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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친같은 아들, 친구같은 딸

Dirt Mentalist 2023. 5. 30.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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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영화(이자 올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뮤지컬 리메이크로 개봉할) <컬러 퍼플>의 주인공 셀리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잃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네가 엄마 대신이다."

 

그리고 그는 셀리를 성폭행하고 셀리는 친아버지의 아이를 낳게 된다. 이 지옥도는 셀리가 나이 많은 다른 남자에게 팔려가듯 결혼해 또 다른 지옥도가 펼쳐질 때까지 계속된다. '엄마 대신'이라는 표현이 저런 의미라는 것을 어린 셀리는 처음에 상상조차 하지 못했겠지만 그의 아버지는 정말 문자 그대로 육체적인 것까지 모두 포함해 엄마가 하던 모든 역할을 셀리에게 그대로 이전시켰다.

 

자신의 아들이 '리틀 남친'이라는 엄마, 딸과 '친구같은 관계'가 되고 싶다는 현대 엄마들의 표현에는 문제가 없을까? 이런 표현을 방어하는 이들은 그러한 표현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며 최대한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려고 한다. 그저 자식에 대한 친근감과 편안함의 표현이라는 식이다. 이런 표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들에게 '너희들의 사고방식이 불순해서 그런 것', '네 부모가 변태였나본데 다른 부모는 문제가 없다' 라는 비난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을 남친으로, 딸을 친구로 표현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저 부모라는 존재는 덮어놓고 모든 면에서 옳고 자식에게 완벽한 사랑을 베푼다는 맹신 때문에 그렇게 해석을 할 뿐이다. 알다시피 모든 부모는 완벽한 인간도 아니고 모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틀린 명제에 대한 맹신은 현실을 가리고 부모 중심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부모의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못하고 자식에 대한 애정이 없거나 건강하지 못한 방향일 경우, 이러한 표현은 <컬러 퍼플> 속 끔찍한 사례처럼 부모-자식 관계의 본질을 파괴하는 도착적 관계를 의미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록 <컬러 퍼플>의 설정처럼 실제적 폭력이나 성적 관계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정신적인 면에서 그러한 관계가 생기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많은 이들이 부르짖는 것처럼 실제 육체적 관계만 없었다고 해서 이러한 표현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표현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표현의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메타포적 의미로서 긍정적인 부분만 취하라고 요구하지만, 이는 매우 이상한 논리이다. 이미 충분히 독점적이고 특별한 모자 관계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 개념으로는 담아낼 수 없고 '남친'이라는 단어를 써야만 담아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물며 그냥 '친구'도 아니고 굳이 '남친'이라는 단어를 꼭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성적 관계의 긴장감이 완전히 살균된 '남친'이라는 표현에 다른 가족/친구 관계에는 없는 특별한 의미를 담는 것이 가능한가? 그럴 리가 없다.

 

결국 아들을 '리틀 남친'으로 표현하는 것에는 최소한 감정적인 면에서라도 다른 가족 구성원이나 친구가 아닌 '남친'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갈구하는 욕구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아들이랑 실제로 그런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는 식의 방어는 별로 확실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모자 근친 관계는 최악으로 여겨지는 터부 행위 중 하나이며 사회적 지탄과 처벌이 엄청날 것이기 때문에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로서는 하지 못할 짓이다. 사회적 처벌이 그만큼 무섭다는 증거는 될 수 있어도 본인의 감정이 떳떳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도착적인 감정은 실제 육체 관계가 없더라도 건강한 부모-자식 관계를 파괴한다.

 

아들을 '리틀 남친'으로 두고자 하는 엄마들은 대개 남편이나 남친에게 채울 수 없는 감정적 욕구를 아들에게서 원하기 때문에, 본인 역시 엄마보다는 여친으로서나 어울릴 언행을 보이게 된다. 감정적으로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명백히 보호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잊고 있기 때문에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결정적으로 아들의 제대로 된 성장에 필요한 것은 베풀지 못한다. 아들이 한낱 미성숙한 피부양자인데도 제대로 된 교육과 훈육을 하기보다는 '리틀 남친'의 프레임에 따라 아들을 성인처럼 대하거나 본인이 의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놓게 된다. 아들의 성장을 돕지도 않고, 성장을 오히려 방해하거나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특히 아들이 또래 여성과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게 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엄마가 이상적인 엄마 자리에 있다면 사실 한국에서 '고부갈등'이라 불릴 만한 문제의 대부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가 엄마의 자리에 있지 않고 여친/아내의 자리에 있으려 하기 때문에 아들의 여친이나 아내에게 필요 이상의 적대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아들들 역시 엄마와 아내를 구분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아내를 자꾸 '엄마' 포지션에 두려는 수많은 퇴행성 성인 남성들이 대개 이런 관계의 산물이다.

 

딸을 '친구'라고 표현하는 엄마들 역시 유사한 문제가 존재한다. 이러한 표현 역시 딸에게 명백히 보호자여야 할 본인의 임무를 망각하고 방기하는 것을 부추긴다. 특히 아직도 딸 차별이 만연한 한국에서는 이것이 딸을 자식으로서 사랑하거나 보호하지 않는 엄마들의 행동에 대한 훌륭한 연막 개념이 되어준다. 문자 그대로 딸을 완벽하게 친구 취급하면 엄마는 딸에게 아무런 의무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부양해야 할 이유도, 사랑해야 될 이유도 없다. 주지하다시피 '친구'는 하물며 '남친'처럼 독점적인 관계도 아니다. 너무나 흔해빠진 단어이며 심지어 서로 질투하고 괴롭히면서도 별 생각 없이 '친구' 관계라고 생각하는 관계도 넘쳐난다. 긍정적으로만 해석하면 부모로서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친근하고 민주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뜻이라고 보이겠지만, 부정적으로만 해석하자면 딸은 자식도, 혈연도, 가족도 아닌 남 취급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 고급 메타포로 사용하기보다는 이 표현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 뒤에 숨어 자신의 책임감을 방기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전문가들도 실제 정말 '친구같은 부모'는 좋지 않다고 조언한다. 친구 역할은 친구가 하게 두고 부모는 부모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아들을 남친으로, 딸을 친구로 두려는 엄마들은 대체 '친구 역할을 친구가 하게 두고 부모는 부모의 역할을 하라'는 게 무슨 뜻인지조차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관계란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도구일 뿐이고, 그러한 도구적 관계는 모두 선을 넘는 것이 특징이라 서로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엄마들을 많이 관찰할 수 있는 82쿡 같은 사이트에서는 '동성 친구가 많거나 자매와 사이가 좋으면 딸 필요 없다'는 식의 괴상한 논리가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논리적으로는 자식인 딸, 동성 친구, 자매는 모두 개별 관계로서 연관성이 없으며, 없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를 내세우는 이들은 자식인 딸, 동성 친구, 자매가 모두 자신에게 동일한 '기능'을 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관련 포스트: 모든 나르시시스트 부모와의 관계는 근친상간적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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