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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 구별법(feat. 최근의 많은 오해)

Dirt Mentalist 2025. 4. 7.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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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심리학 개념이 그렇듯, '나르시시스트' 혹은 '나르시시즘'은 약 1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대중에게는 생소한 용어였다. 하지만 요즘은 SNS나 일상 대화에서도 이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아마도 ‘가스라이팅’과 더불어 사용량이 폭증한 심리 용어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나르시시스트라는 개념이 널리 퍼지면, 사람들이 진짜 나르시시스트를 더 잘 알아볼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그 답이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언뜻 생각하면 개념이 익숙해질수록 식별 능력이 올라갈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나르시시스트’라는 낙인이 우후죽순 남발되면서 잘못된 판단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용어가 대중화되면 늘 그렇듯, 오용도 늘어난다. 개념은 사라지고,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쓰는 새로운 욕설로 기능하는 일이 흔해진다. 뜻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그냥 'X발놈'이나 '개xx'처럼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비난하기 위한 욕설의 하나가 돼버리기 일쑤다.

 

더 위험한 것은 언제나 사회 통념을 유리한대로 이용하는 나르시시스트의 특성상, 나르시시스트가 이를 역이용하는 사례도 늘어난다는 것이다. 만약 '나르시시스트'라는 표현이 사회에서 최고로 지탄 받고 불이익을 받는 무시무시한 낙인이 된다면, 이 낙인을 남들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찍고 다닐 이들은 바로 나르시시스트들일 것이다. 나르시시스트가 거꾸로 자신의 피해자를 나르시시스트라고 낙인찍는 경우는 상상 외로 매우 흔하다.

 

나르시시스트를 쉽고, 빠르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간단한 테스트라도 있다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방법은 없다. 어떤 사람을 나르시시스트라고 판단하려면 전체 맥락과 시간을 두고 관찰한 결과가 필요하다. 단편적인 언행 몇 가지로 성급하게 판단하면 오히려 안전한 사람을 내치고, 위험한 사람을 곁에 두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다음은 나르시시스트를 오해하게 만드는 잘못된 기준들을 정리한 것이다.

 

 

(O)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에게 공감하지 않는다.

(X) 내 말에 공감 안 해주면 나르시시스트이다.

 

공감 능력은 모든 사람의 모든 의견에 공감해준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타인에 대한 공감을 잘 하지 못한다고 해서 모두가나르시시스트인 것도 아니다(예: 자폐 스펙트럼, 사회성 부족). 게다가 나르시시스트도 자신과 이해관계 및 운명을 같이 하는 타인 또는 집단에는 얼마든지 공감을 발휘한다. 이는 정확히 말하면 '타인'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자신과 이해관계가 동일한 이들을 자아의 연장으로서 보고 흡수하는 절차이지만 이걸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다.

 

또한 나르시시스트는 실제로는 공감하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그저 잘 보이기 위해서 공감하는 척 하는 연기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 심각하게 결여된 나르시시스트의 특성상,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안달이 난 상태(love bombing 단계)에서는 자신의 행동이 진짜인지 연기인지 스스로도 구분을 못한다는 것이다. '공감'이라는 단어는 감정을 연상시키지만 제대로 된 공감의 핵심은 감정보다 이해력이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맞장구만 치거나 편들어주는 것은 공감이 아니다.

 

나와 의견 차이를 보이는 게 괘씸하다고 의견이 다른 상대를 나르시시스트로 낙인찍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이다. 의도적으로 상대를 모욕하거나 기분나쁘게 하려는 의도로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단순히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의견 표현을 한 것이라면 오히려 그런 사람은 나르시시스트일 가능성이 낮다.

 

이와 반대로, 대화를 해보면 어딘가 얄팍하고 이성적으로 상황 이해를 잘 못한 것 같은데 내게 잘 보이려는 마음만 절절해서 무조건 예스맨으로 구는 사람이 있다면? 이쪽이 오히려 나르시시스트일 가능성이 높다. 그 사람은 지금 당신에게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혼신의 연기를 하는 중이다. 물론 그조차도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O)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X) 국룰을 어기고 특이한 선택을 하는 사람은 나르시시스트이다.

 

다음의 대화를 보자.

