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우리 엄마 불쌍해 증후군: 2인자 나르시시즘과 희생의 특권화 본문
최근에 인터넷에서 '우리 엄마 불쌍해 증후군'이라는 표현이 쓰이는 것을 보았다.
"우리 엄마 불쌍해."
"우리 엄마 호강시켜드려야 해."
익숙한 말이다. 마치 사회적 본능처럼 한국인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이 표현은 때로 농담처럼, 때로는 진지한 다짐처럼 쓰인다. 부모의 희생을 기리고, 보답하겠다는 선한 마음. 이 문장들 속에는 언제나 ‘효’라는 이름의 도덕적 명분이 깃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말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착하고 도덕적인 말이니까.
그러나 과연 그럴까?
1인자 나르시시즘이 자기중심적 세계관에 근거한 타인 착취 체제라면, 2인자 나르시시즘은 내가 아닌 타인 중심적 세계관에서 자신이 기여하는 역할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이 핵심이다. 불완전한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내세우기보다는, 자신보다 더 위대한 존재에게 자아를 의탁하고 대리만족을 통해 욕구를 채우는 것이다.
https://dirtmentalist.tistory.com/190 <2인자 나르시시즘과 신앙의 힘 - 왜 두목보다 행동대장이 더 지독한가>
지난번 포스트에서 다룬 '2인자 나르시시즘'의 심리는 종교 집단이나 거대 사회 조직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가정 내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으며, '우리 엄마 불쌍해 증후군'은 바로 그런 2인자 나르시시즘의 전형적 사례 중 하나이다. 본인이 직접적으로 오만한 태도를 보이거나 권력을 행사하지는 않지만, 더 위대한 존재인 엄마를 내세워 간접적으로 자신을 특권적 위치에 올려놓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타인이 '우리 엄마 불쌍해'라는 주장 자체를 수용해주는 한, 그 엄마의 자식이 하는 행동은 그것이 '엄마를 위해서'라는 명분이 있는 이상 뭐든 정당화가 쉬워진다.
우리 엄마 불쌍해라는 말은 어떻게 특권 의식이 되는가
이 말을 습관적이라 할 만큼 자주 내뱉거나 중요한 인생 결정 단계마다 내세우는 사람의 세계관을 단순한 효 사상이나 인간적 연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맥락맹의 판단이다. 보편적인 효 개념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라면 '엄마들의 희생은 위대하다', '모든 엄마들은 효도를 받아야 한다'는 식의 표현을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우리' 엄마 불쌍해라는 말은 결국 우리 엄마만 불쌍하다, 또는 적어도 우리 엄마가 상대적으로 더 불쌍하다는 배타적인 의미를 더 강하게 내포한다. 어떤 식으로든 다른 집과는 다른 우리집만의 특징이라는 생각이 없다면 할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 엄마 불쌍하다고만 했지 다른 집 엄마 불쌍하지 않다고는 안 했다'는 한국식 궤변을 늘어놓을 사람들이 많겠지만 '엄마'를 '강아지'로 바꿔보라. '우리 강아지 불쌍해'라는 말이 '세상 모든 강아지가 불쌍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보이는가? 그렇다면 문해력이 빵점이니 초등학교를 다시 다닐 것을 권한다.
'우리 엄마 불쌍해' 심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상대성과 배타성이다. 남의 가정에는 적용되지 않고 내 가정에만 적용시키는 철저히 사적인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우리 엄마 불쌍해'에서 배타성을 읽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워낙 효 사상이 한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보편 사상이기 때문에 대상이 '엄마'라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어서이다. 상대는 분명히 '우리 엄마'라고 말했는데 거기에서 '우리'는 빼고 '엄마'에만 집중해 본인이 알아서 보편적 의미를 덧붙여주는 것이다. 듣는 사람 쪽에서 알아서 보정해주는 일종의 착각이다.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착각을 이용해 사실상 자기 가족 중심적 사고를 보편 도덕률처럼 타인에게까지 인정받으려는 의도를 깔고 있다.
실제 현실에서 저 말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살펴보라. 자기 엄마가 어떤 인생을 살았든 타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개 이 말은 자기 엄마가 특별히 불쌍하기 때문에 자신이 해야 하는 어떤 특별한 선택(때로 비상식적이거나 비합리적이거나 극단적이거나 보편 도덕률에서 크게 어긋나기도 하는)에 대해 정당화하고 심지어 타인에게 그 비용 분담을 강요할 때 쓰인다. 제아무리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엄마를 가졌다 해도 자기 언행이 제3자에게 이상하게 여겨질 염려가 없거나, 그 사람의 이해관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황이라면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다.
이 말을 쓰는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엄마가 남들보다 유독 더 힘든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흔히 이런 삼단논법으로 이어진다.
