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나르시시스트 부모식 베풀기 – 해석편 1 본문
원본 사례: https://dirtmentalist.tistory.com/86
위 이야기에서 나르시시스트 부모와 관련된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기억 세탁: 사과도, 설명도 없는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
이야기 속 엄마는 A씨가 어릴 때에는 식사나 건강을 제대로 챙겨주던 엄마가 아니었다가 갑자기 돌변하여 이미 성인인 A씨에게 반찬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처럼 나르시시스트는 인생을 사는 태도에 일관성이 매우 떨어진다. 부활한 예수마냥 자신이 갑자기 어느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하며, 주변인에게 자신을 새로운 사람으로 보기를 강요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물론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변화와 성장을 겪으며, 어떤 계기를 통해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다. 나르시시스트 역시 본인을 이러한 케이스로 포장한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식 변덕과 진정한 변화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르시시스트식 변덕의 경우, 자신의 과거에 대한 정직한 인정과 수용 과정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A씨의 어머니는 자신을 정말로 변화시키고 싶은 것이 아니라, 본인의 이익(단기적으로는 해외여행, 장기적으로는 딸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부양 확보)을 위해 단지 딸을 조종하려는 의도만을 가지고 있다. 이는 사기꾼이 감언이설로 사람을 속이는 과정과 같다. 본인의 명백한 과거 실책에 대해 아무런 설명과 사과 없이 태도를 180도 바꾸고 이 변화를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기억 세탁을 강요하는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다. 과거에 대해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식으로 취급하면서 본인이 원래 그랬던 사람인 양 구는 것이다.
분명 나한테 나쁜 행동을 했거나 나와의 관계에 어떠한 진실된 노력도 하지 않았던 사람인데, 갑자기 어느날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원래 친했던 것처럼’ 매끄러운 매너로 다가오는 사람은 어떤 관계에 있든지 위험한 유형이므로 멀리 해야 한다. 이때의 친절은 나를 배려하고 나에게 잘해주기 위한 친절이 아니라, 과거를 세탁하고 기억을 조작하기 위한 연기이다. 이 연기의 주요 관중은 제3자들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이처럼 진정성 없는 과시성 친절과 매너로 제3자들 앞에서 평판을 다진 후, 혹여라도 과거 문제가 다시 언급되어 충돌이 일어났을 때 이 여론의 힘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악마화한다. ‘나는 쟤한테 잘해줬는데 쟤는 나를 이유 없이 미워한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며 이를 주변인에게 관철시키는 것이다.
또한 과거의 일에 대해 시과를 하기는 하는데 자기 변명으로 가득찬 말 뿐인 사과를 하거나, 면피용으로만 사과를 하고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길 바라는 나르시시스트도 많다. 사과가 진정한 것인지를 알려면 사과 이후에 뒤따르는 장기적인 행동 변화를 통해 이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미안해’ 한 마디로 지난 수 년,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멀었던 관계가 단번에 가까워질 수는 없다. 원칙적으로 사과는 장기적으로 뒤틀렸던 세월만큼을 반대의 행동으로 증명하는 기간이 지나지 않고는 진심인지 아닌지 증명되지 않는다. 사과는 틀어진 관계를 재시작하는 계기에 불과할 뿐, 그것 자체로 관계의 완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사과했으니까 빨리 나에게 애정, 신뢰, 관심을 달라’는 요구는 소개팅을 한 지 한 시간만에 결혼하자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강요이다(아닌게아니라 애정관계에서의 나르시시스트는 실제로 만나자마자 운명의 상대라고 매달리거나 사귀자마자 결혼하자고 하는 등 급발진을 하는 경우가 많다).
