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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 부모식 베풀기 - 해석편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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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 부모식 베풀기 - 해석편 2

Dirt Mentalist 2022. 6. 8.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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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사례: https://dirtmentalist.tistory.com/86

 

나르시시스트 부모식 베풀기 – 사례편

독립을 해서 부모와 따로 살고 있는 A씨는 요즘 어머니 때문에 골치다. 독립을 한 이후로 어머니가 자꾸 반찬을 준다는 빌미로 잦은 만남을 요구하거나 말도 없이 집으로 찾아오고, 집에 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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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악마의 편집: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는 나르시시스트의 각본

 

친구와 싸우다가 친구가 먼저 쌍욕을 날려 열받은 당신도 욕을 했는데 친구가 오직 당신의 쌍욕 부분만을 캡처해 다른 친구들에게 선수 쳐서 소문을 내고 다닌다면 어떨까? 상점 직원이 말도 되는 이유로 당신을 도둑으로 몰아 화를 냈더니 오직 당신이 화를 내는 부분만 촬영해 유튜브에 갑질 손님이라고 올려버린다면? 자극적 설정으로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여러 예능에서 사용했던 악마의 편집기술은 사실 일상생활에서도 누군가를 모함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 사건의 전체 맥락을 설명하지 않고 부분만을 알리는 것은 거짓말이 아닌 하는 거짓말 기술로, 적극적인 거짓말에 비해 하는 사람의 심적 부담과 이야기 조작의 수고를 크게 덜어준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공격하고자 하는 대상에게 이런 악마의 편집식 모함을 즐겨 사용한다. 이런 의도를 모르는 주변인은 자신이 어떤 각본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는지, 본인이 나르시시스트의 역할극 속에서 어떤 캐릭터로 등장하고 있는지 전혀 수가 없다.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에서는 아주 간단한 일상의 대화도 나르시시스트가 짜놓은 각본 속에서 이상한 맥락으로 악용될 있다.

 

사례 A씨는 처음에는 어머니의 반찬 공세가 싫어 이를 말려보려고 했으나 친구의 (악의는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틀린) 조언에 따라 어머니에게 긍정적인 리액션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어머니의 행동은 A씨에게 도움은커녕 방해만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를 내색하지 않고 어머니를 추켜세워드리고 반찬값도 챙겨드렸다. 겉으로는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반찬을 해다 주는 그림이지만, 실상은 자식이 어머니를 위해 봉사하고 있었던 상황이다. A씨가 본인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어머니의 좋은 엄마 코스프레 도와주고 이에 대한 금전적 보상까지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인 어머니는 달간 이런 A씨의 효도에 익숙해지자 여기에서 나아갔다. 자신의 희생을 더욱 강조하고 A씨를 나쁜 딸로 만들어 부채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그림을 비틀기로 것이다. A씨의 어머니는 둘째 딸인 A씨의 동생에게만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리고 A씨에게는 고의적으로 이를 알리지 않았으며 일부러 오는 연락도 받지 않았다(물론 실제로는 아픈 것도 아니었다). 영문을 모르는 A씨는 자주 연락을 하고 찾아오던 어머니에게 갑자기 아무 소식이 없자 연달아 어머니의 상황을 묻는 메시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연이은 메시지를 엄마가 아픈데도 아랑곳않고 반찬을 해오라 재촉하는 닦달의 증거로 전시하는 기막힌 왜곡을 시전했다. 물론 이는 A 모르게 일어난 일이지만 엄마가 언니 반찬해주는 사람이야? 그만 부려먹어.’라는 동생의 말에서 이를 충분히 유추할 있다. A씨는 자신이 이런 악랄한 각본 안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황에서 만약 누군가가 A씨의 어머니에게 딸이 어머니가 아프신데도 반찬을 해오라고 닦달했다고 작은 딸에게 불평하셨느냐?’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십중팔구 어머니는 시치미를 떼고 나는 그런 적이 없는데 둘째가 제멋대로 해석했다 이번에는 둘째 딸에게로 문제의 화살을 돌릴 것이다. 이는 매우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이간질 삼각관계 전략이다.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버티고 있는  가정에서는 보통 형제자매 관계도 나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자꾸 이런 식으로 본인의 이익만을 위해 치고 빠지며 다른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싸움을 붙여놓기 때문이다.

 

 

5. 나르시시스트식 도움: 서열을 증명하기 위한 도움

 

전편의 3 항목에서 나르시시스트는 생색내기를 위해 도움을 주는 모양새만을 연기하므로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나르시시스트가 남을 돕는 모양새를 취할 때는 이것 말고도 다른 중요한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서열 잡기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남을 도울 본인이 상대방보다 여러모로 잘나고 강하고 우월하기 때문에, 반대로 상대방은 본인보다 못나고 약하고 열등하기 때문에 본인이 상대방을 돕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 한다.

 

사례 A씨는 동생으로부터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어머니에게 이제 혼자서 챙겨먹을테니 반찬은 만들지 마시라 말했다. 어머니가 본인 입으로도 A씨를 위한 반찬을 만들다가 몸이 아파졌다고 했으니, 이는 누가 봐도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A씨의 어머니는 지점에서 이상하게 화를 내며 계속 반찬을 해다주겠다고 주장한다. 왜일까? 단지 희생이 몸에 어머니라서?

