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신동과 천재에 대한 환상 - 가성비 집착 문화의 산물 본문
한국은 신동과 천재, 그 중에서도 특히 신동에 대한 환상이 심한 나라이다. 그 이유를 키워드 하나로 정리하자면 가성비 때문이다. 아직까지 한국인들은 가성비에 미쳐 있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에서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소비자 후기를 국가별로 정렬해보면 절대 다수의 한국인 리뷰에 '가성비'라는 개념이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 영어로 번역된 버전을 보면 죄다 동일인이 쓴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다.
구매에서 가성비를 따지는 것이 가격 대비 성능에 대한 것이라면, 인생에서 가성비를 따지는 것은 노력 대비 성과에 대한 것이다. 즉, 한국에서 천재에 대한 환상이 심한 것은 인생에서 노력 대비 높은 성과를 원하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다. 최선의 노력을 하는 대신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뽑아내려 하고, 사채 이자 마냥 부가가치가 기대 이상으로 붙은 보상을 원한다는 것이다. 신동에 대한 환상은 천재 선호 경향의 농축 엑기스 버전이다. 노력 뿐 아니라 소요 시간도 최대로 단축하고, 빠른 시일에 빠른 결과를 보길 원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될성 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
한국인들이 아무 근거도 없이 신앙처럼 믿고 맥락도 없이 아무렇게나 적용하는 '조상님들 말씀' 역시 여기에 기름을 붓는다. 나이 좀 먹었다는 한국인들은 섣부른 타인 품평의 대가들이다. 사람을 한 번 딱 보면 총 견적이 나온다 생각하고, 누군가의 어릴 때 모습을 잠깐만 봐도 미래까지 다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잘못된 뜬소문들도 섣부른 판단에 단단히 한 몫을 한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될성 부른 나무가 떡잎부터 티가 나지 않는 경우도 많거니와, 어딘가에서 티가 난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알아볼 능력이 없다. 천재는 되기만 힘든 게 아니라 알아보는 것도 힘들다. 당신은 수학에 세기의 천재성을 띤 사람의 수학 공부 노트를 보면 그 내용을 이해해서 그의 천재성을 알아챌 수 있는가? 아니라면 그 사람을 일상생활 속에서 알아볼 수 있다는 생각도 접는 것이 좋다. 천재의 핵심 분야 활동을 보고도 까막눈인 사람이 어떻게 그 사람의 다른 면모를 보고 천재성을 가려낸다는 것인가? 젓가락질을 어떻게 하는지 보고? 청소를 얼마나 잘하는지 보고?
천리안과 선견지명 신봉자들에게는 실망스럽겠지만 '천재'는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누군가가 새로운 무언가를 들고 나와 인류 문명을 진일보시켰을 때 사후적으로 붙여주는 명칭이라는 것이다. 그 전에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 틀에 맞춰 재해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후적으로 붙여진 '천재'라는 명칭에 맞게 이미 재해석된 위인들의 어린 시절, 젊은 시절의 모습마저도 사실은 제각각이라 일반 대중이 보길 원하는 패턴은 보이지 않는다. 천재로 알려진 이들의 학교 성적, 아이큐, 성격, 생활 습관, 취향, 성장기 발달 과정은 모두 제각각이다.
