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부모가 자식을 통해 얻는 이익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부모의 계산속 본문
한국에서는 부모-자식 관계를 부모가 자식에게 일방적으로 헌신하는 관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로 대단한 애정과 헌신을 보여주는 모습을 근거로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는 자식을 낳고 길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이미 부모가 일방적인 희생을 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가깝다. 밥 굶기지 않고 학교 꼬박꼬박 보내줬으면 다른 것이야 어찌 됐든 부모로서 할 일은 다 한 것이며, 그것만으로도 자식으로서는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은혜를 입은 것이라고 과대포장하는 경우도 흔하다.
사람마다 천양지차로 다른 부모-자식 관계를 이렇게만 설명하는 이유는 자식이 부모로 인해 얻는 이익은 큰 데 반해 부모가 자식으로 인해 얻는 이익은 없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 인식은 자식이 어린 시절 부모가 제공한 기본 의식주 비용에 대한 계산에 기인한다. 부모는 자식에게 최소 18년간 끼니와 입을 것, 잘 곳을 제공하는데 자식이 부모에게 제공하는 것은 없으니 부모가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헌신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때문에 자식이 나중에 세속적으로 크게 성공해 부모의 경제적 지위를 높여주지 않는 한, 자식은 부모의 은혜를 갚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며 원죄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요약하자면,
자식은 부모의 존재 자체만으로 무조건 이익을 보았지만, 자식은 부모에게 존재 자체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오히려 손해만 끼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냥 집단 세뇌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굳이 자식이 나중에 성공해 부모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더라도, 부모가 자식의 존재 자체만으로 얻는 이익은 매우 많다. 심지어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귀찮게 여기는 부모라 할지라도 한국 사회에서는 자식의 존재를 통해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한 이익의 대표적인 유형은 다음과 같다.
1. 부모 자신이 정상적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충족
지금이야 비혼과 비출산이 새 트렌드가 되었다지만 지금 이미 부모가 되어 있는 세대 중 대부분은 결혼과 출산이 당연시되던 시대를 살았다. 이들이 결혼과 출산을 결정한 것은 어디까지나 결혼과 출산이 당연한 통과의례라고 주장하는 사회, 주변인, 가족, 친척, 친구들의 의견에 따라 본인이 ‘동류’로 인정받기 위한 본인의 인생 계획이었을 뿐이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의 입장을 먼저 고려한 것이 아니다.
지금의 중년 이상 세대는 생물학적으로 일정 나이가 되면 경제적 조건이 안 되고, 개인 자질도 안 따라주더라도 그러한 질적 요소에 대한 고려 없이 마치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진 물건 마냥 자동으로 대충 결혼을 하고 결혼 즉시 피임도 없이 애부터 둘 이상 생기는 대로 낳고 보는 것을 당연시했다. 이것이 정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했기에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도, 망설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것저것 따져서 결혼/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사람을 ‘비정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화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취미 생활 수준도 낮은 특징으로 인해 한국은 출신 성분 또는 라이프스타일이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화를 하기가 상당히 힘든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런 와중에 소수에 속하는 비혼/비출산인들은 또래들로부터 소외받는 처지에 놓인다. 이 자체만으로도 사회 생활의 난이도가 높아지는데, 여기에 더해 한국의 중년 이상 세대에서는 단지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을 거라는 갖가지 상상은 물론, 경계의 대상이나 안줏거리로 보고 비인간적으로 대상화시키는 경우도 많다. ‘넌 가정 없으니까 돈도 필요없지 않느냐’며 재산권을 우습게 여기거나, 나이/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지 않으려는 적대적 성향도 심심찮게 드러낸다.
중년 이상 세대에서 비혼/비출산인들이 겪는 이러한 불편과 불이익은, 결혼해서 자녀를 가짐으로써 ‘부모’ 타이틀을 획득한 이들에게는 반사 이익으로 돌아온다. 제아무리 사회에서 바닥을 기는 처지라 해도, 기혼자이자 ‘부모’의 타이틀을 다는 순간 사회적으로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이 생기는 것이다.
자식 앞에서 입 씻고 말을 안할 뿐이지, 단지 자식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나도 또래 대화에 낄 수 있어서’, ‘부모님한테 손주 안겨드리는 것만으로 효자 대접받아서’, ‘사회적으로 검증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어디 가서 모지리 의심받지 않고 신체적으로 번듯한 사람으로 확인받은 거라서’ 뿌듯하다고 말하는 부모들은 매우 많다.
대부분의 기성세대 부모는 이 외에도 자식의 존재 자체만으로 많은 사회적 이득을 얻는다. 하다 못해 인상이 험악한 사람도 독신자인 경우보다는 자식을 키우는 기혼자인 경우가 사람들에게 나쁜 첫인상을 만회하기에 훨씬 쉽다. 남성의 경우는 자식을 가진 기혼자가 직장생활에서도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일명 어금니 아빠와 같은 범죄자도 '가장'의 탈을 쓰지 않았다면 그러한 범죄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한국의 중년 이상 세대에게 가정과 자식의 존재란 제2의 신분증과도 같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본인이 이러한 1등시민 신분증을 받기 위해 결혼과 출산을 선택했을 뿐이다.
