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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멘탈리스트/한국인의 행복과 불행

흙멘탈 증상 - '될성 부른 나무'에 대한 환상

Dirt Mentalist 2022. 3. 26.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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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의 원탑 먼치킨 유명인이라 할 만한 김연아 선수가 한창 현역이던 시절에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김연아도 대단하지만 그 엄마도 정말 대단합니다. 주변에 전례도 없고 인프라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뚝심있게 서포트를 할 수 있나요. 솔직히 나한테 하라고 했으면 못했을 거예요. 아마 좀 힘들어지거나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오면 애한테 그냥 그만두고 평범하게 살라고 했을 듯합니다."

 

김연아 선수의 어머니가 김연아에게 제대로 된 훈련을 받게 해주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이를 본인만의 방법과 의지로 극복했다는 것은 이미 데뷔 초부터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비전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 밑에는 의외로 부정의 댓글이 잔뜩 달렸다.

 

"무슨 소리예요? 애가 김연아 정도 되면 주변에서 가만 안 냅둬요."

"맞아요. 그 정도면 다른 사람들이 미리미리 다 알아주게 돼 있어요."

"연아 재능이면 주변 상황이 알아서 척척 돌아가지 않나요?"

"될성 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엄마 아니라 누구라도 알아보고 스폰해줄거예요."

 

자식이 잘 되면 부모에게 많은 공을 돌리는 한국에서 어쩌다 이런 댓글들이 달렸을까? 김연아 어머니의 공로를 부정하려 하는 것일까? 자식이 의대만 가도 부모가 엄청난 공을 들인 것이라고 덮어놓고 추정하는 한국인들이 대체 왜?

 

아마도 원글이 "자식이 성공했다는 건 그만큼 부모도 훌륭하다는 거죠. 김연아 엄마 대단하십니다." 라고 대충 썼다면 모두 동조하는 댓글만을 달았을 것이다. 문제는 원글이 추상적인 인사치레 대신 김연아 어머니가 현실적으로 부딪쳤을 법한 난관을 구체적으로 너무 설득력있게 언급하는 바람에 본의아니게(?) 부모의 '노력'을 강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김연아 같은 자식 뒤에 김연아 엄마같은 부모의 노력이 필요했다는 주장이 되어버려, '자식이 타고난 재능으로 알아서 척척 성공'하길 원하는 국평오 부모들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다.

 

잘난 자식은 어릴 때부터 재능을 뚜렷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그게 천 리 밖에서도 보일 것이라 믿고, 그 빛나는 모습에 너도나도 달려와 알아서 투자를 해 줄 것이므로 부모인 나는 일말의 노력도, 리스크도 없이 즐기기만 하면 될 거라 생각하는 부모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이들이다. 한국에는 이런 식의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운명론에 빠져 있는 부모가 많다. 이런 식의 운명론 타령은 환경과 노력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전형적인 후진국 증상 중 하나이다. 타고난 계급대로만 살아가고 교육과 훈련을 통해 인력 계발을 하지 않는 전근대 사회 질서에 익숙하다 보니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말은 부모로서 본인이 노력하기 싫다는 말과 다름없으며, 한국의 부모들이 그토록 자식에게 '노오력'하라고 요구하는 것과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사람에게는 타고난 성향과 재능이라는 것이 분명 있지만, 원시시대가 아닌 AI 시대에 마땅한 투자와 교육 과정 없이 세계를 제패할 만큼의 대단한 실력은 탄생할 수 없다. 타고난 재능도 후천적인 계발 없이는 무의미하다. 너무 뛰어나서 투자도 교육도 다 필요없이 세계 석학을 다 씹어먹는 수준의 재능은 할리우드 영화에나 나오는 거라고 보면 된다.

 

될성 부른 나무가 '떡잎'부터 다르다는 믿음은 안 그래도 심한 한국 부모의 조급증을 한층 더 악화시킨다. 본인의 편리함을 위해 자식이 어릴 때부터 이미 다 결론을 내려놓고 싶어하는 부모는 자식이 어릴 때 흔히 보일 수 있는 여러가지 모습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갖가지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다. 특히 자식 양육에서도 본전과 가성비 생각이 늘 절실한 나르시시스트 부모들은 자식에게 안정적인 애정과 환경을 제공하는 대신, 끊임없이 자식이 어떤 '떡잎'인지를 테스트하고 그에 맞는 최소한의 비용만을 사용하기 위해 늘 계산기를 돌린다. 

