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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의 21세기 전법

Dirt Mentalist 2023. 11. 10.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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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차는 있지만 나르시시스트 중에는 옛 시절을 선호하고 현대 사회를 싫어하는 경향을 보이는 사람이 반대의 경우보다 많다. 이는 절반 쯤은 주어진 환경에 대해 늘 자동 불평을 하는 나르시시스트의 특징 때문이다. 즉, 나르시시스트가 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은 현재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한 불평의 연장선상이다. 나르시시스트의 불평은 주변인에게 무엇이든 하나라도 더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며 일종의 습관이다. 때문에 이들의 현대 사회에 대한 불평과 비판에 무슨 대단하고 심오한 내용이 있을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어떤 시대에 갖다 놔도 불평을 할 이들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가 전근대 사회에 비해 나르시시스트를 실제로 더 불쾌하게 만들거나 위협을 느끼게 만드는 특징도 분명히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인간 문명 사회는 현대화될수록 더 많은 개인의 자유, 사회적으로 평등하고 공정한 체제, 더 높은 인권 의식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불공정하게 착취하기가 어려워진다는 뜻이므로, 한 사회의 현대화는 나르시시스트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더 까다로운 전략을 써야 함을 뜻한다.

 

자식을 도구로 이용하려는 나르시시스트 부모를 예로 들어 보자. 자식의 도구화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전근대 사회와 현대 사회 중 어떤 사회가 더 편할까? 당연히 전자 쪽이다. 아동 인권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전근대 시절에는 의무 교육 기간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손발을 움직일 수만 있으면 곧바로 생산 현장에 투입되었다. 아이를 조금만 길러 바로 본전을 뽑을 수 있는 사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반대이다. 문명 사회는 한 명의 성인이 될 때까지 무려 18년이란 긴 세월을 투자할 것을 요구하며, 의무 교육 체제는 부모가 아이를 어린 시절부터 생산재로 돌릴 수 없게 만든다. 이를 따르지 않는 부모는 범죄자가 된다. 사회가 문명화되고 현대화될수록 부모의 의무와 책임이 더 무거워지는 셈이다.

 

이는 부모-자식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법이 엄격해지면 고용인이 피고용인에게 시킬 수 있는 노동은 제한되고, 사법 체계가 강해지면 누군가를 물리적으로 겁박하기가 힘들어진다. 기본적으로 사회 전반에 인권 의식이 높아지면 누군가에게 함부로 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다. 사람들이 개인의 자유의 중요성을 깨달아갈수록 남의 선택을 비난하고 남의 인생에 고나리질하는 것도 쉽지 않아진다. 한마디로 일방적인 숭배나 복종을 뽑아낼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이 줄어드는 것이다. 이 모든 '현대적 요소'들이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자신의 비대한 자아 유지에 필수적인 '나르시시스트 자원(Narcissistic Supply)' 확보를 어렵게 만든다.

 

나르시시스트는 수직 위계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그 피라미드에서 늘 자신이 초월적인 정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민주적인 사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유는 타인이 자신의 명령대로 행동하지 않아도 됨을, 평등은 자신만이 특별 대우를 받을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세 시절에는 행인을 아무나 공격해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뱀파이어가, CCTV가 사방을 에워싸 사각지대가 없고 경찰이 수시로 순찰을 도는 철저한 현대 사회 보안 체계에서 남몰래 흡혈 대상을 찾아 공격하기 힘들어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나르시시스트는 가시적인 보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비하거나 장기적으로 근본적인 발전을 추구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분명한 이익이 되는 옵션에 올인하는 경향이 있다. 기득권에 의존하거나 기존 관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얻은 자신의 이익이 유지되려면 세상에 변화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나르시시스트는 대개 변화에 적대적이다. 나이가 먹을수록 더 그렇게 된다.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 시간의 흐름은 늙어가는 나르시시스트에게 사회에 대한 증오, 혐오, 피해의식을 심어준다. 세상이 너무 썩어서 위아래가 없어졌다, 이상한 놈들이 설쳐댄다, 사악한 기술이 발달한다는 등등의 불평은 나르시시스트 노인의 단골 대사들이다.

