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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Q -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갑자기 잘해주는데 개과천선한 걸까요? 본문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갑자기 잘해주는데 개과천선한 걸까요?
결론:
아니요.
구체적으로:
부모든 누구든 나르시시스트/소시오패스 유형에게 오랫동안 무시를 받아온 사람들에게는 남들은 다 아는 본인의 가치를 본인만 모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본인의 가치를 모르기 떄문에 남이 자기 잇속을 차리기 위해 감언이설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합니다. 나 따위 존재에게 얻어낼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저 상대가 베푸는 친절과 관대함에 황송해하고 갚아야 할 큰 빚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는 결국 또 다른 나르시시스트/소시오패스 성향의 착취자를 꼬이게 만듭니다. 한 번 학대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비슷한 관계에 계속 빠지게 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일수록, 세상을 있는 그대로 잘 보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친절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특히 본인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나치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나, 원래는 아니었는데 급작스럽게 태세를 전환해 친절함을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는 강하게 경계합니다. 그런 종류의 친절은 나에게 무언가를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나에게서 뭔가를 얻어가려는 목적이라는 것을 알기 떄문입니다.
원래는 좋은 부모가 아니었는데 갑자기 태세 전환을 해서 친절하게 다가온다면 넙죽 받아들이고 감격해할 게 아니라 갑자기 부모가 왜 그러는지 의도를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틀림없이 부모와 자식 간 권력 관계가 예전과는 반대로 뒤집어진 경우입니다. 예전에는 부모가 권력 우위에 있었다면 이제는 자식이 권력 우위에 서게 된 것입니다. 오랫동안 무시당해온 자식은 그것을 못 느낄 수도 있지만 본인이 어떻게 느끼는지와 무관하게 이제 부모는 자식과의 관계에서 본인이 더 약자가 되었다고 느끼거나, 자식이 가진 것이 많아져 빼앗길 수 있는 것보다 빼앗을 수 있는 것이 더 많다고 판단한 겁니다. 급작스럽게 태세를 전환한 부모의 ‘친절한 태도’에는 사과, 선물 공세, 환자/약자 코스프레, 착한 척, 불쌍한 척 등도 모두 포함됩니다. 모두 권력 우위를 이용해 자식에게 함부로 하던 본인의 이미지를 세탁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자식이 어릴 때 부모가 절대 우위에 있던 권력 구도는 여러 계기를 통해 뒤집어질 수 있습니다. 자식의 세속적 성공을 하게 되어 부모가 떡고물을 기대하는 상황일 수도 있고, 부모의 본질을 알아챈 자식이 거리두기나 연 끊기를 시도하자 부모 쪽에서 아쉬워진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대개의 부모-자식 관계에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권력의 중심추가 자연스럽게 자식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가장 큰 원인은 부모의 노화입니다. 자식이 사회의 중추 인력이 되어가고 부모는 사회에서 밀려나 노인이 되어가는 연령대가 되면 지적 능력, 신체적 능력 등 여러 면에서 자식이 부모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았던 노인이라면 비교적 늦게까지 젊은이들보다 우위를 유지하며 베풀어줄 지식/경험/물질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순식간에 자식보다 모든 면에서 뒤떨어지게 될 수 있습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보다 못난 사람은 철저히 밟고 무시하지만 자신보다 잘난 사람에게는 잘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이 양가적 태도는 자식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릴 때는 가진 것 없는 쥐방울 만한 꼬마였으니 잘 보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고,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이니 잘 보이고 싶어지는 겁니다.
비단 이런 능력적인 부분이 아니더라도, 나이가 들면 여생과 잠재력의 감소가 점점 더 치명적으로 다가옵니다. 특히 본인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 나르시시스트에게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다 퇴장해야 하는 인생의 말년은 그 자체로 공포이자 지옥입니다. 나르시시스트는 이제 곧 세상에서 사라질 본인의 존재론적 위기를 잊고 자신의 이미지를 보강해줄 젊은 에너지를 절실하게 원합니다. 이를 위해 사회적 후계자를 양성해 본인의 세력을 만드는 이들도 있고, 젊고 예쁜 트로피 와이프를 얻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러한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존재는 자식/손자 같은 본인의 생물학적 후손들입니다. 사회적 후계자 양성과 트로피 와이프에 비해 훨씬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생물학적 부모/조부모가 되는 데에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식에게도 기억이란 게 있으니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과거 세탁이 쉽기만 할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어떻게든 빚을 한 방에 갚아버리겠다는 태도로 오버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식을 상대로 생전 안 하던 삼류 치정극 수준의 느끼한 사랑 고백을 퍼붓는다든가, 입버릇처럼 이게 걱정된다 저게 걱정된다 하며 파라노이드 수준의 걱정을 늘어놓는다든가, 필요없다는데 강제로 반찬, 선물, 용돈 따위를 떠안기려 한다든가 하는 것 등이 모두 단기적인 부채 탕감을 위해 애용되는 방식입니다. 아무리 세뇌당한 자식이라도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이런 조급증에는 대개 본능적으로 역겨움을 느낍니다. 막상 배고플 때는 도와주지 않던 사람이 뒤늦게 나타나서는 이미 배부른 상태라고 거절하는데도 강제로 입을 벌리고 음식을 쑤셔넣으려는 행동을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차갑던 옛날이나 갑자기 친절을 받으라고 강요하는 지금이나 자식에게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모욕감만 안겨준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아니, 어차피 세월 지나면 자식은 성인이 되고 본인은 늙어갈 걸 모르고 그런다는 건가요?”