 

A: 나 보컬 학원 다니기 시작했어! 열심히 해서 오디션 봐야지. 

B: 와, 드디어 시작했구나. 축하해.

C: 결국 섶 지고 불로 뛰어드는구나?

A: 뭐 어려운 길인 건 알아.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도전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

B: 그래, 바짝 도전해보고 아니면 다른 길 택해도 되지, 아직 어린데.

C: 야, 경쟁이 얼마나 센데 넌 네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 네가 그렇게 특별해?

A: 노래가 내 특기는 맞잖아. 그걸 제일 잘 하고 제일 좋아하니까 일단 투자는 해 보고 싶어. 어려운 길이라도 일단 된다는 희망을 가질 거야.

C: 와, 진짜 자기가 특별한 줄 아네.

B: 얘 가창력이 특별하긴 하지. 물론 가수들은 노래를 다 잘하긴 하지만.

C: 사람은 현실을 살아야 하는 거야.

B: 그래, 현실적으로 어렵긴 하지. 나도 현실이 무서워서 하고 싶은 건 취미로나 하려고. A만한 용기는 없어서.

C: 야, 취미도 다 낭비야. 너네 참 철이 없구나? 난 무조건 현실적인 길로만 가고 1초도 낭비 안 하고 살거야. 결국 내 선택이 옳다는 걸 너희들도 다 알게 될 걸?

 

위의 A, B, C 중 타인보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여기는 나르시시스트는 누구일까?

 

정답은 C이다. 자신과 하등 무관한 남의 선택에 대해 자신이 심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타인보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우월하다고 여기고 있으며, 심지어 타인의 미래까지도 예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웃기게도 한국에서는 남들이 말리는 비현실적인 도전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A와 같은 사람이 나르시시스트로 오해받을 가능성이 크다. 남들이 쉽게 도전하지 않는 꿈에 도전한다고 하면 '네가 그렇게 잘난 줄 아느냐'는 비난을 하거나, '나도 무서워서 선택하지 않는 길을 네가 선택했으니 결과적으로 너는 나보다 네가 잘났다고 우기는 것'이라는 식의 정신병리적 피해의식을 발동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C는 명백히 타인을 무시하며 자신만의 의견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회 통념에 묻어 가는 보호색 효과를 누릴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진로 선택 면에서 다수를 따르는 선택을 했으니 본인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을 거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C의 '현실적' 선택은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길을 택하려는 계산 때문이지 '나는 특별하지 않다'는 겸손 때문이 아니다.

 

개인의 고유한 선택은 그것이 제아무리 남의 눈에 이상하게 보인다 한들 나르시시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개인의 고유성에는 위계가 없다. 나르시시스트가 가진 '나는 특별하다'는 자의식은 위계적인 개념이지 고유성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나르시시스트는 개인의 고유성을 믿지 않으며, 고유성을 드러내는 사람을 혐오한다. 왜냐하면 개개인의 고유성이 강해지면 획일적인 기준으로 사람들 간 위계를 파악하는 것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O)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다. 

(X) 남의 눈치를 안 보면 나르시시스트이다.

 

나르시시스트의 특징 중 하나는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한국 문화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종종 '눈치 보기'와 혼동된다는 것이다. '내 마음에 꼭 들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말을 조금 둥글게 안 했다고, 집단의 분위기나 관습에 장단을 맞추지 않았다고, 내가 기분나쁘고 컨디션 안 좋은데 적극적으로 챙겨주지 않았다고, 남들이 다 하는 거니까 눈치껏 알아서 하길 바랐는데 안 했다고 등등의 이유로 누군가를 나르시시스트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런 행동을 정반대로 뒤집어서 지나치게 능구렁이처럼, 입 안의 혀처럼 굴거나, 심각하게 내 눈치를 살피는 사람이야말로 위험한 나르시시스트일 가능성이 높다.