 

아무리 CCTV가 많아져도 뱀파이어는 어떻게든 흡혈을 해야 살 수 있듯이 나르시시스트 역시 어떻게든 자신의 자원을 확보해야만 살 수 있다. 또한 21세기 현대 사회가 '대체적으로' 나르시시스트에게 불리하게 변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각지대를 잘 포착하거나 사소해 보이는 지형지물을 전술적으로 잘 활용하는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세부적으로 모든 환경 요인이 적대적인 것만도 아니다.

 

현대 사회가 대체적으로 뱀파이어의 사냥을 어렵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간 유동 인구가 많아졌다는 변화만큼은 뱀파이어에게 다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듯이, 오히려 과거에는 없다가 현대에 들어와서 생겨난 것들 중 나르시시스트가 기쁘게 이용할 수 있을 만한 것들도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포스트모던 체리피킹식 내로남불과 변덕

 

법을 어기지 않는 한 모든 걸 '개인의 선택'과 '취향 존중'이라는 방패로 방어할 수 있는 현대 사회는 특정 한 가지 이데올로기가 지배한다기보다는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이다. 어떤 사람은 종교를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제사를 지내고 어떤 사람은 지내지 않는다. 적어도 법적/공식적으로는 둘 중 어느 한 쪽만이 옳은 삶의 방식으로 강요되지 않는다.

 

현대 사회는 이처럼 전근대 사회와 달리 동일한 대상을 두고 상반된 자세가 모두 용납되는 경우가 많다. 나르시시스트는 이를 악용해 경우에 따라 입장과 가치관을 바꿔 자신에게 유리한 주장을 펼치곤 한다. 이를테면 자신이 귀찮아서 제사를 회피할 때는 제사의 미개함을 강조하다가, 제사를 지내지 않는 타인을 비난할 때는 갑자기 전통적 유교 문화의 가치를 설교하는 식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르시시스트와 오랜 기간 가까이 지내며 두 가지 모습을 다 본 사람이라면 나르시시스트의 아전인수격 주장에 논리적 모순이 있음을  인지하겠지만, 사회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타인의 이러한 모순을 일일이 감지할 만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지는 않는다. 어느 한 쪽의 모습만을 보는 사람이라면 나르시시스트가 상황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내로남불과 변덕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수밖에 없으며, 나르시시스트는 이를 십분 활용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

 

2. 타인의 독립성을 빌미로 하는 과도한 책임 전가

 

시급 n만 원을 받기로 약속한 일자리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급여일이 되자 고용인이 약속한대로의 시급을 지불하지 않고 멋대로 깎은 금액을 지불했다. 피고용인이 이것에 대해 피해를 호소하며 따지고 들자 고용인에게 돌아온 대답은 "어쨌든 네가 선택한 일이잖아. 내가 강제로 일 시킨 거 아니잖아."였다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피고용인이 일을 하기도 동의한 것은 시급 n만 원을 전제로 했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말도 없이 계약 조건을 혼자 자의적으로 변경하고는 '어쨌든 네가 일을 하기로 선택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급여를 조정하려면 새로운 조건을 밝히고 그에 대한 동의를 구해 계약을 다시 해야 한다. 약속한 급여를 주지 않았다면 고용인은 피고용인에게 경제적 피해를 입힌 가해자가 맞다. 중증 나르시시스트는 제3자에게 공개되지 않을 자신만 있다면 이런 상황에서조차 자신의 책임을 부정한다. 