면피용 사과든, 사과 없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친절이든, 원래 가까운 관계가 아닌데 급작스럽게 초고속으로 친해지자고 압박해오는 사람들은 위험한 사람들이다. 사과 후에 정말 달라진 모습으로 사는 것 자체에 집중하는지, 아니면 사과했으니까 빨리 다음 챕터로 넘어가 ‘친해진 관계’에서만 가능한 모든 것들을 하자고 요구하는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 간의 신뢰도는 장기적으로 여러 다양한 상황을 거치며 천천히 쌓여가야 하는 것이며, 여기에 지름길은 없다. 먼 관계였던 사람이 갑자기 관계에 어울리지 않는 친근한 언어를 사용하거나 부담스러운 선물을 안기는 등 속성 코스를 시도하는 것은 원칙을 지키기 싫은 이들의 뇌물 청탁과 동일한 행위이다.
2. 사회 통념 악용: ‘엄마’라는 단어에 대한 집합적 고정관념을 모두 본인에게 유리하게 이용
A씨의 엄마는 어느날부터 갑자기 ‘엄마 집밥을 못 먹어 불쌍한 우리 A’ 운운하며 A씨를 챙겨주는 엄마의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른바 ‘엄마 집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엄마의 집밥을 꾸준히 먹어와 그 맛이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만 유효한 개념이다. 이에 대한 기억이 없는 A씨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A씨의 엄마는 사회가 ‘엄마’에 대해 집합적으로 가지는 통념 뒤에 숨어 자신도 그러한 사례 중 하나인 척 자동으로 묻어가려 하고 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이처럼 자신의 사례에 전혀 해당이 되지 않는데도 사회적으로 ‘부모’라는 개념이 가지는 긍정적이거나 본인에게 유리한 이미지가 있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자신은 자식 교육에 돈을 전혀 쓰고 있지 않으면서도 TV에서 자식의 사교육비를 수백 만원씩 대는 부모를 보고는 같은 ‘부모’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괜히 감정이입을 하고 자신도 그만큼 희생했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3. 나르시시스트식 도움: 당사자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대인관계 전략 중 하나가 바로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도움/친절/배려를 강제로 떠안기는 것이다.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강권하거나, 원치 않는 선물을 일방적으로 보내거나, 필요없다는데도 돈을 부친다든가, 부탁한 적도 없는 일을 내 허락도 없이 자기 선에서 처리한다든가 하는 행위가 모두 해당된다.
문제는 이런 상황을 옆에서 보고 ‘뭘 빼앗아간 것도 아니고 주는 것도 문제냐’, ‘어쨌든 결과적으로 받아먹었으면 갚아야 할 것 아니냐’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주변인들이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나르시시스트의 목표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인식상 상대방은 빚쟁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안 받으면 될 거 아니냐’고? 스토커를 막아낼 묘안을 생각하기 힘든 것처럼, 나르시시스트의 일방적 공세를 막아낼 뾰족한 방법 역시 없는 경우가 많다. 나의 개인 정보를 알고 있는 상대방이 이미 수백 번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직장에 몰래 일방적으로 놓고 도망가는 사소한 음료/간식 등을 일일이 돌려보내는 것이 실질적으로 가능할까? 실행한다 해도 여기에 드는 어마어마한 돈, 노력, 시간의 낭비는 또 어떤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강제 떠안기기를 수십 번, 수백 번 거절하면서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러한 수신 강요가 반복되면 관계를 끊거나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는 거절 의사를 표시하는 것 자체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안 받으려는 측에서는 딱딱한 태도로 정색을 하게 되는데 이런 태도조차도 한국 사회에서는 ‘정 떨어진다’, ‘싸가지없다’, ‘사람을 쓸데없이 의심한다’ 등등으로 비난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리 외견상 베푸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상대방이 분명 거절했는데 이를 무시하고 강제로 떠안기는 것은 폭력이다. 한국에서 이를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일종의 문화지체현상이다.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지만 고속 성장으로 인해 아직도 가난하던 시절의 사고가 남아있기 때문에 강제로 ‘빼앗는 것’은 문제시해도 강제로 ‘주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초고령 노인 세대 나르시시스트 중에서는 무언가를 뻔뻔하게 강제로 빼앗는 올드 스쿨 전략만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노인 세대는 작은 것 하나도 베풀 여유가 없었던 시대에 사회화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선진국형 ‘시혜적 탈취’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선진국 체제에 어느 정도 익숙한 중년세대부터는 나름대로 주는 척을 하며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선점하려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 전략은 앞으로 점점 더 많이 사용될 것이다. 후진국에서 선진국까지 올라온 한국의 성장을 본인의 개인적 성장과 동일시하는 한국의 중년 나르시시스트들은 뭐든 베푸는 모양새만 되면 본인이 무소불위의 채권자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유독 심하다. 정승도 본인이 싫으면 그만이라는데, 하물며 자식 집에 본인도 안 쓸 온갖 잔망스러운 중고 물건이나 냉동고 속에서 굴러다니던 오래된 음식 따위를 쓰레기 버리듯 보내놓고는 나름 베푸는 모양새가 되었겠지 싶어 보답을 바라는 부모들이 많다.
