임은 훈육 부족이나 방치형 아동 학대 등으로 인식된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두 가지는 상반되는 것으로 보인다. 전자가 교육열 높고 야심찬 부모의 아낌없는 지원 또는 24시간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설계하는 극성 부모를 연상시킨다면, 두 번째는 반대로 자식에게 관심이 없거나 게으른 부모, 더 나아가 아이를 버리고 도망가는 부모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상반된 것으로 보이는 두 유형은 개인의 나르시시즘 발현 양상에 따른 차이일 뿐, 모두 부모의 나르시시즘이 보여주는 양극단이다. 전자가 자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이익을 발생시키는 전략을 택했다면, 후자는 자식 양육의 노동, 부담, 책임감에서 도피함으로써 자신의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것 뿐이다. 어느 쪽이든 본인의 이익이 최우선이라는 점은 같다.

한국에서 두 유형 중 눈에 더 자주 띄는 것은 압도적으로 통제형이다. 한국 부모의 나르시시즘이 (적어도 겉으로나마) 방임형보다 통제형으로 흐르는 까닭은 방임형이 사회적 비난에 더 취약하기 때문이다. 통제형은 입신양명을 강조하고 맹모삼천지교가 아름다운 이야기로 회자되는 유교문화권 한국에서 크게 비난받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식에 대한 무관심과 방치는 막바로 모성애/부성애 부족으로 비난받지만 자식에 대한 지나친 통제는 그저 정도가 심하다는 게 문제일 뿐 방향에는 문제가 없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식을 사랑하니까 보호하는 거겠지, 걱정되니까 감시하는 거겠지, 잘 됐으면 하는 마음에 간섭하는 거겠지 식으로 생각해주는 사람이 많으니 통제형 부모는 특별히 자신을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 통제형 부모에게는 사회적 통념 뒤에 숨을 공간이 많다.

그러나 통제형이 방임형보다 낫다는 통념은 어디까지나 방관자들의 관점이다. 방임형이 욕을 더 먹는 것은 눈에 쉽게 띄고 더 튀기 때문이지, 방임형이 자식에게 끼치는 악영향이 실제로 더 커서는 아니다. 많은 경우에 실제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자식이 받는 악영향은 방임형보다 통제형일 경우가 더 크다. 부모의 나르시시즘이 심할수록 더 그렇다. 부모라는 사람들을 부모의 타이틀 없이 한 인간으로 보면 놀라울 게 없는 현상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이기주의자가 내 옆에 딱 붙어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나한테 무관심한 게 나을까? 후자는 단지 부모에게 얻을 게 없는 수준이지만 전자는 부모가 자식의 정체성과 에너지를 끊임없이 갉아먹는다.

물론 극단적인 케이스에서 자식을 굶긴다든가,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찾지도 않는다든가 하는 수준의 방임은 자식이 어린 시절일 경우 생명의 위협이 될 수도 있지만, 이것조차 자식 입장에서 통제형 부모의 극단적 양상인 폭행 치사나 자살 유도에 비해 본질적으로 더 끔찍할 이유는 없다. 전자가 더 섬뜩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단지 제3자들이 자식에 대한 무관심을 자식에 대한 증오나 분노보다 더 비인간적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적어도 후자는 강렬한 감정이기 때문에 통념상 무관심보다 더 용인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와 반대로, 굶겨죽이지만 않는 수준이라면, 대부분의 경우 방임형이 그나마 통제형보다 악영향이 덜하다. '멍청하고 게으른 리더'보다 '멍청하고 부지런한 리더'가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뼈 있는 우스개와 같은 원리이다.

방임형보다 통제형이 해로운 이유를 더 본질적으로 이해하려면, 통제형 나르시시즘이 실제로는 방임형 나르시시즘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이기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인지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즘은 타인을 사람이 아닌 도구로 본다. 사람은 소통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자녀 양육은 누구에게나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때문에 자식은 당장 이용해먹기가 매우 버거운 대상이다. 게다가 부모-자식 관계에는 무거운 법적 책임이 걸려있다. 제3자와의 관계는 사귀다 싫으면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자식이 싫다고 내다버리거나 굶겨죽이면 어마어마한 사회적 질타와 형사 처벌이 뒤따른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자식이란 이런 태생적 구속력 때문에 가장 '대박' 도구가 될 수도, 가장 '쪽박' 도구가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존재이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이 위험한 관계에서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고 테크트리를 짠다.

