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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식의 이해관계는 일치하지 않는다 본문
한국의 부모-자식 관계가 워낙 안전 거리나 경계선 없이 밀착되어 있어 개인의 정체성에 파괴적인 영향을 줄 정도인 이유는 한국인들이 사실이 아닌 두 가지 명제를 의심 없이 사실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모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부모와 자식의 이해관계는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명제 중 한국인들의 머리에 더 뿌리깊이 박혀 있는 것은 후자이다. 놀랍게도 첫 번째 명제를 불신하는 사람들마저도 두 번째 명제는 철썩같이 믿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모두가 알고 있는 부모-자식 관계에서 어떤 자식이든 잘 되면 부모에게는 자랑거리가 생기며, 연을 끊은 상태가 아니라면 자식이 성공했을 때 떡고물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애정 없고 나쁜 부모라도 자식이 잘못되는 것보다는 잘 되는 것을 원하고, 결국 이해관계가 동일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도와주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은 아무리 가까워도 명백히 개별 존재이므로 이해관계 역시 같지 않다. 부모가 암에 걸렸다고 해서 자식까지 자동으로 암에 걸리지는 않으며, 부모가 통증을 느낀다고 해서 자식이 그 통증을 동시에 느끼지도 않는다. 개별 생명체는 명백히 개별적으로 작동하며 모든 감각, 생명, 생각이 독립적으로 움직인다. 자동으로 연동된 것이 아닌 모든 개별 개체의 이해관계는 별개이다. 어쩌다 우연히 공유하는 부분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게 전부이다.
부모와 자식의 이해관계가 대체적으로 동일한 방향을 향하는 경우는 애정이 있을 경우에 한한다. 애정이 있어야 상대방의 생존과 행복을 바라게 되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같아지는 것이지, 애정도 없는 개별 생명체의 이익이 나의 이익과 일치할 이유가 없다. 생각해보자. 당신은 전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사업에서 대박을 터뜨리면 자기 일처럼 기쁜가? 그럴 리가 없다. 부모-자식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부모와 자식의 이해관계 역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애정이 없는 가족 관계는 애정이 없는 제3자와의 관계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애정이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위장해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고, 또한 같은 공간에 살거나 접촉이 잦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같은 자원을 놓고 자주 부딪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식의 성공이 주변에 큰 자랑거리가 될지라도 자식에게 애정이 없는 부모의 이해관계는 자식의 이해관계와 결코 일치하지 않으며, 결국 이런 부모는 어느 시점에든 자식에게 해가 되는 선택을 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부모를 가까이 하고 믿는 것은 자식에게 위험이 된다. 다음은 애정이 없는 부모-자식 관계의 이해관계가 필연적으로 어긋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정리한 것이다.
1. 부모와 자식은 생물학적으로 세대가 다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보통 20년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난다. 이는 자식과 부모가 살아갈 시대가 다르고, 현재 시점에서의 생애 주기가 다르며, 또한 부모와 자식의 인생에서 남은 시간이 다르다는 뜻이다. 시대의 차이, 생애 주기의 차이, 남은 시간의 차이는 일상생활과 인생 계획에서 모두 큰 차이를 가져온다. 작게는 집안의 냉난방 최적 온도에서부터 크게는 재산 처분이나 투자, 진로 문제와 같은 것들에 이르기까지, 소속된 세대의 차이에 따라 가장 이익을 보는 선택이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인생에서 남은 시간이 다르다는 것은 미래를 위한 결정을 할 때 결정적인 의견 차이를 불러온다. 사람들은 흔히 나이가 어릴수록 뭘 몰라서 충동적이고 근시안적인 선택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젊은이들의 시행착오 과정에 대한 결과론적인 해석에 가깝다. 다른 모든 자질을 제외하고 나이라는 요소 하나만을 고려했을 때는 오히려 나이가 많을수록 근시안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자기 인생에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미래를 내다보거나 대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이 강한 늙은이라면 특히 더 위험하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죽은 뒤의 세상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으며, 오히려 할 수만 있다면 본인의 죽음과 함께 세상 모두를 순장시켜버리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어 절대로 장기적 관점에서 건설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식에게 애정이 없는 부모가 자식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결정을 내리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런 부모는 십중팔구 자신이 사회에서 물러나거나 세상을 떠난 뒤에도 수십 년을 더 살아가야 할 자식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다. 자기보다는 훨씬 젊고 늦게 죽을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식의 건강 상태 등에 대해서도 걱정하거나 배려하지 않는다. 자식에게 애정이 없는 부모는 자식의 미래까지도 본인의 생애주기 및 본인에게 남은 여생의 기간에 최적화된 형태로 설계하려 들며, 이 설계는 세대가 다른 자식의 입장에서는 최적의 선택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2. 부모와 자식은 가치관, 취향, 신체적 상태 등 많은 것이 다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부모와 자식은 다른 사람이며 다른 인격체이다. 당연히 신체 조건부터 정신까지 많은 것이 다르다. 어쩌다 비슷한 것이 있을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이 같을 수는 없다. 가치관, 취향, 건강 상태, 약점과 강점 등에서 차이를 가지면 이해관계에도 당연히 차이가 생긴다.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공유하는 것도 많기 때문에 차이가 곧바로 직접적인 이해관계 충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같이 사는 집에서 오늘 저녁 무슨 메뉴를 먹을 것인가, 거실 벽지를 무슨 색깔로 할 것인가와 같이 단 한 가지 결정만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취향의 차이는 한쪽의 양보 없이는 해결되지 않는다. 애정이 있는 관계라면 다소간의 타협은 불가피해도 큰 문제는 없이 지나가겠지만, 애정이 없는 관계에서 이런 취향 차이는 아무리 사소해도 잊혀지지 않는 손익계산서로 각인된다.