 

핵심은 반찬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이런 상황을 의외로 해석하지 못하는데 사실 대화를 살펴보면 어려울 것도 없이 명백하다. A씨의 어머니는 A씨의 중에서 혼자서도 알아서 한다 부분에 화를 냈다. 어머니는 딸인 A씨가 감히 자신의 열등함을 인정하지 않아 화가 것이다. 죽어도 내가 반찬을 해다줘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은 그만큼 본인이 A씨를 위한다는 말이 아니라, A씨가 그만큼 자신의 도움 없이 없는 무능력한 존재라는 말이다. 어머니는 네가 알아서 잘하느냐, 너는 어릴 때부터 제대로 하는 하나도 없었다는 인신공격까지 감행하며 이를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자식을 진짜 위하는 부모라면, 반찬을 해다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식이 혼자서도 생활하는 것에 도리어 안도를 해야 정상이다.

 

부모가 아닌 경우에도 나르시시스트는 이처럼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다가 상대방이 사양하면 과도하게 실망하거나 심지어 A씨의 어머니처럼 분노하는 경우가 잦다. 도와주겠다는 마음에 대해 충분히 고마움을 표하면서도 폐를 끼치기 싫어 정중히 사양했을 뿐인데도 상대방에게 어딘가 부적절하다 싶을 정도로 실망하거나 불쾌해하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나르시시스트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해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의아해하면서도 그냥 넘어가기 일쑤이다. 나르시시스트가 남을 돕겠다고 자청하는 것은 도움 주는 것을 계기로 자신의 우월함을 남들에게 증명하거나, 그림을 그려 본인이 이익을 얻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가 도움을 사양하면 그런 본인의 계획이 좌절되기 때문에 나르시시스트 입장에서는 짜증이 수밖에 없다.

 

 

6. 악마와의 계약: 모호함을 파고드는 이상한 약관 해석  

 

A씨는 어머니로부터 반찬을 받게 되면서 이전보다 어머니와 자주 만나게 되었고, 어머니의 반찬에 대한 답례조로 얼마간의 현금도 드리게 되었다. A씨의 어머니가 반찬 때문에 몸이 아파졌다고 주장한 것을 계기로 이상 A씨는 어머니에게 반찬을 받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반찬 때문에 이루어졌던 잦은 만남과 반찬 사례금 역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이는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라면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러운 상황이다.

 

그러나 A씨의 어머니는 반찬 공급을 중단한 뒤에도 여전히 딸을 자주 만나고 반찬 사례금도 그대로 받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둘째 딸에게 또한번 상황을 묘하게 뒤틀어 전달했다. ‘네 언니가 이제는 반찬 해다준다고 만나주지도 않고 용돈도 깎았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겉으로만 보면 반찬을 해다 때에 비해 확실히 만남의 빈도가 낮아졌고 실제 A씨가 어머니에게 드리는 돈도 적어졌기 때문에 내부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럴싸하게 들릴 수도 있다. 또한 모양새 가지고 맥락을 왜곡해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리는 전형적 나르시시스트 전략이다.

 

사안의 본질을 잘 살펴보면 A씨가 어머니에게 예전보다 얹어드린 돈은 반찬값이 맞으며, 따라서 이젠 반찬도 해다주면서 반찬값은 그대로 받겠다는 어머니의 논리는 말이 되지 않는다. 이는 가게에서 물건을 사지도 않았는데 물건값을 내라는 요구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명백한 계약의 적용을 받는 3자간의 관계에서는 이렇게까지 뻔뻔하게 나가기가 힘들다. 그러나 문제는 부모-자식 관계가 사적 관계라는 것이다.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서 반찬 정도를 주고 받으며 계약서를 작성하는 일도 없고, 따라서 A씨가 어머니에게 드린 돈이 반찬 사례금이었는지 그냥 용돈이었는지는 각자가 우기는대로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A 입장에서는 이것이 반찬 사례금이었고 A씨는 어머니도 당연히 여기에 동의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상식적인 사람을 상대하는 상황이라면 전혀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나르시시스트를 상대하는 상황에서는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이렇게 나르시시스트는 개념상 모호한 구석이 조금이라도 보이 어떻게든 틈을 파고들어 본인에게 가장 유리한 해석을 주장한다.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 일부러 말과 상황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때문에 나르시시스트와 관계를 어느 정도 지속하다 보면, 서로 간에 발생하는 약속의 내용이나 언행의 책임 소재에 대해 변호사를 대동해 계약서라도 작성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상당수의 현대인들은 계산과 계약으로 묶인 사회적/공적 관계가 너무 차갑고 정떨어진다고 말하며 이와 대비되는 '따뜻한 가정'을 피난처로 여기지만, 나르시시스트 부모를 둔 자식들에게는 모호함으로 가득한 사적 관계야말로 모든 고통의 근원이다. 때문에 나르시시스트 부모를 둔 자식들 중 상당수는 끝없이 자신의 경계를 침해하는 가족 관계보다 명확한 법적 언어로 한계가 설정돼 있는 계약 관계에서 도리어 편안함을 느낀다.

 

-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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