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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멘탈리스트/한국인의 행복과 불행

노력과 노오력의 차이

Dirt Mentalist 2022. 4. 6.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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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기에 한국은 노력의 효용을 (지나치게) 신봉하는 나라로 보인다. 오죽하면 노력이 노오력 되었을까. 시골 할머니들이 아이를 낳고도 바로 밖에 나가 밭일을 했다거나, 자수성가한 중년의 사업가가 평생 2시간 이상 없이 일만 했다는 식의 믿거나말거나 고생 배틀부터, ‘우리 부모/조부모 세대는 노력을 많이 해서 재산을 금방 불렸는데 요즘 젊은애들은 게을러서 취업도 못한다 한국 고속성장 모델에 대한 맹신에 이르기까지, 나라가 노력을 마법의 주문이자 무한의 자원으로 여기는 같다.

 

그런데 이상한 부분이 있다. 흙멘탈 증상 - '될성 부른 나무'에 대한 환상 포스트에서 이야기한 주제이지만 한국에는 될성 부른 나무 될놈될 신화 또한 강력하다. 놈은 타고났기 때문에 해도 되고, 역시 타고났기 때문에 해도 된다는 식의 운명론이 노력에 대한 믿음과 공존하는 것이 가능한가? 논리적으로 이건 명백한 모순이다.

 

사실 한국인들은 노력의 효용을 믿지 않는다.

적어도 노력과 자기 성장의 상관관계는 믿지 않는다.

대다수의 한국인이 사람의 성패 여부와 수준은 타고나며, 타고난 재능과 기질이 가장 중요하지 환경이고 교육이고 노력이고 별로 영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될성 부른 나무와 될놈될 타령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관절 한국인들이 믿는 노오력 실체는 무엇일까?

 

한국인들이 믿는 것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자기 성장을 위해 설정하고 추진하는 노력의 가치와 효용이 아니라, 강요된 고통/손해/고생/희생을 견딤으로써 증명한 순응성에 주어지는 타인의 인정이다. 때문에 한국에서 보통 노오력하라 주문은 사실상 말을 듣는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주변의 다른 사람, 특히 윗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로는 너를 위한 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부모, 교사, 상사 등의 쉬운 통제가 목적인 것이다.

 

농촌 며느리가 아이를 낳고 몸조리도 하지 못한 바로 밖에 나가 밭일을 하면 이게 본인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신입 직원이 괴로운 회식 자리에 억지로 끌려가 시간에 하려던 영어 공부를 못하고 상사의 시중이나 들게 된다면 그건 본인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사회는 이러한 것을 버티라고 주문하며 노오력 운운하지만 이는 사실 노력이 아니라 타인이 의도적으로 유발하는 고통일 뿐이다. 이러한 행위 자체는 당사자의 성장이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유해하며, 오로지 이를 유발하는 자만이 이익을 뿐이다.  

 

이런 비생산적인 고통을 노력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한국 사회에서 노력이 노오력 되어버린 것은 당연하다. 엄청나게 힘들고 피곤한 여정을 거쳤는데 막상 남는 없는 것이다. 수직적 서열 관계를 이용한 사적 이익 착취에 골몰한 이들이 일방적으로 유발하는 고통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인 행위를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한 필수 과정으로 둔갑시킨다. 이렇다 보니 사회적 인정을 이익과 아무 생각 없이 동일시하는 이들은 본인이 자해를 하는지도 모르고 자해를 한다.

 

한국처럼 권위적이고 수직적이며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문화권에서는 현실적으로 사회적 인정과 개인적 이익이 상충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윗사람의 밖에 나는 것이 두려워 몸을 축내고 시간을 낭비해 쓸데 없는 일에 인생을 소비시키면 그것이 정말 이익인가? 윗사람의 인정이 잃어버린 건강이나 시간을 보상해줄 있는가? 나와 우리, 나와 집단 경계선을 인지하지 못하는 많은 한국인들은 사실상 연달아 자해적 선택을 하면서도 본인은 죽어도 나는 현명하게 살고 있다 믿는 경우가 흔하다. 많은 경우에 사회적 인센티브가 개인의 성장과 안전 반하게끔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개인의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마이너리티에 가까울수록 더욱 그렇다). 이런 왜곡된 인센티브 시스템으로 인해, 자기 성장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행동을 하면서 본인은 나름 노력하며 살고 있다는 착각이 발생한다. 한국 사회의 많은 집단이 이런 식으로 자기 성장과 전혀 무관한 고통을 유발하고, 이를 묵묵히 수용하고 견디는 것을 노오력으로 상찬한다.

 

이런 한국형 노오력-보상모델은 애초에 설계가 나의 성장과 무관하고 주도권이 내가 아니라 남에게 있기 때문에 보상 모델이 굉장히 불안정하며, 보상이 주어져도 기대보다 박할 수밖에 없다. 머리에 총구가 겨눠진 상태에서 자루에 돈을 담아 강도에게 건넨 은행원에게 강도가 수고했다 돈을 나눠주는 경우는 없는 것처럼, 사회적 압력으로 인해 행한 일들의 대부분은 나에게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애초에 설계가 나한테 이익이 되게끔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은행원이 강도에게 얻을 있는 보상이란 기껏해야 강도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뿐이다. 애초부터 강도가 없었다면 보상일 수도 없는 당연한 것이 대단한 보상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와 달리 중간에 낭비되는 없이 정직한 보상을 주는 노력은 자기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자기 성장형 노력이다. 약골이었던 사람이 하루에 1시간씩 꾸준히 유산소 운동을 마라톤을 있게 되는 식의 자기 주도/자기 성장형 노력은 타인 반응형 노오력 모델과는 판이하게 다르며, 노력의 가치는 이런 모델에서 강조되어야 한다.

 

그러나 될성 부른 나무 될놈될판타지에 빠져 있는 한국인들은 오히려 이런 자기 주도/자기 성장형 노력을 우습게 여긴다. 뿐만 아니라 이런 노력은 심지어 소속 집단에서 사회적 불이익과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흔하다. 현재의 자신보다 성장하기 위해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주변인들이 이기적이다, 그게 같냐, 주제를 모른다, 현실적이지 못하다, 미련하게 사서 고생한다며 비난과 비웃음을 날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반대로 일찌감치 자기 주도적/자기 성장형 노력을 포기하고 비굴한 인생을 그저 견디기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열심히 산다 칭찬하기 일쑤다. 거꾸로 되어도 한참 거꾸로 되어 있는 셈이다.  

 

노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주로 강조하는 노오력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될성 부른 나무 될놈될 외치는 이들은 개인의 노력이 당사자를 발전시킬 있다고 믿지 않는다. 개인이 발전을 통해 지정된 자리를 이탈하여 다른 자리로 가버리거나 자기만의 자리를 만들어내길 바라지 않는다. 누군가의 예상치 못한 발전은 본인들의 세계관에 위협이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노력을 이야기할 , 그것은 개인의 성장 추구가 아니라 남이 부여한 위치와 역할 속에서 영원히 쳇바퀴만 굴리는 순응을 뜻한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타인 반응형 노오력 모델 오염되지 않으려면 주어진 조건에서 수동적으로 무작정 버둥거리며 막연히 누군가 노력을 알아줄 구원의 날을 기다릴 아니라, 자기가 직접 설정한 자신만의 성장 목표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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