따라서 애정이 없는 부모에게 자식의 모든 ‘다름’은 곧 이해관계 상충이 된다. 내가 나만의 쾌락을 추구하고 나만의 의사대로 모든 결정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방해물이 되는 것이다. 어쩌다 상황에 밀려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타협이나 양보를 했다 해도 자신이 포기한 이익에 대한 생각은 사라지지 않아 고스란히 보상심리로 연결된다.
3. 부모와 자식은 소속된 준거 집단과 대인관계망이 다르다
부모와 자식은 다른 세대의 다른 존재로 다른 인생을 살아왔으므로 소속된 준거 집단이 다르고 주변인과의 관계도 다르다. 이 말은 부모와 자식이 받는 사회적 압력이 다르다는 뜻이다. 엄마가 중년의 몸짱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인스타그램 스타인데 딸은 지적 성취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명문대 박사과정생이라면 둘이 평상시에 접하는 친구나 지인의 성향에는 큰 차이가 있으며, 사회적으로 평가받는 기준도 상이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자존감과 자의식을 구성하는 요소도 달라진다. 심한 경우에는 기준이 아예 정반대일 수도 있다.
앞에서 한국인들은 좋은 부모이든 나쁜 부모이든 모든 부모와 자식의 이해관계가 자동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착각한다고 말했다. 좋은 부모라면 자식 본인을 위해 성공을 바라고, 나쁜 부모라면 떡고물을 위해 자식의 성공을 바란다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어찌됐든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같지 않느냐는 논리 흐름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이, 소속된 준거 집단이 다르면 성공의 기준 자체가 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자식은 나름 자랑스러운 커리어를 쌓고 있는데, 부모는 자기 준거 집단의 기준에 의거해 자식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부모와 자식이 세상에서 받는 압력과 평가가 다른 방향을 향할 때, 자식은 부모의 사회적 자랑거리가 되기 힘들다. 이 때 부모가 부모의 권위로 자식에게 본인이 소속된 집단의 규칙을 강요한다면 자식의 자아 정체성이나 사회 생활에는 지장이 생긴다. 부모 본인 입장에서는 아무리 오매불망 잘 보이고 싶은 지인들이나 사회적 집단이라 해도, 자식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일 수 있다. 자기 일만 해도 바쁜 와중에 이런 사람들의 기준까지 충족시키려 노력하는 것은 백해무익한 짓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부모의 이해관계는 절대 자식의 이해관계와 일치할 수 없다.
4. 부모가 자식의 실패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원한다
부모가 반드시 자식의 성공을 통해서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부모들은 성공한 자식보다는 실패한 자식을 가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떡고물에 더 관심이 많다. 이런 부모들은 자식의 성공을 원하지 않으며 따라서 일부러 자식의 날개를 꺾고 진로를 방해하기도 한다. 온갖 이유로 유학이나 외국에서의 취업 등을 못 하게 막는다거나, 걱정을 빙자해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하게 만든다거나, 결혼 또는 독립을 막는 시도 등등이 대표적인 예다. 주요 목적은 심리적 권력감 획득 및/또는 노후에 직접 수발을 들어줄 인력 확보이다. 물론 겉으로는 절대로 자신이 고의적으로 자식의 성공을 방해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속으로 자식의 실패를 바라는 부모들도 말로는 자식에게 성공하라고 닦달할 수 있다.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빌미 삼아 끊임없이 자식을 깎아내리는 것을 주요 통제 수단으로 삼는 경우이다. 즉, 정말로 성공하지 못했다고 비난한다기보다는 자식의 자신감을 꺾고 본인에게 종속적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으로서 비난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부모는 실패했다고 낙인찍은 자식이 현 상태에서 벗어나 뭐라도 해보겠다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일 경우에 오히려 더 큰 혐오감을 드러내며 이를 어떻게든 방해하려 든다. 자식 입장에서는 이래도 비난하고 저래도 비난하는 부모의 태도가 황당할 수밖에 없다.
또한 부모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자녀가 있을 경우, 자식의 진로를 방해하던 부모도 밖에 나가 제3자들에게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식 자랑을 하고 다닐 수도 있다. 이런 겉모습만 보고 부모가 자식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런 부모는 어쩌지 못한 현실에서 최대한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을 활용하고 있는 것 뿐이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부모는 밖에서는 볼썽사나울 정도로 자식 자랑을 해도, 집안에서는 성공한 자식을 불편하게 여겨 깎아내리거나 죄인/불효자 취급을 해 자식의 기를 죽이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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