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자신의 인생을 사는 데는 특별한 자격이 필요 없다 본문
"대체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답시고..."
대학원에 다니는 A씨는 오늘도 자신을 향해 눈을 흘기는 부모의 불평을 참아내고 있다. 하고 싶은 공부가 있어 대학원에 진학한 A씨는 얼른 취업해 돈을 벌라는 부모의 지시를 무시한 죄로 늘 가시방석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A씨도 학교 랩에서 받는 벌이가 있기 때문에 부모에게 손을 벌리는 사정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취업한 직장인들만한 수입은 되지 않는다.
"너같은 애는 한시라도 빨리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버는 게 무조건 장땡이야."
A씨의 부모는 A씨의 진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며 그 이유의 중심에는 늘 돈이 있다. A씨는 석박사 과정을 졸업하고 오히려 진로가 더 잘 될 수도 있다거나, 자신의 성향상 공부가 맞는 길이라고 설명하는 등 여러모로 부모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특히, A씨의 적성이 공부에 맞는다고 말할 때 부모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뭐 아인슈타인이라도 되냐? 무슨 대단한 업적 남겨서 노벨상이라도 탈 위인이라도 되셔? 그런 것도 아니면서."
"네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공부만 하는 호사를 누리겠단 거야? 타고난 천재 아니면 평범하게 살 줄 알아야지. 박사 마친다고 잘 될 수도 있지만 확실한 건 아니잖아. 돈 더 번다는 보장같은 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당장 돈 버는 것보다 미래를 위해 투자가 더 중요한 건 대단한 사람들 얘기지. 너같은 사람이 아니라."
A씨는 본의아니게 죄책감 때문에 늘 작아지는 느낌이다. 대학원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주제 모르게 배 부른 선택을 한 철딱서니가 된 것 같고, 오만하게 스스로를 천재로 착각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자신감이 없어진다. 자신은 그저 여러 진로 중 자신에게 가장 끌리는 것을 선택했을 뿐인데 부모가 그것을 자꾸 이상한 방식으로 해석하니 다른 사람들도 혹시 자신이 대학원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뒤에서 욕을 하려나 불안해지기도 한다.
---------------------------------------------------------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이 하는 심각한 착각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법적으로 자유인이니까 실제적으로도 자유인으로서의 권리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는 착각이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적 압력에 다른 동물보다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실제 인간이 누리는 자유는 대부분 '타인이 정상이라고 수긍할 만한 범위'로 제한된다. 때문에 스스로를 자유인이라고 착각하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은연중에 잠재의식적으로 지정해놓은 자신의 한계가 진짜 물리적 한계인지, 자신의 판단 기준에 합리적 근거가 실존하는지를 점검해봐야 한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자신의 신체를 자유롭게 운용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무엇에 투자할지 결정하는 것은 현대인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 중 하나이다. 위의 A씨가 한 선택은 이런 면에서 결격 사유가 전혀 없다. A씨가 자신의 인생에서 주어진 시간을 이용해 무엇을 할지를 결정하고 어느 장소에 속하기를 결정하는지는 전적으로 A씨의 자유이며 A씨는 이 과정에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또한 공부를 지속하기를 원하는 A씨의 의사를 받아들여준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A씨는 대학원에 합격했을 것이며, 그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급여를 받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A씨가 한 선택 중에 '자격 없는 선택'은 하나도 없다. 비단 A씨 뿐 아니라 세상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사는 데에는 아무런 자격 조건이 필요 없다.
그러나 A씨의 부모는 그러한 A씨에게 계속해서 '너같은 애'는 그런 선택을 해서는 안 되며 A씨에게 그런 길을 갈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실제적 근거가 있을까? 당연히 없다. A씨에게 그럴 자격이 정말 없다면 사회가 알아서 막았을 것이다. 즉, 자격이니 권리니 하는 개념은 여기에 전혀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A씨에게 '대학원을 당장 때려치우고 취업할 것'이라는 법원 명령이라도 들고 올 게 아니면 누구도 A씨에게 자격 조건 따위를 따질 수 없다.
A씨의 부모는 '천재나 대단한 위인이 아니면 공부 따위에 시간을 투자하지 말고 당장 돈이나 벌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천재'나 '위인'의 자격 조건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A씨의 부모가 멋대로 창조해낸 자의적인 규범이다. 이런 규범은 대한민국 법령 어디에도 없다. 자신들의 개인적 욕망(이 경우에는 자식이 빨리 돈을 벌기 바라는 마음)을 사회 보편적 규범으로 포장하는 것은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단골 전법 중 하나이다. 이런 부모의 세뇌에 넘어가 규범 아닌 것을 규범인 것으로 착각하기 시작하면 실존하지도 않는 쇠사슬에 묶인 노예마냥 스스로를 제한하며 살게 된다.
혹자는 A씨 부모의 불평이 진짜 '자격'을 따지기보다는 빨리 돈을 버는 진로가 현실적으로 더 이익이 된다는 뜻의 조언일 뿐이라고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적인 조언을 좀 더 확실하게 주장하기 위해 말을 좀 세게 했을 뿐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본인에게 다양한 선택의 여지가 있음을 알려주는 '조언'과, 안 하면 사형 식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강요'는 개념적으로도 다르고 효과도 다르며, 무엇보다도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천양지차로 다르다. 조언은 대개 대화 속에서 말하는 사람이 알고 있는 정보를 최대한 투명하게 노출하게 되어 있다. 반면에 강요는 상대방에게 다른 옵션이 없다고 세뇌해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정확한 정보를 가리고 말하는 사람이 원하는 정보만을 전달하게 된다. 이기적인 자기만의 목적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기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이런 식의 기만에 익숙하기 때문에 착취적인 나르시시스트의 세뇌를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세뇌 상황에서 핵심은 '대학원에 가는 것이 정말 좋은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A씨 부모의 핵심적 문제는 돈벌이를 우선시한다는 것도, 대학원보다 취업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는 점도 아니다. A씨의 사고 회로 작동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제멋대로 자의적인 자격 조건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만에 하나 A씨가 이런 부모에게 성공적으로 세뇌당해 자신의 진로를 포기할 경우, 인생의 방향타가 타인에 의해 조종당하게 되는 것도 큰일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부모와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남을 재단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높다. '대학원은 천재나 가는 곳'이라는 게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명제도 아닌데 마치 그런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는 면에서 A씨는 편협하고 삐뚤어진 세계관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런 세계관을 바탕으로 내리게 되는 앞으로의 인생 결정에서도 오류를 범하거나 타인에게 불쾌감을 줄 가능성이 높다.
'흙멘탈리스트 > 나르시시스트 부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부모들이 딸들에게 원하는 '공감 능력'의 실체 (3) | 2023.12.13 |
---|---|
나르시시스트의 21세기 전법 (8) | 2023.11.10 |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과연 진심으로 자식의 성공을 바라는가 (24) | 2023.06.22 |
남친같은 아들, 친구같은 딸 (15) | 2023.05.30 |
역기능 가족의 딸이 엄마를 동정하면 안 되는 이유 2 (10) | 2023.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