노화에 따라 갑자기 태세 전환을 하는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이런 황당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식이 천년만년 쥐방울만한 꼬마일 리가 없고, 본인도 천년만년 젊을 게 아닌데 설마 한 치 앞을 못 내다보고 그렇게 근시안적으로 행동했겠느냐 하는 의문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그런 근시안적 행동을 한 게 맞습니다. 나르시시스트의 행동과 생각을 괜히 복잡하게 생각하고 건강한 문명인의 수준에서 해석해주려고 하면 오히려 일이 꼬입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의로 기억의 왜곡과 선택적 기억 상실증을 유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를 평생 속이며 정신승리를 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과거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치매 환자처럼 정말 잊는다기보다는 불리한 부분은 떠오르는 즉시 어떻게든 정당화하거나 부정하는 기제가 발동하기 때문에 과거를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자꾸 맥락과 의미를 왜곡합니다. 그리고 그 왜곡된 버전을 믿기 때문에 본인의 일관성 없음에 대한 부끄러움도 별로 느끼지 않습니다. 본인이 개구리 올챙이 적 기억 못하고 손바닥 뒤집듯 태세를 전환한 것처럼, 남들도 자기가 잘해주면 그 즉시 과거를 잊고 같이 잘 지낼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결국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갑작스러운 친절은 개과천선의 증거가 아니라, 새롭게 자식에게 뭔가 바라는 바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보통 나르시시스트와의 연인 관계를 설명할 때 많이 사용되는 ‘Love Bombing(사랑 폭탄 세례) – Devaluation(후려치고 깎아내리기) – Discard(폐기)’의 순환 모델은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 모델은 상대가 신선한 사냥감으로 보일 때는 지나치게 이상화시키고 급하게 친해지려 온갖 도를 넘는 사탕발림을 하다가, 상대가 넘어와 잡은 고기가 되고 나면 요구 사항과 트집을 끝도 없이 늘려나가며 착취하고, 단물이 다 빠지거나 질리면 결국 상대를 쓰레기 취급하며 잔인하게 밟고 버리는 나르시시스트의 대인관계 공식입니다. 이 초반의 사탕발림이 너무 강렬하고 환상적이라 나르시시스트의 애정이 적어도 초반엔 진심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잊지 못하고 계속 그 진심을 되살리려고 합니다(나르시시스트의 ‘진심’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긴 하나요?’ 포스트 참조). 막상 달콤한 말 빼고는 배려받은 것이 1도 없고 빼앗긴 것만 있다는 것을 수십 년이 지나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막말로 나르시시스트의 대인관계란 환상적인 사탕발림으로 꼬드겨 낸 후 ‘먹버’하는 과정입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갑자기 친해지려 할 때는 바로 이 'Love Bombing' 단계를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르시시스트의 이 ‘먹버’ 모델은 상황이 허락하는 한 1회성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계속 반복됩니다. 즉, ‘신선한 사냥감’은 꼭 새로 만난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존에 이미 버린 카드도 본인이나 상대의 사정이 변해 나르시시스트 쪽에서 아쉬워지면 얼마든지 다시 신선한 사냥감으로 재활용됩니다. 본인이 늙어가기 시작하자 어릴 때 구박하던 자식의 관심이 갑자기 아쉬워져 태도가 급변한 부모, 잡은 고기라고 함부로 대하다가 상대가 떠날 기미를 보이자 느닷없이 잘해주는 연인, 아내를 구타하고 나서 다음날 꽃다발을 사다 바치는 폭력 남편이 모두 그런 사례입니다. 잘해드릴수록 나를 함부로 대하다가 거리를 좀 두면 갑자기 조심스러워하고, 그래서 좀 나아졌다 싶어 다시 잘해드리면 또 함부로 하는 부모의 무한 궤도로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는 나르시시스트 대인관계 모델이 무한 재활용 사이클을 도는 전형적인 양상입니다.
한국인들은 ‘먹버’ 대상이 되는 걸 참 무서워합니다. 1회성으로 이용당하고 버림받았다는 것 자체를 자신의 매력도와 능력에 낙제점을 받은 것으로 여깁니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다’고 보이는 것 자체가 본인을 실제 쓰레기로 만든다고 착각합니다.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인식하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성향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부분이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에서 큰 문제가 됩니다. 본인이 ‘먹버’ 대상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나도 남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나르시시스트가 꽃다발을 사들고 돌아오면 기쁘게 맞아주는 사람이 많습니다. 역시 나는 버림받은 게 아니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똑같은 사이클을 반복합니다. 뒤늦게 급 친절해진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개과천선했다는 믿음도 똑같습니다. 나도 실은 사랑받는 자식이었다, 내 부모도 마음으로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믿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그런 희망사항을 버리고 투명한 눈으로 보면 부모의 태도가 매우 어색하고 역겹다는 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르시시스트는 연기의 천재가 아닙니다. 사실은 앞뒤가 대놓고 안 맞는 경우가 훨씬 더 많지만 보통 착취 대상자가 나르시시스트에게 정서적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믿고 싶어서 믿는 것에 불과합니다. 제3자가 보면 어이가 없는 거짓말과 허풍에도 그냥 넘어가는 바보스러운 장면일 뿐입니다.