무언가의 가능성 여부와 크기를 최대한 빨리 측정해서 신속하게 등급별로 분류하고, 노력 대비 성과가 가장 좋은 최적의 지점을 찾아 딱 그만큼의 노력과 시간만을 들여 가장 높은 순이익률을 추구하겠다는 생각은 투자자의 마인드이다. 일부 한국 부모들의 신동에 대한 집착에는 자식을 투자 대상으로 보는 마인드가 강하게 깃들어 있다. 일반적 착각과 달리 '가성비' 투자 마인드의 부모는 절대로 투자 대상이 '최고로' 잘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이엔드로 갈수록 노력 가성비는 떨어지는 것이 보통이라 이 구간으로 진입하는 것은 '가성비' 차원에서 별로 남는 장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인 천재보다도 신동에 더 환상을 가지는 이면에는 이런 계산이 있다. 최고를 추구한다기보다는 자식이 빨리 최적 순이익률 구간에 진입하길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모든 타인은 언제든 '나'를 도구화할 가능성이 있으며 부모 역시 그렇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이런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하면 스스로도 스스로의 성장 기간과 기회 비용을 참아주지 못하는 가성비충이 되고 마는 것이 문제다. 물론 일부러 비효율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기 인생, 자기 존재에서조차 분별 없이 가성비를 추구하게 되면 작은 계산으로 따질 수 없는 큰 결정을 그르치게 된다.
한국인 중에는 일시적으로 자신이 하는 일의 효율이 좀 떨어지거나 기간이 예상보다 좀 오래 걸린다는 이유만으로 성급한 포기 결정을 내리거나, 재능 없다는 평가가 두려워서인지 전력 투구를 피하고 순수하게 스스로의 '타고난' 자질과 운명만을 테스트하듯 심드렁하게 찔러보는 태도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많다. 효율이 중요하니까 당연하다고? 그런데 이건 조금만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태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효율성이 떨어지면 뭘 어쩔 것인가? 나를 도구로 이용하려는 타인이야 나를 두고 테스트하듯 깔짝거리다가 가성비 안 나온다고 버리고 떠나면 그만이다. 그런 착취적 타인에게는 내가 얼마나 가성비 좋은 인간인지가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을 떠날 수 있는가? 스스로의 인생에 들이는 돈과 시간과 노력이 그렇게 아깝다면, 영화 아바타 마냥 그 자원을 대신 투자할 다른 여분의 인생이나 정체성이라도 가지고 있는가?
'내가 비록 명문대를 가진 못했어도 머리는 좋아서 공부 시간에 비해서는 공부 잘 한 편이었다.'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인데 여태까지 최선을 다 안 했을 뿐이다. 언제든 내가 선택만 하면 최고가 될 수 있다.'
'쟤는 나보다 성과가 좋긴 하지만 난 멀티태스킹을 했고 쟤는 죽도록 하나만 팠는데 겨우 저 정도니까 내가 더 낫다.'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이런 회로를 돌리면서 실제 인생이 아닌 '상상 속 잠재력'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특별한 천재나 신동이 아닐까봐, 가성비 쩌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현실 속 견적을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가성비보다 실제 행동으로 나타난 성취도이다. 언급했듯이 노력은 하이엔드로 갈수록 가성비가 안 좋아지고 대부분의 가성비충들은 목표치가 '최선'이 아닌 '최선의 가성비'이기 때문에 웬만한 시점에서 노력을 그만두기 일쑤이다. 남에게 미련하게 보이기 싫으니까 금방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에 시간을 쓰는 것을 질색한다. 그렇다면 가성비가 좋아 남은 그 시간은 어디에, 누구에게 쓰게 되는가? 그 가성비의 이익은 최종적으로 어디로 갈까?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가성비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역사상 그 어떤 천재도 실제 성취가 아닌 '잠재력'으로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당신이 아인슈타인보다 머리가 2배 좋은데 노력을 아인슈타인의 1/10만큼밖에 안 해서 지금 이 모양이라고 말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반면에 아인슈타인보다 머리가 나빠도 그보다 더 훌륭한 연구 성과를 내면 노벨상을 받을 것이다. 남보다 좀 더 길게 공부해서 시험에 합격했든, 남보다 돈을 좀 더 들여서 건강을 회복했든, 어차피 다른 옵션이 없는 단 하나의 인생을 위한 것인데 그게 그렇게 아깝고 원통하고 치명적으로 짜증나는 일일까? 그건 주체적인 시선이 맞을까? 비효율성에 아깝고 짜증이 나는 것은 다른 투자 대상이 있을 때나 유효한 감정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그럴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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