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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러는 걸까요 - 매사에 자아를 의탁하고 심각해지는 한국인

Dirt Mentalist 2023. 12. 18.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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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딱이라 생생하게 기억하는 10여년 전 한국 사회 분위기 중 하나로 스티브 잡스에 대한 숭배 열풍이 있다. 스티브 잡스에 대한 숭배와 우상화는 한국에서만 일어났던 일은 아니고 전 세계적인 트렌드이기는 했지만 모든 트렌드가 그렇듯이 로컬화되었을 때는 그 지역만의 새로운 맥락과 특색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스티브 잡스 숭배 열풍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 세계적이었던 스티브 잡스 숭배 열풍에 가미된 한국만의 로컬 맥락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삼성 vs 애플'의 대립 구도이다. 요즘에는 많이 안 쓰이는 말인 듯하지만 당시에는 애플 제품 지지자들을 '앱등이'로, 반대로 삼성 제품 지지자들을 '삼엽충'으로 비하하기도 했다. 당시 삼성과 애플의 법정 공방으로 인해 더 불이 붙었던 이 대립 구도에서 더 '트렌디'한 입장으로 여겨진 것은 애플에 대한 지지였다. 이는 단지 트렌디하고 예쁜 애플 제품을 향한 취향의 문제는 아니었다.

 

은근히 애플의 승리를 바라는 이들 중에는 애플이 한국 대기업인 삼성의 경쟁 업체라는 이유만으로 애플의 '창의적' 인상에만 초점을 맞추어 마치 애플이 자본주의적 착취와 무관하며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는 기업인 것처럼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 1955년생인 스티브 잡스가 그 세대의 다른 많은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한때 경도되었던 히피 문화에 대한 영향력도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과장 및 미화되었다.

 

두 번째, '성공한 기업인' 잡스보다는 '위인'로서의 스티브 잡스 숭배 현상이다. 아무리 스티브 잡스 열풍이 전 세계적이었다 해도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이 미국인들에 비해 먼치킨 캐릭터에 대한 환상과 열망이 훨씬 강해서인지 한국에서는 유독 잡스를 대단한 예언자이자 선각자로 보는 시선이 두드러졌다.

 

잡스의 '인문학'에 대한 언급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인문학에 대한 낭만적 선망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안 그래도 '인문학적 소양'을 운동권적 맥락에서 강조하던 한국 586 세대의 특유의 기조와 맞물려, 인문학이 마치 정치적 올바름과 자본주의적 성공을 동시에 모순 없이 보장해주고 추구할 수 있게 해 주는 도깨비 방망이인 것 마냥 이상한 오해와 환상을 퍼뜨렸다.

 

즉, 한국에서의 스티브 잡스 숭배는 단순히 제품에 대한 선호 취향이나 성공한 유명 기업인에 대한 관심 수준이 아니었다. 앱등이들에게 스티브 잡스는 자본주의의 대장이자 정치적으로 올바른 의병장이었고, 위너이면서 동시에 언더독이었고, 속세에 통달한 기업인이자 속세를 초월한 예언자였다. 한국인들의 인상 비평에서 잡스는 최고의 점수를 획득했고, 그래서 모든 이미지의 장점만을 뭉쳐 만들어낸, 실상 논리적으로는 앞뒤가 안 맞는 가상 인물에 가까웠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죽음 직후 출간된 그의 전기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는데 시의성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출판사가 일정에서 무리를 했는지 번역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걸 인터넷에서 웬 아마추어(자칭) 번역가가 지적했는데 문제는 이게 단순한 번역 지적이 아니라, 마치 '일점일획 왜곡이 없어야 하는 위대한 메시아의 경전을 망쳐 놓은 한국 번역계 기득권(?)의 횡포와 음모'처럼 포장되었다는 것이다. 한겨레 신문 같은 유명 일간지마저 그런 프레임을 그대로 받아 먹어 기꺼이 지면 기사를 작성했고, 인터넷에는 잡스 팬들의 공분과 울화가 넘쳐났다. 책을 찢어 던져버리고 몇 시간을 목놓아 울었다는 둥, 한국 사회를 용서할 수 없다는 둥.

