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사기 사건을 보는 관점 본문
조금 지나면 금방 식을 휘발성 강한 이슈라고 생각하지만, 최근에 터진 유명 스포츠 스타와 관련된 사기 사건에 대한 화제성은 가히 폭발적이다. 더불어 '사기'에 대한 이야기와 의견도 여기저기에서 많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사기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속여넘기는 과정이 어떠했을지에 대한 호기심, 궁금증, 추론 등이 줄을 잇는다.
이미 '사기'라고 딱지가 붙은 상태에서 매체를 통해 사건을 접하는 제3자는 '어떻게 저런 사람한테 속을 수가 있어?', '어떻게 저런 거짓말에 속을 수가 있어?'와 같은 생각을 하기 쉽다. 이번 사건은 특히 그러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려고 작정이나 한 듯, 직관적으로 봤을 때 황당무계해보이는 설정 일색이다. 아무리 사기 사건이 많은 한국이라 한들 웬만해서는 속이는 항목에 들어가지고 않고 잘 속이기도 힘들다고 생각하는 부분까지 속였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성별을 속였다는 게 그러한 황당함을 느끼게 하는 가장 큰 부분인데, 심지어 사기꾼으로 지목된 사람은 성별을 이리저리 바꾸며 사기를 치기에는 피지컬 조건이 별로 적합해 보이지도 않는다. 어떻게 그런 조건에서 올림픽 메달까지 딴 유명인을 속일 수가 있었을까. 이런 의문은 종종 사기를 당한 사람의 판단력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대체 어떤 바보가 저런 거에 넘어가?'
소프트뱅크의 손정의는 삼척동자가 봐도 아무런 사업 비전이 없는 WeWork 같은 회사에 투자했다가 거액을 날렸다. 사기 아이템으로 공중분해된 테라노스의 전 창립자인 엘리자베스 홈즈가 자신의 사업에 끌어들인 유명인은 래리 엘리슨 같은 벤처 업계 큰 손 뿐 아니라 헨리 키신저, 빌 클린턴 등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정치계 큰 손까지 아우른다. 미국의 레이건 전 대통령은 소련과의 관계나 냉전 종식과 같은 굵직한 사안에 대해 점성술사의 조언에 의지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 스토리 속에서 '바보같이 속아넘어간 사람들'은 사회에서 크게 성공한 이들로 여겨지며 지금도 비교적 건재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이해가 안 가는가? 나 같으면 절대 안 속을 것 같은가?
사실 위와 같은 사기 사건들은 일단 속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정말 순수하게 속은 것인지, 아니면 공범의 면모가 있는지를 외부인으로서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공범의 면모가 있다고 해도 정말 어느 정도까지 지분이 있는 것인지 명확히 밝혀지는 경우는 드물다. 때문에 단순히 속은 사람들이 '멍청해서 속았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100% 공범이라고 몰아부치는 게 정확하다고 할 수도 없다.
아마도 상당수의 경우는 아무리 유명인이라 해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특정 부분에 대한 무지를 이용해 상대를 이성적으로 속이는 한편, 그럴싸해 보이는 미래 계획과 전략에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야망과 환상을 부추기고, 상대방의 현재 상황에서 절박하거나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잘 포착한 심리적/감정적 약점을 공략하는 등 여러 가지를 복합적으로 자극한 결과일 것이다. 이 중 딱 한 가지 요소 때문에 속는 경우도 있겠지만 사람의 정신이 생각보다 분절적으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게 한꺼번에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기꾼이 굉장히 복잡한 전략을 효과적으로 구사하는 천재로 보일지 모르겠는데 그렇지는 않다. 의외로 대단해 보이는 사기꾼들도 초기부터 속내를 간파당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세상은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소수가 걸려들게 되어 있고 그러면 사기에 성공하는 것 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그저 법적 조치만 취하지 않도록 하고 자신의 활동에 직접 방해만 안 되게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럼 어떤 '소수'가 사기꾼에게 걸려들까? 이건 사기꾼 종류에 따라 다르다. 전청조와 애덤 뉴먼은 종류가 다른 사기꾼이고 따라서 속아넘어가는 사람의 종류도 다르다. 똑똑하면 똑똑한대로, 멍청하면 멍청한대로, 스펙이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누군가에게 속게 되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사기꾼은 상대가 의존하고 있는 바로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때문이다. 야망이 넘치는 사람에게는 욕심을 부추기고, 야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안정성에 대한 갈구를 자극하는 식이다. 그 어떤 종류의 사기에도 넘어가지 않을 완벽한 사람 같은 것은 존재하기 힘들다.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속일 수 있는 완벽 사기꾼이 존재하기 힘든 것과 같다.
사기 피해자를 타자화해 조롱하는 것은 대개의 피해자 비난 논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존 능력에 대한 자기위안적 상찬인 경우가 많다. '난 적어도 저런 거엔 안 속아', '난 절대 사기 같은 거 안 당하는 사람이야' 같은 생각을 하면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안정감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물론 사기꾼 논리의 허점을 인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자의식 펌프질로 이어지면 곤란하다. 뭐든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통찰을 결여한 지나친 타자화는 경계하는 것이 좋다. 타인에 대한 지나친 타자화는 본인의 특별함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과 동일하다. '나는 속을 사람이 아니'고 '나는 그런 운명이 아니'라는 믿음은 이성적 사고 절차의 중요성을 경시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붕 뜬 사고방식이야말로 사기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약점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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