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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러면 내가 뭐가 돼? - 강요 과잉과 강요 망상증 본문

흙멘탈리스트/한국인의 행복과 불행

네가 그러면 내가 뭐가 돼? - 강요 과잉과 강요 망상증

Dirt Mentalist 2024. 11. 4.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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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미국인들이 정답 있는 문제에서조차 각자의 답이 있다고 우기는 게 문제라면 한국인들은 반대로 정답 없는 문제에서조차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라는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정답 있는 문제에도 없다고 우기는 미국, 정답 없는 문제에도 있다고 우기는 한국 https://dirtmentalist.tistory.com/16)

 

모든 문제에서 하나의 정답, 최소한 가장 좋은 답이 있을 것이라 믿는 태도는 대인관계에서 많은 마찰, 충돌, 갈등을 일으킨다. 답이 딱 하나이기 때문에 같은 문제에 대해 서로 상이한 답을 내놓고 끝나는 상황은 있을 수 없다. 반드시 하나로 합의를 보거나 어느 한 쪽이 파문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논쟁이 인신공격으로 번진다. 논쟁에서의 승리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내적 논리로 결판이 안 나면 메신저 공격까지 동원해서라도 상대방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A: "야, 영화 @@@@ 봤냐? 진짜 죽이지 않냐?"

B: "보긴 했는데, 난 별로. 넌 재밌었어?"

A: "야, 그게 어떻게 재미없을 수가 있냐? 주인공이 다 때려부수는 거 시원하지 않아?"

B: "글쎄, 내가 보기엔 좀 설정이 유치하던데. 현실감이 없어서 시원한 줄 모르겠더라."

A: "그게 현실감이 왜 없어? 네가 세상 물정을 모르니까 그런 거지. 세상 물정을 알면 그게 현실감이 없을 수가 있나?"

B: "그러는 너는 맨날 이상한 사람들하고만 놀아서 그런 개판이 현실적이라고 느끼냐?"

 

위와 같은 상황은 영화의 설정이 현실적이냐 아니냐라는 매우 주관적이고도 소소한 문제에 대한 대화가 순식간에 상대방의 도덕관, 윤리관, 정치관, 지능, 인격, 취향 수준 등에 대한 모욕적 검증과 난도질로 이어지고 큰 싸움으로 번지는 미련한 양상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은 위처럼 의견이 갈리는 상황 초기에 서로 말조심을 하면서 싸움을 최대한 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꼭 상대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이런 정답 없는 문제로 싸우는 것이 본인에게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득 될 게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되지 않는데도 의견 차이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급발진을 한다면 평판에 심각한 손상이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의견 차이의 순간에 조심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의 생각을 샅샅이 검증하려 들고 거기에서 빌미를 찾아 발끈하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는 이같은 싸움의 기회를 일부러 찾아다니거나 긁어부스럼 격으로 싸움의 기회를 창조하기까지 하는 갈등 중독 성향의 이들도 적지 않다. 사소한 개인 취향에서조차 늘 베스트 정답은 하나이므로 그것을 찾아내고 관철시켜야 정의가 구현된다 믿기 때문이다. 갈등 중독자들에게는 무엇에서든 의견 차이를 찾아내고, 그 의미를 침소봉대하고, 최대한 악의적으로 해석해 상대를 잔인하게 조롱하는 것이 일종의 '사이다 서사'와도 같다.

 

한국인의 과도한 타인 통제욕구도 이와 관련이 있다. 모든 문제에 대해 정답이 하나라고 믿으면 타인의 인생 결정에 참견을 안 할 수가 없다. 왜? 타인이 오답을 택할까봐 걱정되어서?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타인의 결정때문에 내 선택이 오답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한국인들은 지인 중 누군가가 자신과 '다른' 생각 또는 행동을 한다고 감지하는 순간 긴장도가 높아진다. 둘 중 하나는 결국 파문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서로 '다른' 상태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타인의 결정을 그저 나와 무관한 타인의 결정이라고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문화에서는 문화적 강압도 흔하고, 그만큼 강요가 아닌 것을 강요로 착각하는 강요 망상증도 심하다. 상대방의 '다른 의견' 자체를 강요처럼 느끼니까 실제로는 강요당한 상황이 아닌데 강요로 느껴 반발하고, 그런 자신도 상대방과 '다른 의견'을 내세우고 있으니 타인에게는 강요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인터넷에서 논쟁이 일어났을 때 단순 비판을 검열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가 자신의 의견을 비판하기만 해도 '검열하지 말라'고 반발하는 것이다. 검열의 정의가 무엇인가? 검열은 공권력이 집행하는 것만을 검열이라고 부른다. 물론 소셜 미디어 시대에 여론 재판도 못지 않은 결과적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은 맞고 여기에 '검열'이라는 개념이 어울리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민간 영역에서의 현상을 '검열'이라 표현하는 것은 문학적 비유이지 정확한 용법은 아니다. 특히나 일방적으로 따돌림당하거나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닌데 단지 누가 자기 의견을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검열'이라고 말하는 것은 피해자 코스프레 또는 망상에 가깝다.

 

이 망상이 더 심하게 발전하면 남이 자신을 직접 비판한 것도 아니고, 단지 자신과 다른 선택이나 결정을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무언가를 강요당했다고 여기게 된다. '네가 그러면 내가 뭐가 돼' 심리는 그런 강요 망상이다. 남의 다름 자체에 위기감을 느끼고 이를 공격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자신의 선택이 정답이 아니게 될까봐 스스로 압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그 압박감이 내부적인 것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외부를 탓하고 싶기 때문에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자꾸 강요받았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누가 정답인가? 또는 최고인가?

정상성 고지전은 제로섬 게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한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정답이 없거나 복수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게임이 끝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각자가 내적 만족 상태로 살아가는 세상이 은근히 '재미 없는' 세상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은 소위 '도파민'이 쏟아지지 않는 세상이다. 정답이 없으니 강렬한 괴로움도 없지만 내가 정답자가 될 수도 없으니 강렬한 보상도 없는 은은하고 일관된 세상. 이것은 한국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서사이다. 그러나 그 서사를 새로 익히지 않는 이상, 숏폼을 끊고 틱톡을 끊어도 전두엽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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