"우리 엄마 불쌍해" → "우리 엄마 특별해" → "나도 특별해"
그토록 특별하게 (다른 집 엄마와 달리) 고생한 '우리' 엄마의 인생에 보상을 안겨 줄 행동의 주체가 바로 자식인 나이기 때문에 나 역시 다른 집 자식과 다른 규칙을 적용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특별한 고생을 한 특별한 우리 엄마에게 어울리는 특별한 보상을 어떻게 안겨드릴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이 돈을 밝히면 속물이지만 내가 돈을 밝히는 건 특별한 엄마의 특별한 고생을 보상해드리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 덕분에 옳은 행동이 된다. 다른 사람이 승진을 위해 비리를 저지르면 개새끼 범죄자이지만 특별한 우리 엄마가 나의 승진을 염원했다면 그건 엄마의 고생을 보상해주기 위한 행동이므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안 그런가? 엄마를 신격화하는 순간, 그 희생의 후계자로서 자신도 예외적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다.
이런 심리를 가진 사람들은 흔히 희생을 통해 특권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단순한 정서적 연민을 넘어, "우리 엄마 불쌍해"라는 말로 면제권과 특권적 위치를 요구하는 것이다.
"난 돈 못 내. 우리 엄마가 힘들어하셔서 도와드려야 해."
"내가 힘든 건 너희가 이해 못 해. 우리 엄마만큼 고생한 사람이 어디 있냐?"
"내가 우리 엄마 불쌍하다고 말 했어 안했어? 넌 공감 능력이 없니? 우리 엄마 호강시켜드리지 말자는 거야 지금?"
어떤 자리에서든 책임을 면제받고, 의무를 지지 않으며,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 말이 사용된다. 아마 현실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경우를 꼽으라면, 기혼자들이 자신의 배우자에게 리모컨 효도를 강요하거나 자신의 본가에 대한 특별 대접을 요구할 때일 것이다.
한국의 수많은 현실 속 인물들은 물론 드라마, 영화의 캐릭터들이 그런 식으로 미화되고 정당화되어왔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타인의 인권을 짓밟고도 질질 짜며 가난한 어린 시절과 불쌍한 부모 및 가족 이야기를 팔아먹으며 자기 행동의 정당화는 물론 동정심과 응원까지 덤으로 가져가려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었는가. 이런 정당화를 용인해주는 이들은 보편 도덕률이나 시민적 상식에 대한 개념과 분별력 없이 쉽게 감정적으로 타인에게 1인칭적 빙의를 하고, 이를 '공감 능력'으로 포장한다. 실제로는 본인도 착취 대상이거나 속여넘겨야 할 제3자 박수부대에 불과한데, '효'의 외피만을 입은 사이비 종교식 2인자 나르시시즘을 보편 도덕률이나 인간미로 착각해 마치 자기 일처럼 지지해주는 바보같은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는 종교 광신도들이 교리를 내세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자신이 직접 위대한 존재가 될 수는 없지만, 위대한 존재의 후계자 또는 그에게 봉사하는 자라는 정체성을 통해 특권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결국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결과로 이어진다.
희생을 신봉하는 자는, 결국 스스로 희생된다
'우리 엄마 불쌍해'를 외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한다. 희생을 통해 정체성을 구축한 사람들은, 그 희생을 계속 유지해야만 존재 의미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그 이미지를 유지해야 하는 '엄마'들은 온전한 주체성을 갖지 못하고 오로지 남에게 동정심을 긁어내야만 하는 비련의 캐릭터를 연기하다가 인생을 보내게 되고, 그 자식들 역시 그에 보답하는 자신의 특별한 위치에 취해 있다가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실패한다.
"나는 왜 이러고 살고 있지?"
"왜 아무도 내 희생을 알아주지 않지?"
"내가 엄마를 위해 희생했듯, 나도 똑같이 희생하는 삶을 살게 되는 건가?"
희생은 권력이 아니다. 권력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희생을 권력으로 착각한 사람은 결국 희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희생과 도덕을 끊임없이 물화시키고, 스펙화하고, 화폐화한다. 무형적 가치를 환금성 있는 것으로 물화시키는 것은 도덕적 타락의 극치이다.
2인자 나르시시즘에 빠진 광신도들이 결국 자신을 소모하며 살다 사라지는 것처럼, 가족에 대한 희생을 정체성으로 삼은 사람도 결국 아무런 보상 없이 희생의 늪에 갇히게 된다. 사이비 교주가 아닌 모든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칭송하는 '엄마'라는 존재를 대상으로 삼는다고 해서, 특별함에 대한 의존 심리와 자아 의탁이 당신의 인생에 끼치는 악영향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또는 자신의 가족이 세상 보편 원리에서 벗어난 무언가 특별한 존재들이고 그래서 남들에게 그 지위를 인정받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심리는 그 '특별함'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든 병든 심리일 수밖에 없다. 자아 정체성을 선민의식으로 꽉 채운 자의 사상은 정명석이나 이만희같은 교주를 모시지 않는다 해도 사이비 종교 신자의 그것과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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