사실 한국의 중년 나르시시스트처럼 특수한 시대적 요인이 없더라도, 원래 나르시시스트가 남에게 베푸는 것들은 상대에게 별 쓸모가 없을 확률이 매우 높다. 이는 나르시시즘의 원리상 불가피한 현상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거의 일부러 답을 피해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쓸모없는 것만 콕콕 집어 베푸는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심지어 객관적으로 꽤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라 해도 상대방에게는 하필 쓸모없는 것인 경우가 매우 많다(ex. 술을 전혀 못 하는 사람에게 주는 와인 선물).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 나르시시스트의 특성상 남에게 진짜 좋은 것을 주기를 꺼리기 때문이고, 두 번째, 상대방에게 진짜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하며, 세 번째, 상대방에게 무엇이 필요한지조차 당사자가 아닌 본인이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 A씨 역시 엄마의 반찬이 필요없었으며 오히려 받는 것이 처치곤란이었지만, A씨의 엄마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생색을 낼 수 있는 명분이지 실제 자식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처럼 가까운 관계에서는 위해주는 척만 하면서 실제로는 위해를 가하고, 심지어는 상대방이 불평할 명분까지 빼앗아가는 방법이 무궁무진하다. 남들이 보지 않는 일상에서는 자식을 수시로 때리고 굶기면서도 생일 때는 명품 옷을 입히고 또래 중 가장 비싼 생일 파티를 열어주는 부모, 자식이 제대로 공부할 수 있도록 조용히 해달라는 간단한 요청은 무시한 채 아침마다 자식을 위해 108배를 한다고 생색을 내는 부모, 순전히 본인의 로망을 위해 자식이 좋아하지도 않는 발레, 골프 등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레슨을 억지로 시키면서 자신의 희생을 증명하고 감사를 요구하는 부모 등이 모두 그러한 예다.
심지어 자식의 건강을 위한답시고 자식의 현재 상태나 체질에 효과가 전혀 없거나 심지어 유해한 (그러나 시중에서는 나름 좋다고 알려진) 약이나 보충제를 강제로 챙겨먹이면서 생색을 내는 부모도 있다. 이런 부모는 자식이 이를 인지하고 복용을 거부하거나 화를 내면 ‘부모가 못배웠다고 무시한다’, ‘뭐라도 먹이려는 부모의 마음만은 진심 아니냐’라며 오히려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기 일쑤이다. 자신의 강요가 실제적으로 자식에게 해가 되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이 사안 자체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식을 위하는 나의 의도만은 고결함’을 남에게 인정받는 데에만 골몰한다. 관심 없는 제3자가 보기에는 문제를 못 느끼고 지나갈 수 있지만 자식의 생명까지 갉아먹으면서도 자기 명분과 이미지만 지킬 수 있다면 전혀 개의치 않는 굉장히 위험한 부모 유형이다.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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