 

눈치 보기는 제대로 된 소통이 아니며, 배려도 아니다. 오히려 눈치 보기는 상대방에게서 원하는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자신의 진심을 감춘다는 면에서 타인 조종에 가깝다. 이 또한 나르시시스트가 자주 하는 짓이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사실은 '나르시시스트가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속마음에 대한 것이지 겉으로 보이는 행동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을 존중하지 않으며 도구로 보기 때문에 타인을 '진심으로' 배려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 이목이 쏠려 있는 장소에서는 얼마든지 일시적/단기적으로 타인을 배려하는 매너를 보일 수 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당연히 본인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제공하는 배려라고 해봤자 대개는 실속없는 것들(밝은 인사성, 입에 발린 칭찬, 유려한 스몰톡, 의자 빼주기와 같은 사소한 기사도 등)에 국한되지만 '일단 주고 뺏는' 유형의 사기꾼들처럼 일시적으로 정말 큰 도움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나르시시스트들도 있다. 물론 어느 정도의 도움을 받았든, 나르시시스트는 반드시 어마어마한 이자를 붙여 그 이상을 빼앗아갈 것이다.

 

 

(O) 나르시시스트에게는 특권의식이 있다.

(X) 목표가 높고 야심만만하면 나르시시스트이다.

 

누군가에게 특권의식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판단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다. 대통령이 타국을 방문하며 국가원수급 의전을 기대하는 것은 특권의식일까? 그럴 리 없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권의식은 자신이 그만한 자격이 되지 않는데 터무니없이 높은 대접을 바라는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누군가의 '자격'이라는 것도, '터무니없이 높은 대접'이라는 것도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타인을 후려치기 좋아하는 사람의 눈에는 자신의 능력에 적절한 연봉을 요구하거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합리적인 협상을 시도하는 사람조차 특권의식을 가졌다고 보일 수 있다. 때문에 그저 높은 목표를 가지거나 높은 대우를 요구하는 것만으로 누군가를 나르시시스트라 낙인찍는 것은 별로 효과적인 기준이 아니다. 하다 못해 연봉 협상에서 '설마 되겠어?' 싶은 수준의 높은 연봉을 요구하는 경우라 해도 그것이 단순히 그 사람의 모험심인지 나르시시즘인지를 명확하게 가려낼 수는 없다.

 

나르시시즘적 특권의식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그 근거가 현실적 자신감이 아니라 마법적 사고에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주 3회 운동을 해서 건강해지겠다. 나에게는 분명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와 같은 자신감이 아니라 '주 3회 운동을 해봤자 타고난 유전자가 거지같으면 다 소용없다. 난 그런 사람들과 달리 좋은 운명을 타고나서 운동 따위 안 해도 된다.'와 같은 환상을 가지는 쪽에 가깝다. 자신이 행동으로 옮기고 증명함으로써 상위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야심은 특권의식이 아니다. 반대로 특권의식은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어떻게든 모든 게 저절로 최상으로 주어질 것이라는 맹목적 믿음에 가깝다. 

 

각종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나르시시스트의 일반적 특징들(공감 능력이 없다, 배려가 없다, 오만하다, 특권의식이 있다, 무례하다,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다 등)은 어디까지나 나르시시스트의 내면에 대한 지적이지 겉으로 그게 항상 드러나 보인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나르시시스트는 그러한 면모를 감추기 위해 정반대의 페르소나를 연기한다. 이 부분을 고려하지 못하면 겉모습만 보고 사회성이 부족하거나 성격이 다소 차가운 사람을 나르시시스트라고 오해할 수밖에 없다. 나르시시스트는 사회성이 없는 존재들이 아니라 반대로 사회성밖에 없는 존재들이라 문제가 된다. 자의식 속에 사회나 타인에게 비춰지는 자기 모습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24시간 리얼리티 쇼 스타처럼 '사회적 이미지'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제아무리 바보라 할지라도 사회적 스킬만큼은 다른 능력치에 비해 월등한 경우가 많다.

 

때문에 나르시시스트를 한눈에 쏙쏙 골라내겠다는 섣부른 욕망은 위험하다. 사람을 감식하는 천리안에 대한 비현실적 기대를 품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타인에게 늘 일정 수준 이상의 거리를 유지하는 습관이 더 유용하다. 누가 한 번 나한테 잘해줬다고 '앞으로 무조건 그 사람만 믿고 가겠다'고 결심하거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그 사람의 변호꾼 노릇을 하고 다녀서는 안 되며, 반대 역시 위험하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같은 속담을 함부로 대인관계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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