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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멘탈리스트/한국인의 행복과 불행

흙멘탈 증상 - 나만 잘하면 되겠지

Dirt Mentalist 2022. 3. 24.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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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가 먼치킨 비정규직 노마드 캐릭터로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옛 드라마 <직장의 신>에는 언제나 자기 페이스로만 움직이는 김혜수의 캐릭터와 반대로 세상이 두렵기만 한 사회 초년생 캐릭터로 정유미가 출연한다. 언제나 주변 압력에 쉽게 굴복해 타인이 원하는대로 움직이려 하는 정유미에게 김혜수가 "너는 왜 네가 잘못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자책을 하지?"라고 묻자 정유미는 대답한다.

 

"무서워서요. 제가 잘못한 게 아니고 회사가 잘못한 거라면 너무 무섭잖아요. 전 제가 잘못한 게 제일 편해요."

 

피상적으로만 보면 건전해 보이지만, 고지식한 한국형 모범생들의 인생을 자칫 지옥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사고방식이 있는데 바로 '나만 잘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이다. 내가 열심히, 착하게, 겸손하게 노력하며 살고 남의 비위를 잘 맞춰주면 인생에서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얼핏 합당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인간 사회는 다양한 군상이 모여 사는 곳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나 하나만의 힘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물을 가열해 섭씨 100도까지 이르게 하면 물이 끓는 것에는 예외가 없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사회적 성취를 거두거나 타인의 인정을 받겠다는 계획은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가치 기준이 사람마다 주관적으로 다양하기도 하거니와, 타인의 마음과 의사결정은 어디까지나 100% 타인의 자유 영역이기 때문이다. 

 

노력의 성과를 믿는 모든 종류의 믿음이 문제라는 얘기는 아니다. '매일 운동하면 좀 더 건강해지겠지.', '매일 공부를 하면 지적 발전이 있겠지.'와 같은 믿음에는 문제가 없다. 이런 내적 발전에는 타인이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하게 돼 있다', '외모가 예쁘면 사랑받는다', '진심을 다하면 알아줄 것이다'와 같이 타인의 영향력이 필히 끼어들 수밖에 없는 일에서의 기대는 자기최면형 희망사항이지 예외 없이 적용되는 진리의 명제가 아니다. 막말로 당신이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 해도 세상 사람들이 작당해 당신을 무시하기로 결정한다면 당신이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완벽하게 살면 당연히 인정해주겠지, 왜 안해주겠어?'라는 생각은 위 드라마의 정유미 캐릭터가 가진 것과 같은 수동적 사고방식이 발동시키는 방어심리에 불과하다.

 

세상 사람들은 당신이 잘 하는 부분을 골라내 칭찬해주는 심사위원이 아니며, 그저 각자 인생을 살기 바쁜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그들에게는 당신이 뭔가를 잘한다고 인정해주고 칭찬해줘야 할 의무가 없다. 물론 인간은 함께 문명을 이루는 존재로서 어느 정도의 협력적 태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개인적 이익 없이도 타인의 뛰어남을 칭송하고 칭찬하기도 한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인정이 자신의 생존에 직접 기여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런 태도는 어느 정도의 사적 동기 없이는 발동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또한 아예 정반대로 경쟁자적 태도가 앞서는 경우도 있으며, 이런 경우에는 타인에 대한 인정이 도리어 자신의 생존에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잘못이 없는 대상도 얼마든지 부당하게 공격하고 깎아내릴 수 있다.

 

일 잘하면 승진하겠지, 잘보이려 애쓰면 예쁨받겠지, 원하는 걸 주면 조용해지겠지 하는 식의 수동적 기대는 배신당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빌드업을 해놓아도 결국 상대방 마음의 결정권은 상대방에게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내가 바라는대로 마음을 먹어주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법적 의무에 해당될 정도로 명백한 사안이 아니라면 내가 원하는 인정을 주지 않았다는 이런 종류의 '부당함(?)'에 맞서 싸울 방법도 딱히 없다. 사회 생활은 절대적 공식이 없는 확률 게임에 가까우며 나를 구원해줄 적중률 100%의 공식을 찾는 태도는 위험하다. 만병통치약을 파는 모든 이들은 사기꾼이듯, 절대적인 공식을 맹신할수록 착취적인 이들에게 이용당할 가능성도 수직상승한다.

 

나르시시스트/소시오패스들은 두려움에 마비되어 스스로의 힘을 알아서 포기하는 이런 나이브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을 매우 좋아한다. 사랑해주고 인정해준다는 말이 아니라 착취하기 위한 대상으로 매우 좋아한다는 뜻이다. '나만 잘하면 되겠지'를 믿는 이들은 나쁜 결과가 곧 자신이 잘못했다는 말과 동의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결과를 좋게 만들기 위해, 적어도 그렇게 보이기 위해 애를 쓰게 된다. 자기 잘못이 아닌 일에 대해서도 자기가 어떻게든 책임지도 결과를 좋게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나만 잘하면 된다'라고 믿고 있으니 거꾸로 잘못된 일은 어찌됐건 내가 잘하지 못해서라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착취를 해도 스스로가 착취당하는 현실을 부정한다. 착취자의 악행을 알아서 감춰주고 홀로 쓰레기를 치우면서도 늘 웃는 얼굴로 남들 앞에서 모든 상황이 괜찮은 척 해주니 나르시시스트/소시오패스 입장에서 이보다 더 편리한 호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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