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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장점이 곧 단점이고 단점이 곧 장점이다

Dirt Mentalist 2022. 9. 9.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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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월 타계한 작곡가 반겔리스(반젤리스)의 <블레이드 러너> 사운드트랙은 사운드트랙의 명작으로 꼽히며, 할리우드 영화 역사상 최고의 사운드트랙이라는 칭송도 가능한 작품이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찾기 힘든 패러다임의 이 사운드트랙은 영화의 나이가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도 큰 사랑을 받으며 음악 좀 듣는다는 이들의 베스트 리스트에 끊임없이 소환되고 있다. 반겔리스는 또한 영화 <불의 전차>의 주제곡(런던 올림픽 개막식 때 영국이 미스터 빈과 함께 자랑스레 내놓은 바로 그 곡)으로도 유명한데, 원작 영화가 지금은 거의 화제가 되지 않는 것에 반해 노래는 아직도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당대에도 인기가 엄청나서 영화 사운드트랙으로는 정말 드물게 빌보드 앨범 차트와 싱글 차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영국 영화+그리스 작곡가 조합으로 미국 차트까지 점령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불의 전차> 테마곡은 그리스 국적 뮤지션의 유일한 빌보드 1위곡이자 동시에 연주곡으로서 유일한 1위곡이라는 독보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가 작곡한 사운드트랙의 이런 미친 퀄리티만을 보자면 많은 영화 제작자와 감독이 앞다투어 그와 일하고 싶어했어야 정상인 것으로 보인다. 반겔리스의 독특한 사운드트랙은 영화 자체의 작품성을 높여줄 뿐 아니라 화제성과 인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반겔리스의 이력을 보면 그가 작업한 사운드트랙 수가 상당히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0년 즈음에 데뷔해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활동을 했던 그의 긴 경력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나마 사운드트랙 디스코그래피 중 대중이 기억할 만한 할리우드 장편 극영화는 5개도 채 되지 않는다. 전설이 된 <블레이드 러너>, <불의 전차>를 제외하고는 <1492 콜럼버스>와 <알렉산더> 정도가 전부다. 80년대에 2개, 90년대에 1개, 2000년대에 1개 정도만 맡은 꼴이다. 그런데 <1492 콜럼버스>는 <블레이드 러너>와 동일한 감독(리들리 스콧)이고, <알렉산더>는 영화 자체가 그리스 지역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그를 고용할 동기가 비교적 뚜렷했다. 결국 반겔리스는 할리우드의 폭넓은 픽업 대상이 아니었다는 뜻이며, '특별한' 이유 없이는 고용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할리우드 영화계의 일부가 되는 것이 꼭 성공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이 모든 작곡가의 지향점이 되어야 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저조한 작업 성사 건수에는 좀 기이한 면이 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일 수 있다. 일단 반겔리스는 영화 음악 작곡가이기 이전에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색채가 강하기 때문에 본인만의 활동에 에너지를 쏟기 위해 일부러 영화 음악 일을 많이 맡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영화 제작사 쪽에서 흘러나온 전언으로는 반겔리스의 작업이 상당히 느리고 약속한 데드라인을 자꾸 어기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미국 영화 '산업계'가 얼마나 철저한 산업 원리로 돌아가는지 고려하면 이는 다소 치명적인 단점이다. 모든 비즈니스가 그렇듯, 품질도 중요하지만 완성을 못하거나 납기일을 못 지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릴 만큼의 타격이 되며, 차라리 70% 정도의 만족도를 주더라도 확실하게 납품하는 것이 나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블레이드 러너>의 사운드트랙은 엄청난 인기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개봉한 지 10년이 넘어서도 발매되지 않다가 1994년에야 발매되었는데 이 역시 반겔리스와 제작사 측의 갈등이 원인이라고 전해진다. 반겔리스의 느린 작업 속도에 불안해진 제작사가 다른 작곡가를 백업으로 고용해두었는데, 나중에 이를 알게 되어 화가 난 반겔리스가 사운드트랙 발매에 동의를 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 <블레이드 러너>의 후속 영화인 <블레이드 러너 2049>가 나온다고 하자 반겔리스에게도 다시금 관심이 쏠렸다. 전설적인 사운드트랙이 영화 명성의 상당 지분을 차지하는 작품이니 당연했다. 제작진은 반겔리스에게 이런저런 타진을 해보기는 했지만 결국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고 아무도 그 이유를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결국 속편의 작곡가는 요한 요한슨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막상 요한 요한슨이 작업한 음악을 듣고 나서 제작사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의 음악을 들고 온 것이다. 사실 요한 요한슨 역시 반겔리스만큼이나 독자적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이 우선적인 작곡가였다. '요한 요한슨은 매우 색채가 강한 아티스트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라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말도 놀라울 것이 없었다. 양측은 음악적 해석의 차이를 좁힐 수 없었고 결국 요한 요한슨도 프로젝트에서 제외되어버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작곡가는 할리우드의 전천후 선수인 한스 짐머로 결정되어 무난하게(?) 일이 마무리되었다. 한스 짐머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뛰어난 작곡가이지만, 반겔리스나 요한 요한슨이었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지를 궁금해하며 아쉬워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

 

'마감 시간만 좀 잘 지키지.'

'솔로 앨범도 아니고 영화 음악인데 자기 고집 좀 꺾고 타협했으면 안 되나.'

 

외부 관찰자의 입장에서 반겔리스나 요한 요한슨같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입바른 조언을 하기는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본인의 작동 가능 범위 내에서 나름대로 마감 시간을 잘 지키려 노력했고, 타협을 위해 노력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문외한이 상상하는 수준보다는 더 까다로운 차원의 공약불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사람의 스타일이라는 게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분리해서 생각하지만 사실 누군가의 장점과 단점은 한 가지 특성의 양면인 경우가 많다. 맥락에 따라 손익이 달라져서 장점처럼 보였다가 단점처럼 보였다가 하는 것이지, 어느 경우에나 장점이고 단점인 특성은 생각보다 별로 없다. 반겔리스와 요한 요한슨의 단점처럼 보이는 특성은 곧 그들의 음악적 독창성을 가능케 한 요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때문에 자기 성찰 시에 자기 자신을 기계적으로, 분절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좋지 않다. 장바구니 리스트마냥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주욱 적어놓고 점수를 매기거나, 단점 리스트를 '집중 공략'해서 고치겠다는 발상은 대개 성공하지 못한다. 본인이라는 존재의 유기성을 이해하지 못한 계획이기 때문이다. 자기 반성한답시고 자기 단점을 확대 해석해 고치려고 하다가 자기 장점까지 버리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다. 사람은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 없는데 이는 의외로 능력 부족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성 때문일 수 있다. 이를 받아들이고 기회 비용을 정당하게 감수하는 편이 낫다. 

 

두 사람 모두에게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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