결혼/출산은 오히려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과 욕망을 채워주고 더욱 부추기는 길에 가깝지, 순수 희생과는 거리가 멀다. 철학적 고행과 개인 정체성의 철저한 희생을 필요로 하는 종교 수련 등에서 왜 결혼/출산을 금지하는지를 보면 이는 자명하게 드러난다. 무슨 대단한 성인군자같은 희생 정신으로 결혼과 출산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기존에도, 현재에도 없다고 보면 된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출산은 대의를 위한 희생이 아니라 반대로 개인적 욕망의 충족을 위한 결정에 가깝다.
물론 자식을 낳고 키우는 과정에는 상당한 시간, 돈, 노동력이 투입되며, 이 과정에서 미성년 자식은 당연히 시간, 돈, 노동력에 대한 주고받기가 되지 않는다. 부모가 일방적 희생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부모가 자식을 낳고 키우게 되는 동기 및 맥락은 보지 않고 바로 이 과정에서 자식이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부모에게 빚을 지는 원죄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식 출산과 양육에 물리적으로 자원이 투입된다는 사실은 부모 본인이 택한 사회 적응 전략의 당연한 대가일 뿐이며, 부모 본인도 이 사실을 모르고 이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모든 시민권자는 세금을 내야 하고 모든 자산에는 유지비용이 들듯이, 1등 시민권 역할을 하는 가정과 자식을 보유하기 위해서도 최소한의 유지 비용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자식에게 드는 최소한의 노력과 비용은 당연한 거래 조건의 일부이지 갑자기 부당하게 주어진 추가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성년 자식을 먹이고 입히는 비용이 감당하기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부모는 능력에 안 맞는 차를 뽑아 차 할부금 대기가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카푸어와 다를 바가 없다. 희생을 해서 힘든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내세우고 싶은 본인 이미지를 감당할 능력이 안 되는 것 뿐이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는 정상성은 누리고 싶은데 자식 키우는 수고는 들이고 싶지 않다면 이것은 자신이 택한 전략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는 일종의 도둑 심보이고, ‘알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기 때문에’ 후회되는 것이라면 본인이 이 계약을 선택하기 전에 어디에선가 계산을 잘못한 것이다. 사회의 세뇌에 속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를 희생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렵다.
만약 자신의 부모가 자식들 때문에 많은 것을 희생했다고 말하는 부모라면 부모의 인생에서 결혼/출산을 선택하지 않았을 경우, 또는 나를 낳았지만 고아원에 맡긴 경우를 가정해보고 정말 나만 없었으면 부모의 인생이 훨씬 행복해지거나 계급 상승이 가능했을 것인지를 따져보는 게 좋다. 절대 다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정상적 사회 집단에 끼지 못하는 요인만 하나 더 추가되어 인생이 더 힘들어졌을지도 모른다.
2. 생물학적인 번식 욕망 충족
현대 사회 인간에게는 대부분 의식의 수면 위로 잘 드러나지 않는 욕망이지만 생물학적으로 유전자를 남기려는 번식 본능은 동물 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당연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젊은 사람들은 잘 느끼지 못하는 두려움일 수도 있지만 인간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유한한 인생에 대해 존재론적 위기를 느낀다. 자식을 낳고 싶어하고 손자녀를 보고 싶어하는 것, 노인들이 젊은이와 아이들을 좋아하고 그들 옆에 있으려 하는 것의 기저에는 모두 이러한 존재론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본인이 개체로서 영원히 살 수는 없지만 젊은 생명체를 보고 있으면, 특히나 그 젊은 생명체가 자신의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면 죽음에 대해 잊을 수 있고 자신이 소멸한다는 느낌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 자체를 피할 수는 없어도 죽음에 대한 해석과 관점이 달라지는 것이다.
자신이 세상에 무언가를 남겼으며 세상이 자신을 기억해줄 것이기 때문에 죽어도 소멸하지 않는다는 믿음은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크게 덜어준다. 이러한 존재론적 위기 극복을 위한 ‘자취 남기기’가 반드시 생물학적 자손을 통해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이를테면 예술가는 작품을, 과학자는 연구 성과를 남김으로써 이러한 존재론적 위기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며, 상당한 수준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생물학적인 자손을 남기는 것이 자신의 존재론적 위기를 잊게 해 주는 가장 쉽고도 확실한 방법이 된다.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어렵지만 그저 생물학적으로 내 자손을 남기는 것에는 별 노력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쾌한 이야기가 되겠으나 이런 이유 때문에 ‘사회적 성취나 지위가 없는 사람들이 애를 낳는 것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은 현상적으로 엄연한 사실이다.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자취를 남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생물학적인 후손을 많이 남기는 것에 실제로 더 집착하게 되며, 이는 왜 후진국일수록, 가난한 계급일수록, 학력이 낮을수록 출산율이 높은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홀로코스트 이후로 우생학으로 묶여 금기 사항이 되어버린 사안이지만, 100년 전만 해도 이 문제는 세계 유수의 생물학자들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우려하던 문제였다. 이디오크라시가 현실화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능력이 없고 환경이 열악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아이의 입장, 또는 제3자의 입장일 뿐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능력이 없고 환경이 열악할수록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이익이다. 열악한 유전자와 열악한 환경은 낮은 생존 가능성을 뜻하며 낮은 생존 가능성은 높은 출산율로 보완해야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계산은 의식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사람의 잠재의식을 통해 감정선에 영향을 끼친다.
