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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착취를 자각 또는 해결하지 못하는 13가지 이유

Dirt Mentalist 2021. 9. 1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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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적 대인관계는 범죄 등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평범해보이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가족 간 착취, 친구 간 착취, 직장 상사의 착취, 연인 간 착취 등 착취 대상과 방식의 디테일은 다양하지만, 모든 착취적 대인관계가 향하는 목적은 단 하나, 타인을 이용해 부당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과연 인권 개념이 발달한 현대에 일방적 착취 관계가 가능할까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법은 최소한의 인권만을, 그것도 '사후적으로' 보장할 뿐 인생 전반에 걸쳐 공평성을 보장해주는 장치가 아니다. 물론 그러한 법 덕분에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이러한 관계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크게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명백한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착취를 착취로 인식하는 자각이 없거나, 자각을 해도 벗어나려는 의지를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현대사회에서 착취적 대인관계는 거의 대부분 피해자가 자각 능력과 의지력이 결여된 상태라 주변에 다른 길이 있음에도 선택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피해자의 자각 능력과 의지력이 결여되는 것일까?


첫 번째, 착취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또는 전근대적으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착취의 정의가 고대 노예를 다루던 수준으로 고정되어 있으면 노예제가 불법인 현대사회에서는 착취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때문에 무슨 짓을 당했어도 법적으로 노예 신분이 아니니 착취를 당한 적도 없다는 결론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 정도면 옛날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거보다 더 심한 일 당한 사람들도 있다 등등의 비교는 나의 상황과 본질적으로 무관하다. 과거에 목화밭에서 채찍에 억울하게 맞아 죽은 노예가 있다는 사실이 현재 나의 주변인이 나의 인격을 모독하고 이익을 탈취해도 된다는 근거일 수가 없다. 두 사실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두 번째, 본인이 착취당할 만큼 가치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착취란 상대방이 나를 이용해 부당 이익을 얻는 것을 말하는데 본인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또는 상대방에게 0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상대방이 나로 인해 이익을 얻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상대방이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무슨 피해를 입었는지와 무관하게 착취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착각하게 된다. 많은 착취자들이 피해자들에게 일명 ‘후려치기’를 시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 번째, 인간의 야만적 욕구가 원하는 최종 자원은 언제나 물질이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인간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고 그를 내 이익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한 인간이 사회에서 획득할 수 있는 가장 큰 권력이다. 타인에 대한 가학에서 쾌감을 느끼는 나르시시스트/소시오패스 성향의 인간이라면 더 말할 것이 없다. 현대인들은 사회에서의 가장 큰 권력을 ‘돈’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돈은 어디까지나 직접적 타인 지배가 불가능할 때 이를 용이하게 해 줄 수 있는 수단으로 선호되는 것 뿐이다. <스타워즈> 세계관의 포스 같은 것을 사용해 사람을 내멋대로 조종하는 게 가능하다면 돈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불평등한 착취적 대인관계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도 이와 동일하다.

네 번째, 자의로든 타의로든 직관을 억누르기 때문이다.
착취적 대인관계는 의외로 초반에 직관적으로 느끼기 쉬운 경고 징후를 여러 번 드러낸다. 많은 이들이 나르시시스트, 소시오패스 등이 가진 위장술을 과대평가하는데 이들은 천재가 아니며, 오히려 사방에 본인들이 이상하고 위험한 존재라는 징후를 흘리고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에 대한 직관을 손쉽게 무시한다는 것이다. 직관은 한 인간이 본능, 지식, 논리, 감정, 경험을 총동원해 패턴을 찾아내는 능력이며, 모든 것이 총동원되기 때문에 이 과정을 일일이 설명해내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중요한 직관적 판단을 “하지만 꼭 100% 그렇다는 증거는 없잖아?”와 같은 딴지를 위한 딴지 한마디에 스스로 무너뜨리고 결과적으로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다섯 번째, 착취당하지 않는 관계 또는 상태가 무엇인지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간에게 본능과 직관이 있다 한들, 애초에 건강한 관계나 상태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면 본인이 처한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객관적으로 인지하기 힘들다. 비교 대상이 없고 외부 기준이 없다면 무엇을 중심에 놓고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괴로움이 느껴지는 상황이라 해도 대뇌가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않는 한 뾰족한 대처를 하지 못한다. 사회적인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여섯 번째, 모든 원인을 본인 탓으로 돌리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건, 그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건 나만 잘하면 결과가 좋을 것이라는 인과응보식 믿음은 모든 결과에 대한 원인을 본인에게 돌린다. ‘환경 탓하지 말라’는 한국식 교육은 이를 심화시킨다. 상대방이 무슨 짓을 했건 모든 원인이 본인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관계를 재고하는 대신 본인의 행동을 수정해 상대방의 인정을 받으려 하게 되어 있다. 상대방이 탈레반이든 사이코패스든, 나만 잘하면 모든 결과가 좋게 나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가망 없는 상황이나 관계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백일기도하듯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노력을 투입하게 되는 것이다.