 

때문에 자식이 뭘 조금만 잘하면 민망하리만치 남들에게 심하게 자랑을 하며 환상에 빠져들다가도, 반대로 조금만 자신의 기대를 배반하면 즉시 자식을 비하하고 극단적인 비관론을 시전한다. 모든 게 저절로, 쉽게, 빠르게 이루어지길 바라며, 기대와 달리 노력, 시간, 비용 등이 투입되어야 할 것처럼 보이면 자식을 비난하거나 외면한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지금 당장 눈 앞에 놓인 떡을 집어먹듯 거저 먹기가 되지 않으면 부모로서의 책임을 방기하면서 그 탓은 자식에게 돌려버린다. '떡잎부터 틀려먹었다'는 것이다.

 

한때 한국에서는 유독 '사자는 새끼들을 절벽에서 굴려 떨어뜨린 다음 여기에서 살아남는 우수한 새끼들만 골라 키운다'는 말도 안 되는 동물 괴담이 퍼져 있었다. 이 괴담은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입맛에 딱 맞는 이야기이며, 실제 많은 나르시시스트 부모(특히 나이든 세대일수록)가 자식들에게 이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즐겨 한다. 본인은 '백수의 왕 사자'로 모에화하고 자식은 잘난 부모를 닮지 못한 불량 종자로 낙인 찍는 것이다. 한마디로 '될성 부른 나무의 떡잎' 타령은 부모 본인의 자화자찬을 위한 빌드업이다. 일이 잘 되었을 때의 혜택만 누리고, 잘못되었을 때의 책임에서는 쏙 빠지고 싶은 것이다. 

 

'될성 부른 나무'의 신화는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같은 신동의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강화되곤 한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부모의 아무런 개입 없이 자연스럽게 알아서 음악 신동이 되었을 거라는 상상은 오류이다. 5살 때 교향곡을 작곡하는 등 신기한 재능으로 어릴 때부터 전 유럽에 소문이 자자했던 모차르트는 본인도 꽤나 성공적인 작곡가였던 아버지로부터 처음부터 돈벌이 서커스를 목적으로 한 혹독한 조기교육을 받았다. 즉, 그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다 하는' 종류의 신동이 아니라 아버지의 철저한 기획상품이었으며, 이 상품으로서의 인생이 아동학대에 가까웠기 때문에 모차르트는 성인이 된 이후 아버지와 거의 연을 끊다시피 했다. 또한 그의 신동으로서의 면모와 성인이 된 이후 천재 작곡가로서의 면모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연관성이 없다. 그가 5살 때 작곡했던 교향곡은 그저 어른 흉내에 불과했으며, 겉으로 그런 흉내를 빨리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성인기에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창의성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두 가지는 생각보다 메커니즘이 많이 다른 별개의 재능이며, 이 때문에 실제 신동이 천재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오히려 드문 사례에 속한다.

 

신동의 존재를 선망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동시대의 다른 이야기도 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아들을 팔아 큰 돈을 벌게 되자 그로부터 15년여 후, 한 독일의 주정뱅이 무명 뮤지션이 자기도 이를 흉내내고 싶어 큰아들을 쥐잡듯 패며 조기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그는 그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도 매우 심한 폭력을 휘두르며 아들을 학대했고 모든 수입은 술값으로 지출되어 자식들은 굶기 일쑤였다. 그러나 주정뱅이의 아들은 모차르트와 달리 조기교육에도 불과하고 똑같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아들은 공연에서 실수를 연발하는 바람에 관객들에게 '네가 아마데우스인 줄 아느냐!'라는 치욕적인 비웃음을 듣곤 했고, 그런 날이면 아버지에게 더 심한 매질을 당해야 했다. 그는 그런 신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성년이 되자 소년은 아버지에게 소송을 걸어 동생들에 대한 양육권을 박탈하고 본인이 평생 동생들을 책임졌으며, 아버지를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이 소년의 이름은 루드비히 판 베토벤이다.

 

사실 환경과 교육의 역할도 중요한 이유이지만, 국평오들이 '될성 부른 나무의 떡잎'을 운운하며 호들갑을 떨면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떡잎이 있어도 태반이 못 알아본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럴 안목이 없다. 꼬리 없는 여우의 동네에서 꼬리 있는 여우가 비정상이 되었듯, 백조 새끼가 미운 오리 새끼로 오해를 받았듯, 오히려 영리한 사람이 바보 동네에서 저평가를 당하는 경우는 흔하다. 아마데우스 신화에 눈이 먼 사람들이 베토벤을 알아보지 못하고 비웃었듯, 내가 나이 좀 먹었다고 누군가의 '떡잎'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는 자만은 그저 착각이다. 선진국일수록, 성공적인 기업일수록 '타고난 인재'보다 '길러지는 인재'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들의 PC 성향 때문이 아니라, 특정 아젠다로 오염된 속좁은 개인이 성급하게 딱 자기 그릇대로 평가질하는 떡잎 찾기 퀘스트가 별로 효율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터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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