 

이렇게 시급처럼 숫자로 명백하게 표시되지 않는 영향력의 경우는 어떨까. 그나마 계약 내용이 명백하게 서면화된 경우는 현대 사회 체제가 피해자를 보호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모호한 무형적 내용의 계약에서는 현대 사회가 보장하는 '개인의 권리'가 오히려 나르시시스트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은근한 정서적 압력이나 협박을 통해 상대방의 의사결정을 본인에게 유리한대로 조종해 놓고 나중에 '네가 선택한 거잖아'라며 면책을 요구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상대방 의사 결정의 혜택만 누리고 책임으로부터는 도망가겠다는 전략이다. 미성년자라 아직 사회 경험이나 정보가 충분치 않은 어린 자식의 무지를 악용해 일부러 의사결정을 조종해놓고 후에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네가 선택했으니 모두 네 책임'이라며 뒤로 빼는 부모가 그러한 예가 될 수 있다. 

 

물론 나르시시스트는 평상시에는 타인의 독립성과 자유를 혐오하며 이를 최대한 억압하려 한다. 될 수 있는 한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결정하기 위해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고 상대방에게는 마치 선택의 자유가 없는 것처럼 말한다. 법적으로 상대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는 상황에서도 도덕적/윤리적 비난이나 감정적 읍소, 피해자 코스프레 등을 통해 그 권리를 무력화한다. 그러나 결정 이후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때에는 정반대의 입장이 되어 자신의 영향력을 부정한다. 따라서  압력을 가할 때는 '자식은 부모 말에 복종해야 한다' 라며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내세우다가 뒤에 가서 책임을 져야 할 때는 '어디까지나 네가 선택한 일'이라며 현대사회식 개인주의를 내세우는 식의 양면성을 흔하게 보인다.

 

3. 조직의 민주적 분위기 또는 상대의 힘과 관대함을 역이용하는 무임승차

 

선진국일수록 한 구성원이 집단에서 지탄을 받을 만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에 대한 처분이 문명적으로 이루어진다. 처분이 문명적이라는 것은 사회가 그 구성원에게 내리는 처벌의 종류와 강도가 비교적 덜 폭력적이고 덜 침습적이며, 구성원의 교화와 갱생의 가능성을 더 믿어준다는 뜻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이 점을 악용해 자신이 지탄을 받는 위치에 섰을 때 뻔뻔하게 사회의 관대함과 용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의 민주적이고 관대한 분위기를 자신에게 유리한대로 최대한 이용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평소에는 믿지도 않던 민주적 사회의 우월함과 관용의 가치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도 하고, 충분히 관대함을 베풀지 않는 사회에 대해 적반하장식 비판을 하기도 한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복수심이나 분노가 건강하지 못한 감정이라고 설교를 하는 경우도 흔하다. 충분히 반성하지 않은 채로 반성했다고 선언하면서 얼렁뚱땅 성의 없는 사과를 하는 것도 나르시시스트의 단골 전술 중 하나이다. 자신의 잘못을 없던 일 취급하고 재빨리 예전 상황으로 돌아가려는 수작이다.

 

물론 이 역시 나르시시스트가 철저히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에 책임을 지기 싫을 때만 나오는 입장이다. 나르시시스트 본인은 타인의 잘못이나 실수에 절대 관용이나 관대함을 베풀지 않는다.

 

4. 익명성과 다중 정체성을 이용한 기만

 

전근대 사회에 비해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도시화가 진행된 현대 사회는 익명성 뒤에 숨기가 용이한 사회이다. 현대인의 일정은 전근대인들에 비해 훨씬 바쁘고, 접촉하는 주변인의 수도 훨씬 많다. 이는 나르시시스트가 여러 정체성을 개발해 그 뒤에 숨기 쉽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셜 미디어 같은 현대적 도구는 날조에 가까운 이미지 개발로 제2, 제3의 정체성을 수립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런 매체의 인플루언서들은 영향력도 크고 금전적 보상도 크게 받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이미지가 얼마나 진실한지에 대한 검증 책임은 그다지 무겁지 않다. 

 

나르시시스트는 늘 현 상황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대로 페르소나를 바꾸기 때문에 익명성과 단기적 주목성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소셜 미디어에 최적화된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Instagram: https://www.instagram.com/dirtmenta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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