사람을 상대로 누군가를 ‘먹버’했다고 생각하는 개념 자체, 나아가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자체가 모두 나르시시즘의 발현입니다. 거짓말을 비롯한 온갖 사기술을 동원해 처음부터 본인이 상대에게 권력 우위에 서서 모욕감을 줄 만한 상황을 기획해 놓고 본인이 대단한 존재라 그런 일이 ‘자연스럽게’ 벌어진 척 하는 것은 나르시시스트가 본인을 실제보다 대단한 사람으로 포장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노력을 통해 인정을 받는 게 아니고 ‘내가 일급 유명 배우도 먹고 버린 사람이야!’와 같은 (증명도 안 되는) 허풍 한 마디로 자신의 급을 올리려는 게 나르시시스트의 삶의 자세입니다. 뒤늦게 가까이 다가오는 부모 또한 번듯한 사회인 자식을 자신의 발 아래에 두고 착취하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위치를 최소 자식 이상으로 보장받으려는 겁니다. 초반에는 아무리 친절한 척 미안한 척을 해도 좀 친해졌다 싶으면 자식에게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요구를 관철시켜 자신의 발 아래에 있다는 굴욕적 증명을 원하게 됩니다. 결국 어릴 때의 구박이 다시 시작되고,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이제 성인으로 레벨 업한 자식의 정체성까지 성공적으로 ‘먹버’해 더욱 부풀려진 자의식을 가지고 한층 더 오만해집니다.
나르시시스트에게 1회성 먹버를 ‘당한’ 것처럼 보이는 이들, 또는 나르시시스트에게 모종의 '심판'을 당한 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사실은 반대로 나르시시스트가 착취하는 데 실패한 이들입니다. 짦은 기간 동안 상대가 나르시시스트의 실체를 알아채 관계를 끊어버렸을 수도 있고, 쉽게 속일 수 있을 줄 알고 접근했는데 생각보다 만만찮은 상대방이 버거워 나르시시스트 쪽에서 먼저 줄행랑을 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놓고 주변에는 자신이 무슨 심사위원이라도 되는 마냥 상대방이 형편없어서 버렸다 또는 상대방이 부도덕한 존재라 나와 어울릴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다니는 게 나르시시스트의 전형적인 화법입니다. 본인이 실체를 간파당하고 착취에 실패한 것이 수치스럽고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상대방의 잘못으로 돌리는 겁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 역시 자식 쪽에서 먼저 연을 끊었을 경우, 자신은 위대한 부모인데 자식이 막돼먹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처럼 코스프레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연을 끊겠다는 자식의 의지가 정말 확고해 되돌릴 수 없다는 확신이 들면,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마땅한 벌을 주어 도덕/윤리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자식의 모든 것을 망치려 들 수도 있습니다. 나르시시스트는 기생충의 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빨아먹을 수 있는 호구를 절대 자발적으로 놓지 않습니다. 관계가 유지되지 않고 1회성이나 단기성으로 끝났다는 것, 그로 인해 나르시시스트에게 비난이나 비하를 당한다는 것은 본인이 정말 가치가 없거나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나르시시스트가 무슨 이유로든 본인을 착취하는 데 실패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과정은 모두 나르시시스트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통과의례이며, 이 때는 상대 나르시시스트를 본인 인생의 적으로 상정하고 분명한 사리판단을 해야 합니다. 생물학적 계보나 사회가 부여한 관계의 이름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상대는 이미 내 살과 피를 뜯어먹으려는 본능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뱀파이어나 좀비같은 존재입니다. 부모, 선생, 선배, 친구, 배우자, 친척 등의 관계명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는 아예 시작도 안 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어쩌다 관계가 생겨버렸다면 차라리 1회성 먹버 대상이 되는 게 장기적 관계를 맺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내가 먹버당할 만큼 가치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어떻게든 인정을 받고 싶어진다면 이미 끝없는 착취 사이클에 중독된 것이고, 거기에서 벗어날 때까지 본인의 인생은 없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 뒤늦게라도 부모와의 관계를 다시 시작해 못 받았던 애정을 받아 무언가를 채워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시간을 흘러갔고 부모가 필요하던 시기도 지났으며, 이미 만들어진 역사는 한낱 보상심리로 되돌이킬 수 없습니다. 애정이 고픈 것이든, 손해 본 게 억울해서든 이제라도 어떻게 보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부모와 연을 다시 시작했다가 오히려 더 뜯기게 됩니다. 내 인생에 부모의 애정은 없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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