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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 집안의 역학 구도 4 – 가족이 주적이다

Dirt Mentalist 2021. 10. 13.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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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화제가 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게임을 설계한 최종 빌런 오일남은 주인공 기훈에게 돈이 아주 많은 사람과 돈이 너무 없는 사람의 공통점은 사는 게 재미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일남이 사는 재미를 본인의 가치관대로 정의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기는 해야겠지만, 현상적으로 이는 상당히 맞는 말이다.

 

정반대의 경제적 수준이 비슷한 결과를 낳는 상황은 생각보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단지 문학적 아이러니로 치부할 수 없을 만큼, 경제적 최상류층과 최하류층은 중간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며 여기에는 명백한 물리적 메커니즘이 있다. 극단적 상황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편벽함으로 인해 중간층에는 잘 보이지 않는 공통된 특징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 중 하나로 개인의 역량, 즉 개인이 보유한 지적 능력이나 전문적 기술 등이 삶의 질 향상으로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실제 미국의 한 연구에서는 교육 수준과 수입 간 양의 상관관계가 주로 중간층에서만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부유층과 빈곤층으로 갈수록 떨어진다는 것이 밝혀진 바 있다. 교육 사다리를 통해 경제적 윤택함을 얻는다는 공식은 중간층에서는 잘 맞지만 양극단의 계급에서는 적용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시대 변화로 인한 남녀 간 수입 격차 감소 추세 역시 중간층에서만 주로 나타나고 부유층과 빈곤층으로 갈수록 약해진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한마디로 최상류층과 최하류층의 양극단으로 갈수록 중간층이 상식으로 믿고 있는 현대 사회의 추세가 반영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많이 배우고 노력할수록 실제 삶이 달라지는 중간층에 비해 양극단의 계급에서는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의 결실이 투명하게 반영되지 않고 타고난 정체성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든 전근대성이 강하게 잔류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최상류층과 최하류층은 타고난 계급이 본인의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절대적이라는 점과  모두 그들만의 리그속에서 사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폐쇄성과 특권의식을 가진다. 외부 사회와 단절된 채 독특한 그들만의 규칙으로 운영되는 사이비 집단과 같이, 타고난 소속 집단의 강력한 아비투스가 구성원들을 현대 사회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본인이 세상의 꼭대기에서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든, 아니면 밑바닥에서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하든 사회 일반의 규칙이 본인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비슷하다. 전자는 본인을 승리자이자 리더로 여기고, 후자는 본인을 패배자이자 피해자로 여긴다는 점은 다르지만 그로 인해 스스로를 뭔가 특별한존재처럼 여기기 쉽다는 조건만큼은 유사하다.

 

또한 법이 너무 멀어 활용할 수 없는 최하류층 집단과 법을 너무나도 잘 활용해 법을 무력화할 수 있는 최상류층 집단은 결과적으로 모두 치외법권의 환경이 되기 쉽다. 철저한 법 적용을 받기 때문에 모범 시민이 되어야 하고, 타고난 환경 자체가 특별성을 부여하지 않으니 외부 사회로부터 인정받아야 전진이 가능하다고 느끼는 중간층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최상류층과 최하류층에서는 바깥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든 본인이 속한 치외법권의 리그 내에서 그 집단의 특수한 룰에 따라 이기고 인정받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러한 연유로 최상류층과 최하류층의 가족 내에서는 가족 간 상호 의지를 통해 혜택을 보는 중간층 가족과는 정반대의 역학 구도가 형성되는데, 바로 가족 간 협력보다 경쟁 또는 대결이 우선시된다는 것이다. 최상류층과 최하류층은 주요 생존 경쟁의 장에서 가족 구성원이 주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지식과 기술을 통해 필수적으로 외부 사회의 인정을 받고 현대 사회의 흐름에 발을 맞추어야 하는 중간층의 가족 집단은 주요 경쟁 관계가 외부에 형성되기 때문에 가족끼리 협력하는 것이 유리하지만, 외부 사회에서 얻을 것이 별로 없다고 느끼는 최상류층과 최하류층 구성원에게는 가족 간 협력이 개인의 생존에 딱히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최상류층은 바깥 사회보다 가정 내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이 월등하게 크기 때문에 바깥 사람들과의 경쟁보다 가족 내에서의 경쟁이 곧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결정짓는 한판승이 되기 쉽다. 재벌가의 상속 경쟁 등이 대표적인 예다. 반대로 가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너무 없는 최하류층 가정에서도 구성원들의 관계는 적대적이 되기 쉬운데, 지나치게 한정된 자원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야 하는 데다 사회에서 각자도생해야 하므로 절박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최상류층과 최하류층에서 이렇게 서로 부딪치는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흔히 생각하는 정상적인 가족 단위의 모습을 유지하려면 가족 구성원 간의 진정한 애정을 바탕으로 지속적 소통과 협력을 하든가, 아니면 강제적으로라도 절대적 서열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 현실 인간 사회에서 전자가 전설의 파랑새같은 상황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사실이며, 대개는 후자의 양상을 띠게 된다. 최상류층과 최하류층으로 갈수록 가정 내 분위기가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이유이다. 제각각 다른 이해관계가 투명하게 드러나면 한데 모일 수 없는 구성원들을 억지로 모아놓으려면, 결국 수직적 위계질서를 통해 아랫사람의 이해관계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

