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한국의 부모들이 딸들에게 원하는 '공감 능력'의 실체 본문
한국에서 21세기 초까지만 해도 통계상으로 명확히 드러나던 남아 선호 사상이 사라질 때 즈음부터 이른바 '딸이 좋다'는 식의 여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주로 중장년층 이상의 나이든 계층에서 먼저 퍼져나간 '딸이 있어야 한다'는 식의 트렌드는 대개 딸의 높은 '공감 능력'을 그 이유로 삼는다. 딸은 아들에 비해 공감 능력이 높고, 따라서 부모를 애틋하게 여기며 세심하게 보살펴 준다는 것이다.
성별에 근거해 특정 성별만이 '공감 능력이 높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문제이고, 그런 기대를 가지고 특정 성별의 자식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한국 부모식 나르시시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식을 존재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용도에 따라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일방적인 '공감' 요구는 위험하다. 말이 좋아 '공감'이지 실제로는 자식에게 부모의 시선과 입장을 강요하는 과도한 동일시로 흐르기 십상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본인 자신은 타인에게 공감하지 않지만 타인에게는 자신에 대한 절대적 공감을 요구한다. 이른바 공감 거래의 내로남불이다. 물론 다른 모든 나르시시스트식 내로남불 거래와 마찬가지로 이 불공정한 공감 거래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자신보다 상위에 있다고 여겨지거나, 잘난 존재로 여겨지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자신이 잘 보이고 싶은 상대에게는 감히 그렇게 하지 않지만, 자신이 만만하게 여기는 대상에게는 이런 거래 조건을 들이민다. 상대가 힘들어 할 때는 본체 만체하거나 심지어 비난하고 비웃다가, 거꾸로 자신이 힘든 상황에서는 상대가 모든 걸 받아주고 도와주길 바라는 식이다. 만약 원하는대로 해주지 않으면 '공감 능력이 없다', '못됐다', '비윤리적이다', '나중에 두고 보자' 식으로 비난/협박을 일삼기도 한다.
부모가 남들이나 다른 가족 구성원한테는 그러지 않으면서 유독 딸에게만 일방적 '공감 능력'을 요구한다고 힘들어하는 딸들이 많다. 또한 남들한테 말할 때는 '공감 능력' 높은 딸이 좋다고 자랑하기 바쁜 부모가 왜 막상 자신을 만나면 함부로 대하고 늘 못마땅해하는지 의아스러워하는 딸들도 많다. 다른 곳에서는 똑부러지는 모습을 보이던 딸들도 가족 내 최고 권위자이자 '효' 사상이라는 한국 최고의 윤리적 당위를 등에 업은 부모들의 비난이나 실망에는 예민해져 부모의 리액션 셔틀이 되어버리곤 한다. 막상 딸들 입장에서는 전혀 반갑지 않은 이런 한국식 '딸 선호' 트렌드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이 '공감'이 건강한 범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건강한 종류의 공감은 명백히 서로 독립성을 인정하는 두 개인이 상대방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 높은 딸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부모는 대개 강한 나르시시즘을 가지며, 나르시시스트가 원하는 공감이란 상대방이 자신의 부속품이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상대방이 자신의 독립적 의견이나 관점은 모두 포기하고 그저 자신의 도구나 미니미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공감은 상대방의 의견에 덮어놓고 찬성하고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그 둘을 동일시한다. 자식이 부모에게 공감한다면 부모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다 해 줄 것이라고,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낮은 자율성, 학습된 무기력, 착한아이 증후군, 노예 근성 등을 높은 공감 능력으로 사기 포장해놓은 것에 불과하다.
두 번째로는 '공감 능력' 때문에 딸을 선호하는 이들은 딸의 기능을 좋아할 뿐이지 딸의 존재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의 기성세대 부모의 딸 상찬에는 대개 딸이 공감 능력이 높아 자신들을 잘 보살펴 준다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예전 시대의 남아 선호 사상에도 아들이 부모의 노후를 책임져 줄 것이라는 현실적 기대가 포함되어 있기는 했으나, 그래도 남아 선호 사상에는 아들이 '대를 잇는다', '그저 든든하다'는 존재론적 이유 역시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다. 여아 선호와 남아 선호의 결정적 차이가 여기에 있다. 여아 선호에는 남아 선호처럼 존재 자체에 대한 선호가 없다.
다시 말해 현재 한국 중장년층 이상이 '딸이 좋다'고 말할 때, 그것은 딸의 '기능'이 좋다는 것이지 딸의 '존재'가 좋다는 것이 아니다. 기능은 존재와 달리 대체 가능한 것이며, 혹여나 대체가 쉽지 않다고 해도 존재에 대한 애정과 그 성질이 같을 수는 없다. 우리가 냉장고의 기능에만 관심이 있지 냉장고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는 것과 같다. 남들에게는 딸을 자랑하기 바쁜 부모가 막상 딸에게는 함부로 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무뚝뚝해서, 표현을 못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딸의 기능만 좋을 뿐 딸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호감이 없기 때문에 잘해주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단순한 자아 도취가 아니며 자신이 도취되어 있는 자아상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는 강한 욕망을 기초로 한다. 따라서 나르시시스트는 반드시 타인의 일방적 '공감'을 필요로 한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세상을 보고, 자신이 주장하는 바에 맞장구를 쳐주고, 자신이 최고라고 찬사를 보내고, 자신이 지시하는대로 움직여주는 수족가 미니미들이 있어야만 나르시시스트가 원하는 세상이 만들어진다.
밖에서는 전혀 씨알도 안 먹힐 자기만의 세계관을 가장 만만한 자식에게, 특히 딸에게만 세뇌시키는 경우도 많다. 밖에서 무시당하니까 필사적으로 한 명이라도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기 위해 더 그러기도 한다. 이런 세상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사이비 종교 조직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이런 이상한 종교의 1인 신도가 되어주면 시간이 갈수록 본인의 정체성과 사고방식이 망가지고 나아가 사회 생활도 망가진다.
환경이란 무서운 것이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되지' 하면서 아무리 분별력을 가지려고 해도 수십 년에 걸쳐 끊임 없이 틀린 말을 듣다 보면 세뇌당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판단력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도움 되는 짓만 하고 살아도 쉽지 않은 인생에서 왜 그런 손해 나는 짓을 하고 사는가? 본인이 환경 영향 안 받는답시고 꾸역꾸역 역풍을 견디는 것은 숭고한 노력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한 노예근성이다. 그러니까 가족이든 누구든 억지로, 일방적으로 공감해주려고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의 감정도 엄연히 개인의 귀중한 자산이자 권리이며 함부로 요구하는 것은 선을 넘는 짓이다.
(공감의 자매품으로 리액션 역시 마찬가지로 함부로 해주지 말아야 한다. 영혼 없는 리액션도 마찬가지. 누군가가 당신의 감정을 손쉽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때부터 당신은 셔틀 노릇이 당연한 존재가 되며 존중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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