일곱 번째, 본인을 타인의 평가 대상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든 남에게 잘 보이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히면 상대방이 나보다 특별할 것 없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게 된다. 수동적으로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내면화한 사람은 대인관계에서 늘 상대방을 심사위원의 자리에 갖다놓고 본인은 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평가를 받는 위치인 것처럼 느낀다. 본인은 불완전하지만 상대방은 완벽한 존재인 것처럼 전제하고 대인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이 절대자로 보이기 때문에 당연히 상대방의 결점, 의도, 이해관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여덟 번째, 어떤 이유로든 학습된 무기력증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좌절을 경험하면 학습된 무기력증에 빠진다. 무기력증에 빠지면 머리로는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이라는 판단이 들어도 이를 실천에 옮기기가 쉽지 않다. 어떤 종류의 변화든 변화에는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이다. 변화가 더 좋은 미래를 약속하는 게 확실한 상황이라 해도 이를 실천할 에너지 자체가 없으면 그림의 떡이 된다.

아홉 번째, 판단력이 떨어지는 주변인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주변인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사회성’이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잘 동조하고 사회 통념을 잘 따르는 것으로 오해하는 한국 문화에서는 더욱 그렇다. 한국인들 중 절대 다수가 혼자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왕따에 준하는 취급을 받거나, 그렇지 않아도 스스로 스트레스를 느낀다. 때문에 결과에 대해 책임질 사람들도 아닌 주변인들의 의견에 떠밀려 본인의 판단과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열 번째, 한국의 잘못된 '착한 사람' 개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의 ‘착한 사람’에 대한 개념은 통념과 달리 도덕/윤리와 무관하다. 윤리는 절대적 가치 기준에 대한 것이지만 한국인들의 ‘착하다’는 개념은 각 개인이 유동적으로 적용하는 편의주의적 개념에 가깝다. ‘윤리적인 사람’이라고 하면 대쪽같고 깐깐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히려 불편해할 인간형이 떠오르지만 ‘착한 사람’이라고 하면 아무런 기준 없이 상대방이 좌지우지하는대로 끌려다니는 인간형이 떠오른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나쁜 사람을 욕하면서도 나쁜 사람에게 고분고분 굴어주는 것에 대해서는 ‘착한 행동’이라고 칭찬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성격파탄자에게 부당한 욕을 먹으면서도 꾹꾹 참고 계속해서 친절하게 ‘을’이 되어주는 것을 ‘참 착하다’라고 칭찬하는 식이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피해자는 계속 그러한 부당한 관계에 머물러야만 착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이런 ‘착한’ 행동은 사실상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적으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 윤리적 관점에서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할 때는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주어서는 안 된다. 나쁜 사람에게 착취를 당해주는 것도 사실상 나쁜 사람의 나쁜 짓을 돕는 행동이다. 착한 일을 하고 싶으면 불우이웃 돕기 자선활동을 하든가 할 일이지 나르시시스트/소시오패스의 먹잇감이 되어줘봤자 나쁜 사람에게 더 나쁜 짓을 하라고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꼴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열 한 번째, 세상을 지나치게 비관하기 때문이다.
모든 현대인들은 이론적으로 열린 세상에 살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한 사람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환경의 반경은 매우 좁다. 부정적인 환경에서 부정적인 사고방식만을 선택하고 살아왔다면 세상을 비관적인 필터를 통해서만 보게 될 가능성이 크다. 비관에 빠져 있는 사람은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변화를 꾀하기 어렵다. 실제로 세상에는 부정적인 면모가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면만을 취사 선택해 받아들이면서 ‘자기 충족적 예언’의 악순환에 빠지게 되면 본인의 생각이 팩트에 기반한 객관적 결론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비관의 가능성만큼이나 낙관의 가능성에도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상황 개선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열 두 번째, 일관성에 대한 쓸데없는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일관성은 ‘한결같은 성질’을 말하며, 흔히 ‘일관성이 없다’는 것은 부정적인 평가로 쓰인다. 그러나 일관성은 토론장에서 논리적 틀을 지켜야 할 때 등을 포함해 몇 가지 상황에서만 중요하지 모든 상황에서 중요한 게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 모든 것이 다 한결같을 수도 없고, 오히려 한결같으면 안 될 상황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제 운동을 안 했으면 오늘도 운동을 안 해야 되고, 오늘 굶은 사람은 내일도 굶어야 한다는 식의 기계적 일관성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궤변이다. 그런데 착취적 대인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이런 쓸데없는 일관성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변화를 꾀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고,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변했다’와 같은 타인의 평가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열 세 번째,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가장 단순한 이유이다. 이런 이유로 착취적 대인관계를 지속하는 사람은 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본인의 괴로움과 손해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지만, 이 관계를 끝냄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손해가 더 크거나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본인이 손익 계산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순전히 이해득실에 대한 계산 결과 때문에 착취 관계를 지속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설사 초반에는 그렇게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관계가 지속되다보면 결국 위와 같이 정신적으로 자각 능력과 의지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착취적 대인관계의 피해자 중에서는 본인이 이런 이유로 관계를 지속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 상당수는 본인이 주체적 합리성을 완전히 상실한 존재로 비춰지는 것이 수치스러워 기만적인 손익 계산을 하고 있는 경우이다. 말로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자각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각이 되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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