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님아 그 도마 위에 올라가지 마오 - 평가 대상이 되는 것의 위험성 본문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왼손을 펴보시라. 그리고 검지와 약지의 길이를 비교해보시라. 검지가 더 긴가? 아니면 약지가? 아니면 비슷한가? 한 연구에 따르면 왼손의 검지와 약지 길이 차이가 적을수록 IQ가 높아지는 상관관계를 보인다고 한다. 즉, 통계적으로 검지와 약지 길이가 비슷할수록 IQ가 높고,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길수록 IQ가 낮은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태아 시절에 모체 내에서 노출된 호르몬의 성분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당신은 위 단락을 읽는 중 어떤 행동을 했는가? 아무리 짧은 찰나 동안이라도, 자신의 검지와 약지 길이 차이를 유심히 살펴보고, 이게 차이가 큰 건지 작은 건지 자문해보고, 웬만하면 최대한 두 손가락 길이를 비슷하게 보려고 애쓰지는 않았는가?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거나 모종의 이유로 IQ 따위 신경 쓸 기분이 아닌 경우를 제외한다면, 이런 정보를 접했을 때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참고로 위 내용은 그냥 지어낸 것이다. 위와 같은 연구나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강의 같은 것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트릭 중 하나. 강의를 질문이나 평가로 시작하면 수강생들의 긴장감과 집중력을 단기적으로나마 기계적으로 높일 수 있다. 특히 수강생의 나이가 어릴수록, 질문/평가의 내용이 어렵거나 자신의 무지를 드러낼 가능성이 높을수록, 강연자의 태도가 권위적일수록 더 그렇다. 심지어 강연자에 대해 시니컬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조차 조금은 유순하게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이왕이면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 평가가 어떤 것이든간에.
이것이 바로 평가 대상화의 힘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무형적으로든 유형적으로든 수많은 평가를 받고 살아간다. 토익 점수부터 동기들 사이에서의 평판까지, IQ부터 체지방률까지, 오늘의 소셜 미디어 포스트 좋아요 숫자부터 혈중 알코올 농도까지, 모든 게 일종의 평가 인덱스이고 이 총합은 우리의 자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외부인이나 사회적 기준에 의해 매겨진 모든 점수와 평가와 숫자를 뺀 자신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평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특히 남의 평가에 신경을 많이 쓰고 학교 성적이 중시되는 사회를 살아온 한국인이라면.
평가 대상화는 일상에서 비교적 손쉽게 권력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유용한 트릭 중 하나이다. 첫 번째 단락처럼 몇 초 만에 지어낸 테스트만으로도 아주 잠깐은 사람들이 자신을 평가하고 의심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실제 측정한 자신의 IQ를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와 무관하게 왼손 검지와 약지 길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들은 순간 서운한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다. 이는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정서적 약점과 자아 불안이 생성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런 순간에는 자기 확신이 떨어지고 각종 영업과 사기에 취약해진다. 장기화되면 당연히 위험해진다.
모니터링은 발전의 필수 요소이므로 당연히 모든 평가가 나쁜 것은 아니다. 자기 객관화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자기 대상화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평가와 평가 기준도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개중에는 쓸모 없는 것도 많고 심지어 타인을 착취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개발된 사악한 것들도 있다. 사이비 종교나 이상한 약물을 팔아먹기 위해 접근해 '안색이 안 좋아보이시네요', '기가 약하신 것 같은데'와 같은 '평가'를 내리는 것이 좋은 예다. 이처럼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하는 평가, 의도가 불순한 평가, 기준에 합리적 근거가 없는 평가 등은 믿지 않아야 하고, 이왕이면 아예 들을 기회조차 원천 차단하는 것이 좋다. 상대의 평가에 숨은 프레임과 의도를 분석하는 것도 내 인생의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정말로, 차라리 낙제하는 게 나은 평가 기준들이 존재한다. 꽤 그럴듯해 보이는 평가, 남에게는 중요한 평가 중에서 나한테는 하등 쓸모 없기 때문에 신경 안 써도 되는 평가 기준은 더 많다. 사실, 본인이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핵심 가치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거의 대부분 나와는 상관 없는 평가 기준이라고 보는 편이 인생에서 시간 낭비를 줄이는 길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모범생으로 길러진 사람들일수록 전 과목 A+를 맞겠다는 학생의 심정으로 인생에서 접하는 모든 평가에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남이 자신에게 대해 나쁘게 평가하면 평가 자체가 정당한지 따져보기 전에 LED 불빛에 달려드는 고양이처럼 어떻게든 그 평가를 만회해보려고 쩔쩔 매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이 진짜 집중해야 하는 코어 태스크는 뒤로 하고 갑자기 난입한 무자격자의 평가에 따라 자아상을 뒤집고, 오늘의 계획을 수정하고, 심지어 장기적 인생 항로까지 뒤튼다. 이렇게 하면서 이것을 완벽주의라고 착각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건 완벽주의가 아니고 비판적 사고가 마비되어 남들이 세뇌하는대로 움직이게 컨디셔닝된 상태라고 봐야한다.
자신에 대한 평가와 대상화에 대해서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것이 좋다. 있어야 할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있어야 할 것만으로 최소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평가와 대상화는 필연적으로 정신적 취약함을 만들어내지만 좋은 모니터링이 만들어내는 취약함은 다른 말로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유연성을 뜻한다. 반대로 의도가 불순한 평가는 평가 대상을 먹잇감으로 보는 사냥의 한 과정이며, 대상자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거미줄과도 같다.
적어도 성인이라면, 어른의 평가에 절대적 생존을 의지하고 있는 어린이가 아니라면, 평가 결과에 휘둘리기 전에 평가의 신뢰도와 의도부터 따질 수 있어야 한다. 필요 없는 평가라면 도마 위에 아예 오르지 않는 게 남는 장사이다. 본인을 자꾸 랜덤 테스트 대상에 올리는 것은 실익 없이 인생의 리스크만 높이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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