 

블랙 코미디가 아닐 수가 없다. 심지어 번역 지적 중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 무리한 사항도 많았다. 선정적인 헤드라인을 선점하기 위한 과장이었을 것이다. 물론 한 번 삐뚤어지기로 작정한 잡스의 팬들은 그런 것들을 눈여겨 보지 않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과연 '스티브 잡스 전기 오역'이 그렇게까지 치명적인 울분을 살 일이냐는 것이다. 시쳇말로 그게 그렇게 '한 쳐먹을 일'인가. 물론 불평할 수도 있고 리콜 요청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대단한 비리도 아니고 고작 일정에 쫓긴 출판사의 완성도 낮은 일처리가 본질인 사건을 두고 책을 찢고, 통곡을 하고, 한국 사회를 탓하고...감정에 옳고 그름은 없다지만 이런 것은 당사자들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 과잉 양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문제의 근본 원인은 스티브 잡스에 대한 지나친 신격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도한 자아 의탁에 있었을 것이다. 실상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미국 자본가 스티브 잡스를, 자신이 한국 사회에 가진 모든 불만에 대해 사이다스러운 일격을 먹인 영웅으로 해석하고 그 맥락으로만 세상을 보니 그 일이 그렇게 원통하고 억울하고 수상했을 것이다. 

 

여러번 언급했지만 이런 현상 역시 한국인이 지나치게 피해자 서사에 익숙해서 벌어지는 일이다. 모든 일이 너무도 심각하고 치명적으로 보이고, 모든 맥락에서 내가 억울한 피해자라는 실마리를 찾아내려 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한을 풀어줄 의탁 대상을 찾아 덮어놓고 지지하고 등등. 요즘엔 옛날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사이다 서사에 대한 집착과 온라인 키보드 배틀의 양상을 보면 한국적 서사의 원형은 아직도 공고해 보인다.

 

자아에 대한 불안을 엉뚱한 곳에 풀려고 할수록 자아 의탁은 심해진다. 사활을 걸고 자신이 선택한 모든 것의 명예를 지키려고 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 내가 덕질하는 가수, 내가 어제 산 옷, 내가 오늘 점심에 먹은 메뉴까지, 내가 택한 것이 최고여야 하고 남들이 그것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는 집착이 생긴다. 내가 좋아하는 건 남들도 좋아해야 하고, 내가 싫어하는 걸 남들도 싫어해야 한다. 안 그러면 눈이 뒤집어져서 자기가 원하는 대답이 나올때까지 스토커마냥 괴롭히고 집착한다. 자기만의 망상 속에나 존재하는 연결 관계를 통해 무식하고 무례한 억측을 하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방탄소년단 응원을 안 하다니 토왜냐?'

'<바비> 따위나 보러 가고 개딸이냐?'

 

자신이 선택한 모든 것을 변호하면 안정감이 느껴질 줄 알고 하는 짓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이다. 온갖 것을 다 변호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되니 전선은 확장되고 적은 늘어나고 집중력은 분산된다. 본인 인생만 살아도 시간이 모자란데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경쟁자도 신경 써야 하고, 내가 산 물건의 품질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강변해야 한다. 왜 수당도 안 받고 남의 홍보 알바를 해주는가?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것에 실제보다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는 심리 자체만으로도 정신 건강에는 해가 된다. 굳이 고르자면 차라리 살짝 반대인 경우가 정신 건강에는 더 좋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에 자아를 심지 말고, 모든 것에 심각해지지 말자. 본인이 생각하기엔 아무리 용납할 수 없는 대립 같아도, 맥락만 조금 바꾸어 생각하면 '김치찌개 vs 된장찌개'처럼 아무것도 아닌 대립일 수 있다. 무엇보다 나는 나이고 남은 남이다. '나=내가 먹은 된장찌개=내가 지지하는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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