 

따라서 흙수저 집안에서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요구되는 도리나 도덕이 무언가 계속해서 나의 이해관계와 부딪친다면, 이는 수직적 질서를 통해 나의 이해관계를 희생시키고 상위 서열의 이해관계에 종속시키려는 시도임을 인식해야 한다. 흙수저 집안에서 이러한 질서에 종속된다는 것은 스스로의 생존 포기를 의미한다. 가족 내에 그나마 잉여 자원이 넘쳐나는 최상류층이라면 나의 종속이 나의 완전한 도태를 의미하지는 않겠지만, 가족 내에 자원이 부족한 흙수저 집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전자의 결과가 기껏 기업 계승권을 포기하는 수준이라면, 후자의 결과는 교육의 기회와 재산권의 박탈 같이 한 인간의 정체성 자체를 손상시키는 치명타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저절로 한 배를 타지는 않는다. 가족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모두가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의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졌다고 전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겉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실제로는 가족 구성원 간 이해관계가 서로 적대적으로 짜여진 흙수저 집안에서는 구성원 개인이 자신의 인생을 위해 노력하는 많은 일들이 그 자체로 다른 구성원의 심기와 이익을 거스르게 된다. 가정 내 자원이 언제나 부족하고 책임감 있는 부모가 부재한 흙수저 집안에서는 누군가가 자신의 인생을 위해 스스로의 돈, 시간, 노력, 감정을 투자하는 행위마저도 이기적 행위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 모든 자원을 가족에게 줄 수도 있는데 주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난이 사회 통념과 도덕의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가족을 위해 네가 양보하고 희생하라는 요구 앞에서 큰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와 계획을 철회하는 흙수저들은 지금 시대에도 매우 많다. 집안 사정을 위해 상위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푼돈을 벌기를 택하고, 의존적인 부모를 위해 유학이나 먼 곳의 취업을 포기하고 원래 지역에 눌러앉고, 자신의 취미나 휴식에는 아무런 시간 배정을 하지 못한 채 가족을 위한 노력 봉사에 모든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 한국 사회가 어릴 때부터 구성원에게 주입하는 유교적 도덕의 세뇌는 어쨌든 가족을 위해 착한 선택을 하는 것이니 나중에 설마 이것 때문에 내가 잘못될 리는 없겠지, 복을 받아도 받겠지 싶은 막연한 기복신앙적 낙관으로 사람의 판단력을 흐린다(관련 내용은 흙멘탈 증상 - 인과응보, 사필귀정, 권선징악에 대한 집착포스트 참조). 그러나 나를 위해 준비된 도덕적 인과응보의 순간은 없으며, 내가 한 선택의 물리적인 결과만이 남는 것이 실제 세상의 인과관계이다. 가족의 이해관계와 일치하지 않는 본인의 이해관계를 스스로 존중하지 못하고 가족에의 종속을 택하는 것은 갈등을 피하기 위해 본인의 생존을 포기하겠다는 선택이며, 이는 대개의 흙수저들에게 통한의 순간으로 남는다.

 

흙수저일수록 지금 본인이 하고 있는 일, 가고 있는 길이 정말 본인이 결정한 것인지, 남의 큰 그림을 그려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자식에게 요구가 많은 흙부모일수록 본인의 생존을 위해 자식에게 자신의 욕망을 대신 심어주려 한다. 이들은 자식이 본인의 생존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에만 관심을 가질 뿐, 자식의 생존에는 관심이 없다.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 너의 욕망이 무엇인지 구분되지 않고 경계가 무너진 관계에서 흙수저들은 무엇이 자기 생존에 유리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흙수저들은 스스로의 욕망과 생존을 명확히 정의내리고 그에 기여하는 삶을 살도록 방향타를 교정해야 한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하루하루 노력하고 발버둥칠수록 계속해서 죽어가는 인생을 살게 된다. 입금되는 즉시 전액이 출금되어버리는 깡통 계좌처럼 본인의 노력이 계속해서 남의 인생 밑천으로만 소비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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