한마디로 나르시시스트에게 자녀 양육이란 ‘물려서 강제 장기 투자’하게 된 상황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의로 낳아 놓고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애초에 나르시시스트가 자식을 갖게 되는 이유는 '남에게 번듯하게 보이기 위해'서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나르시시스트는 이를 본인의 선택으로 인지하지 않는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이런 인생 통과 의례는 본인의 진심을 담은 선택이라기보다 싫어도 먹고 살기 위해 억지로 출근해야 하는 직장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아도 자식에 대한 애정(이것조차도 삐뚤어진 나르시시즘적 애정이지만)보다 증오와 혐오를 더 강하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모든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본인이 자식에게 무슨 짓을 하든, 부모-자식 관계에서 가련한 피해자이자 희생자는 본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결국 이 울며 겨자먹기 장투 상황에서 나르시시스트 부모를 견디게 해 줄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 중 하나가 된다. 1) 아깝지만 일단 투자를 하고 나중에 회수를 하거나, 2) 아까우니까 아예 처음부터 투자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심리를 부모-자식이라는 치장된 관계에서 벗어나 투자자의 심리로 보면 통제형의 악영향이 더 심한 이유를 이해하기 훨씬 쉽다. 아까우니까 투자를 최소화하는 입장에 비해 일단 투자하고 회수하고자 하는 쪽이 욕심도 더 많고, 잦은 개입으로 실수할 가능성도 높으며, 늘 높은 불안감에 떨게 되고,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 투자 대상에 대한 배신감도 훨씬 커질 수밖에 없다. 부모가 가진 자원이 적고, 능력과 지적 수준이 떨어지고, 자기 절제력이 모자랄수록 이 악영향은 눈덩이처럼 더 커진다. 막말로 본인도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지 모르고 지원을 할 능력도 안 되는 낙오자 부모가 욕심만 앞서 자식을 마구잡이로 통제한다고 교육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식은 오히려 배워서 득 될 게 없는 부모의 이상한 모습을 닮게 되거나, 부모의 어리석고 시대착오적인 조언대로 살다가 불행해지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방임형보다 통제형이 더 위험하다는 사실보다 현실적으로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실제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순수하게 어느 한쪽에 속하기보다는 비중 편차가 있을지언정 거의 대부분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소 18년 이상에 이르는 긴 자녀 양육 기간 동안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의 스타일만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18년 이상 주식을 장기 보유하는 동안 자신의 투자 스타일에 대해 단 한 번도 재고하지 않는 게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통제형 부모라 해도 투자 회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면 방임하고 싶다는 마음에 들게 되고, 방임형 부모 역시 아무리 최소한의 투자라 한들 밥값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면 뭔가를 회수하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이 두 가지 스타일의 교차는 시간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시점에도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혹시 부모가 나의 사소한 것(특히 외면적인 것이나 허례허식과 관련된 것)에는 심각하게 집착하고 통제하면서, 막상 나의 진짜 중요한 것에는 신경을 써주지 않는다거나, 내가 잘 나갈 때는 좋아해주는 것 같다가도 일이 잘 안풀릴 때마다 외면해버리는 느낌이 든다면 그 부모는 상황 조건에 따라 통제와 방임 전략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방임형 부모라 해도 남이 보는 자신이 어떤 부모인지, 남이 보는 내 자식은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그 인식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관심이 없는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없다. 나르시시즘은 남의 시선에 비친 나의 모습의 총합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어떤 면으로든 남의 시선을 가장 중요시한다. 따라서 방임형 부모는 실제 대부분의 영역에서 자식을 방임하더라도 이를 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며, 그러기 위해 일정 부분, 특히 형식적이고 외관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집착과 통제를 가할 수밖에 없다. 남이 안 볼 때는 형편없는 음식을 먹이다가도 어쩌다 남이 보게 될 때는 그럴싸한 밥상을 차려주고 느닷없이 상류층의 밥상 매너를 가르치려 한다든가, 평소에는 필요한 물건 하나도 제대로 사주지 않고 인색하다가 명절에 친척집에 갈 때는 평소 라이프스타일 수준과 전혀 안 맞는 명품으로 자식을 차려입힌다든지 하는 모순적인 모습은 방임형 부모의 필연적 귀결이다.

마찬가지로 통제형 부모 역시 동네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헬리콥터 부모라 할지라도 자식의 진짜 모습에 관심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방임형과 동일하다. 일년 내내 가장 비싼 보약과 총명탕을 구해다 먹이면서도 막상 아이가 정말로 아프다고 스스로 표현하는 신체 증상에 대해서는 듣는 둥 마는 둥 한다든지, 아이에게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루종일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지만 오로지 자신만의 감정에만 집중하고 막상 당사자인 아이의 정서는 방치한다든지, 성인 자녀의 경우, 자식의 직장 만족도에는 전혀 관심 없으면서 자식의 월급 명세서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든지 하는 것이 전형적인 케이스이다.

요컨대 방임형이든 통제형이든,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자식은 정말 부모의 도움/손길/교육/지지/훈육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방치되고, 부모가 필요없거나 마땅히 뒤로 물러나 자식의 영역을 인정해줘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거꾸로 간섭/통제/강요/세뇌를 당하게 된다. 발현 양상의 차이와 무관하게, 개입해야 될 것과 아닌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모든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공통적 특징이다. 개입의 기준이 자식의 필요가 아니고 본인의 기분 또는 남의 시선이기 때문에 그렇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식과의 관계 기반이 '남에게 좋은 부모처럼 보이기 체크리스트'가 아닌 자식의 고유한 특성이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그 사실에 분노를 느낀다. 본인의 이미지에 직접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은 남의 눈에 좋은 부모로 비칠 수 있는 행위 뿐이기 때문에,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식은 배은망덕하거나, 혼자 유난을 떠는 것이거나, 부모에게 지나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이렇게 자족적으로 ‘부모 입장에서 개입하고 싶은 것’만 골라 개입하는 부모 편의적인 양육으로 인해, 자식은 정작 부모에게 정말 필요한 지원은 받지 못하고 받지 말아야 할 쓰레기만 짊어지게 된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