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흙멘탈의 자기계발 - 근본주의의 위험성 본문
한 미국인과 종교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를 하다가 이내 결혼에 대한 사회적 압박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 적이 있다. 이야기의 흐름은 이러했다. 북미 문화는 기독교에 기초하고 있다, 비록 교회에 가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기독교 뿌리가 강하며 특히 나이든 사람들일수록 그렇다, 기독교 보수 신자들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을 중요시하며 따라서 북미 사회의 결혼 압박은 주로 기독교 문화에서 온다는 식. 미국/캐나다만을 한정할 때는 대략 틀린 데는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내가 ‘한국 사회의 결혼 압력은 다른 데서 온다’고 하자 이야기가 예기치 못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상대가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일단 그는 깜짝 놀라며 자신은 한국이 실질적으로 기독교 국가인 줄 알았다고 했다(그가 그렇게 오해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미국의 한국에 대한 문화적 영향력을 과대평가했을 수도 있고, 워낙 교회 중심으로 뭉치는 한국 이민자 집단을 한국에 그대로 대입해 생각했을 수도 있다). 내가 한국에 기독교인이 꽤 되기는 하지만 기껏해야 30% 정도일 것이다(현재는 이보다도 훨씬 낮지만 이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2010년대 중반이었으니 아주 틀린 수치는 아니다), 한국은 종교 색채가 매우 약한 나라이고 무종교인이 가장 많다고 하자 그는 더욱 더 놀라며 진짜냐고 여러 번을 물었다. 그는 무종교인이 대다수인 국가를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럼 한국은 결혼이나 가정 꾸리기에 대한 압박도 없겠네? 그것 뿐 아니라 동성애나 그런 거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도덕적 압박 이런 게 없겠다. 기독교가 많지 않으니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은데.”
“기독교 질서가 없는데 왜?”
“그렇다고 다른 문화적 틀이나 금기가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기독교 말고 다른 종교도 없는 사람이 더 많다며? 종교가 없는데 무슨 금기가 있어?”
“종교가 없어도 한국은 한국 사회대로 도덕과 정상의 기준이라는 걸 가지고 있어.”
“하지만 정도는 많이 약하겠지?”
“아니, 전혀 약하지 않은데.”
“종교가 없는데 대체 왜? 어떻게?”
그는 끝내 납득을 하지 못했고 나도 끝내 설득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국 사회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그가 왜 그 이해를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다른 한국인도 한 이란인과 함께 비슷한 얘기를 하다가 똑같은 대화 루트를 탄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화의 흐름은 거의 유사했다. '기독교'가 '이슬람교'로 바뀌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럼 한국은 되게 자유롭겠네? 미국 문화랑 똑같은 거 아냐?! 이슬람교가 없으니까!”
“……”
인간이 자기 중심성을 벗어난 이해를 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 육체의 범주를 넘어서는 추상화 능력과 추론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생물학적 생존 게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종종 정신적 능력을 그에 제한당한다. 생각은 이론적으로 자유롭지만, 실제적으로는 나의 삶의 방식이 의존하고 있는 틀을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좋은 의존이든 나쁜 의존이든 마찬가지다.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난 이들은 쉽사리 기독교가 자기 인생의 신념이 되거나 또는 주적이 된다. 이슬람교 국가에서 태어난 이들 역시 이슬람교가 자기 인생의 신념이 되거나 또는 주적이 된다. 소속된 집단의 주류 문화와 자신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가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고, 한평생 이 중요한 관계에 집중하다 보니 생각도 명백한 특정 구심점과 틀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면 이슬람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아무 생각/감정이 없는 상태가 되기 쉽지만, 이란에서 태어나면 그럴 수 없다. 순종하거나 반발하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 숲 속에서 타잔처럼 살았다면 모를까, 해당 국가에서 출생신고를 하고 공교육을 받고 살았다면 내 생활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결정하는 사회 이념의 틀과 아무 관계도 아닐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 사는 한국인들 역시 자신의 생활 속에서 유교적 도덕률이나 생활 양식과 자신 사이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종의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교적 질서를 지지하든 싫어하든, 양쪽 다 해당 질서로부터 영향을 받고 의사 결정을 할 때마다 그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주류 문화라는 게 그런 것이다. 모두가 그것을 완벽하게 따르지는 않더라도, 모든 것이 그것과의 관계를 통해 정의된다.
자신의 (단기적) 생존에만 매몰되어 시야가 좁아지면, 자신이 처한 문화적 맥락의 특수성을 잊게 되고 각 문화의 특수한 표현형 상위에서 작동하는 보다 보편적인 원리 및 다양한 요인에 대한 이해 능력이 저하된다. 그래서 본인의 신념을 모두의 신념으로 착각하게 되고, 본인의 주적을 모두의 주적으로 착각하게 된다. 자신의 감정을 좌우하고 인생을 작동하게 만드는 모든 코드가 남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또는 그래야만 한다고 여기게 된다. 기독교 교리가 자신이 처한 지옥의 최종 보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독교만 없으면 유토피아가 온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기독교 신앙의 부족이 최종 보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독교만 지키면 유토피아가 온다고 생각한다. 이런 결론은 합리적이기보다는 편의주의적이며, 모든 근본주의의 씨앗이 된다.
근본주의에 휘둘리는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가 된 사례는 없다. 근본이 아닌 것을 근본이라고 주장하는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어떠한 종류든 근본주의가 자리 잡은 국가는 대개 지상 지옥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다. 이처럼 내가 속한 문화 또는 상황에서 특수성과 보편성을 가려내는 시선은 타인 이해를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이해와 자기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이는 개인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칼로 흥한 자가 칼로 망한다는 말은 인과응보나 앙갚음에 대한 말이 아니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움직이는 세상에 의존하기 쉽다. 모든 것을 칼 중심으로만 보다가 편협해진 시야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그로 인해 망하는 것이다. 본인이 의존하고 있는 것의 실체를 보다 넓은 맥락에서 파악하지 못해서이다. 이는 긍정적 의존 뿐 아니라 혐오나 투사 같은 부정적 의존 기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칼의 힘에 대해 지지나 반대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칼’이라는 구체적 대상이 전체의 일부이자 하나의 표현형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칼이 뜻하는 것은 폭력이며, 폭력이 뜻하는 것은 타인의 자유의지 억압을 통해 자기중심적 세상을 만들려는 누군가의 욕망이다. 이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칼을 든 자를 피해다니다가 총을 든 자에게 말려들게 된다.
나를 정말로 괴롭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은 무엇인가? ‘다 무조건 돈 때문이다’ 또는 ‘특정 정권이 당선되어서이다’ 등 사회가 던져주는 표면적 수위에서의 답으로 편의주의적 도피를 하는 순간, 근본주의자가 되어 본질과 수단의 주객 전도가 일어나고 판단력은 흐려진다. 엉뚱한 자를 공격하거나 사랑하고 엉뚱한 곳으로 탈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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