실제 자손들이 느끼는 행복도와 무관하게 그저 집안이 자신의 성을 딴 후손으로 '북적북적'거리면 부자가 된 듯 뿌듯함을 느낀다는 노인들은 바로 이런 생물학적 욕망에 의해 감정이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의 입장과 무관하게 자식의 존재만으로 자신의 본능을 충족시켜 분명한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다.
3. 세상에서 가장 좋은 변명과 핑곗거리 – 자식
몇 년 전 인터넷에서 보았던 성범죄 재판 피의자들의 정보 공유 카페의 캐치프레이즈에는 ‘당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다. 성범죄자로 의심받는 이들이 자신들의 무죄방면을 받아야 할 이유를 ‘가정을 위해’라고 포장한 것이다. 사실상 한 개인만이 관련된 일을 그가 ‘가장’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족 전체의 이해관계와 묶어 실제보다 더 중차대한 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한국에서 자식을 방패막이 삼는 부모들의 가장 흔한 모습 중 하나이다. 막말로 한 사람이 특정 가정의 ‘가장’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공격하는 것은 자동으로 그의 아내도 공격하는 것이고, 그의 아이들의 생존권도 위협하는 아동학대도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무적의 논리 확장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확장 논리에 따르면 비혼/비출산인은 그냥 1인의 권리만을 가지지만 4인 가족의 가장은 4인분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셈이 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더 대접해줘야 하고, 더 조심히 다뤄줘야 하고, 잘못을 해도 더 많이 봐줘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물론 이는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개념은 아니지만(그러나 어이없게도 법정에서도 탄원서 정상참작 등을 이유로 먹히는 경우가 있다), 사적으로는 아직도 잘 통용되는 정서이다.
대부분의 기성세대는 이렇게 가정과 자식을 무기 삼아 자신들이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잘 알고 있다. 위의 사례처럼 법정에서의 유죄 판결을 피해가거나 형량을 줄이려는 무거운 사례 뿐 아니라 자잘하고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자식을 무기 삼아 취할 수 있는 이득은 많다. 부모들이 자식 핑계를 대고 귀찮은 일에서 빠지거나, 약속을 어기거나, 실수를 변명하는 일 등은 비일비재하다. 실제로 자식 양육 과정에서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도 물론 많지만,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만만찮게 많다.
자기 의사 표현을 잘 하지 못하는 소극적인 부모들은 별 것 아닌 일에도 자식을 동원해 자기 표현을 대신하기도 한다. 어떤 가족 동반 모임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메뉴를 정하면서 횟집이 언급되면 사실은 본인이 회를 싫어하면서도 괜히 “우리 애가 회를 싫어해서요.”라고 말하는 식이다. 본인의 의사 표현이 불러올지도 모르는 모종의 잠재적 책임감/부담감을 원천적으로 회피하기 위해 자식을 프록시로 이용하는 것이다.
또한 자식은 본질적으로 자식과 무관한 부모 본인의 단점이나 실패에 대한 훌륭한 변명거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본인이 경제적으로 무능한 것을 ‘자식 키우느라 돈을 다 써버려서 그렇다’고 변명하거나, 본인이 건강 관리를 하지 않으면서 ‘자식 키우느라 힘들어서 건강을 해쳤다’고 변명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한 집안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헤쳐 진실을 밝히려는 게 아닌 이상, 부모의 이러한 변명 앞에 시시비비를 따지는 사람들은 없다. 이러한 변명은 대개 효과가 매우 좋으며, 결과적으로 부모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자연스럽게 자식에게 넘어간다.
다른 포스트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한국에서는 부모가 되고 나면 본인의 무능력으로 인한 인생의 고단함조차 ‘위대한 희생’으로 포장된다. 싱글이라면 혼자 오롯이 사회의 냉대와 무시를 감수해야 할 상황에서도 부모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으면 내러티브가 업그레이드되는 것이다. 이런 내러티브 업그레이드가 그 자체로 물질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개념적으로나마 자신의 책임을 대신 떠안고 자신의 노고를 인정해줄 마땅한 의무부양자가 생긴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엄청난 이점을 안겨준다.
실제로 많은 부모들은 자식의 존재를 통해 무능감에서 해방되며, 자기 효용감의 가장 강력한 원천을 얻는다. 자식이 생기고 나면 적어도 가정이라는 작은 집단에서는 모종의 권위자가 되며, 이 신분 승격은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이 심리가 긍정적으로 발휘될 경우에는 부모가 본인의 인생에서 추진력을 얻을 수도 있지만, 부정적인 방향으로 향하면 부모는 자식을 본인 자존감 유지의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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