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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부모의 독이 되는 대화 방식 4 - 도박사의 오류

Dirt Mentalist 2022. 5. 30.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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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을 저지르고 경제적으로도 무능한 남편과 몇 년 전 이혼하고, 슬하에 성인 자녀를 둔 중년 여성 A씨는 요즘 기분이 몹시 좋지 않다. 사실 불행한 결혼생활로 얼룩진 젊은 시절에 비하면 A씨의 근래 인생은 외형적으로는 많이 나아진 편이다. 전 남편은 이제 더 이상A씨를 괴롭히지 않고, 사업이 잘 되어 경제적으로도 훨씬 안정되었고, 자녀들은 다 커서 손이 갈 일이 없다. 그러나 요즘 A씨는 젊은 시절보다도 오히려 불행하다고 느낀다. 주변에서는 자녀들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그 정도면 잘 자랐다고 칭찬하지만 A씨는 성에 차지 않는다. 지인들의 눈에 비친 A씨의 자녀들에 대한 기대는 과한 것을 넘어 비현실적이다.

A씨는 사실 자녀들이 세계적인 부호가 되거나 재벌가와 혼인하는 것을 꿈꿔왔으며 근거 없이 이 꿈이 당연히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며 살아왔다. 젊은 시절의 A씨는 그 힘으로 남편을 견디며 가정 생활을 유지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점차 그 모습에서 실제적으로 멀어지게 되자 A씨는 현실이 고통스럽기 짝이 없고 부정하고만 싶다. 막상 A씨의 자녀들은 본인들의 모습에 별 불만이 없지만, 이는 A씨의 기분을 전혀 나아지게 하지 못한다. A씨는 자녀들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 남편의 과오를 들먹이며 자녀들에게 그 보상을 요구한다.

인생이 이럴 없어.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아빠가 정도로 속썩였으면 너희는 맘에 들어야 하는 아니니?”

 

A씨는 하늘을 원망하기도 한다.

 

 

내가 정도로 나쁘게 최악의 남편을 만났으면, 적어도 자식은 최고의 자식이 나왔어야 하는 아닌가? 그렇게 힘든 세월을 살았으면 이젠 인생 풀릴 때도 됐잖아? 나보다 잘난 것도 없는 친구들도 나보다 호강하고 살았는데 나만 힘들게 살았으면 어디에선가 보상이 나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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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A씨는 일명 ‘도박사의 오류(Gambler’s Fallacy)’라고 하는 논리적 오류에 빠져있다. 이는 룰렛 게임에서 3회 연달아 빨간색이 나왔다면, 그 다음에는 검은색이 나올 가능성을 매우 높게 판단하는 식의 사고를 말한다. 이는 수학적으로 명백히 틀린 판단이다. 물론 4회 연달아 빨간색을 경험할 가능성은 0.5x0.5x0.5x0.5=0.625이므로 상당히 낮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연달아’ 빨간색을 경험할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개별 이벤트의 확률과는 무관하다. 여전히 개별 이벤트에서 검은색/빨간색이 나올 가능성은 각각 50%씩이다. 이전의 통계치는 다음의 이벤트 자체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따라서 과거 통계치를 바탕으로 미래 이벤트를 예측할 수 없다.

내가 특정 사건이나 선택으로 인해 재수없게 고생을 많이 하게 되었으니 다음에는 그만큼의 행운이 찾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남편이 나를 고생시켰으니 자식들은 나를 호강시켜줄 것이라는 식의 기대는 전혀 상관도 없는 2개의 개별 사안을 본인만의 내러티브로 묶어 마치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고방식이다. 룰렛은 직전에 빨간색이 나왔든 검은색이 나왔든 상관 없이 돌아가며 ‘직전에 빨간색이 나왔으니 이번엔 검은색이 나오도록 하겠다’는 식의 의도를 가지고 작동하지 않는다. 세상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힘든 시기를 보낼 때 고생 끝에 낙이 오는 해피엔딩을 원한다. 그러나 이 해피엔딩은 내가 고생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보상을 위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해피엔딩은 실제 팔을 걷어부치고 문제를 해결한 경우에 한해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어쩌다 노력과 상관없이 좋은 결과가 찾아온다고 해도 이는 철저한 랜덤이기 때문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특히나 내가 통제권이 없는 영역(ex. 타인의 인생, 타인의 마음)에서는 말 그대로 내가 통제권이 없기 때문에 노력이라는 것도 불가능하며, 따라서 자기중심적인 내러티브에 맞춰 특정 결과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

위의 이야기 속 A씨는 중년이 되어 남편과 헤어졌으며 사업을 열심히 해서 일정한 성취를 이루었다. 본인이 직접 한 행동에 대해서는 모두 결과를 성취한 것이다. 그러나 자식이 어떤 모습으로 자라야 한다는 것은 A씨의 통제를 벗어난 일이다. 이에 대한 기대는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보상심리의 표출이다. 어쩌다 자식들의 실제 모습이 A씨의 기대와 일치한다 해도 이는 상당 수준의 우연이 개입한 결과이다. A씨가 직접 개입하고 통제할 수 없는 일들까지도 완벽하게 A씨의 마음에 들게 돌아갈 리도 없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우주의 중심이 A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랜덤에 지나친 기대를 거는 마음가짐은 도박사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며, 랜덤까지도 내 마음에 드는 방향으로만 발생해야 한다는 집착은 본인을 과대평가하는 나르시시스트 독재자의 욕망이다. 겉으로는 암만 현재의 고생을 묵묵히 참아가며 착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남몰래 마음 속으로 랜덤 행운을 통한 업그레이드를 바라고 있다면 사실상 도박사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한국인들 중에는 현재의 고통을 적극적 문제 해결이 아니라 인생 전반에 대한 추상적인 기대에 의지해 이겨내려는 유형이 많다. 옆에서 봤을 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비효율적인 고생의 길을 자처해 가며 묘한 도덕적 자부심을 과시하는 유형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사람들은 강한 내현적 나르시시즘 성향을 가진다. 로또 당첨의 확률이 극히 낮은 것처럼, 이런 사람의 기대가 충족되는 확률도 극히 낮다. 이들은 주변에서 미련할 정도로 착하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지만, 사실은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 잘못된 베팅을 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강자들 앞에서는 비굴함의 극한을 보여주지만 자신보다 약자라고 판단되는 사람 앞에서는 180도 돌변하는 위험한 인간 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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