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모든 일이 사적이라 보편화가 안 되는 이들 본문
예전에 한 몇 년간 우연히도 유독 조씨 성을 가진 유명인들이 한국에서 자주 문제가 되는 것 같은 시기가 있었다(그래봐야 고작 손에 꼽을 만큼이지만). 아마도 유독 시끄러웠던 사건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 스캔들이었을텐데 그 어떤 게시판을 봐도 끝없는 조만대장경에 대한 풍자가 넘쳐날 때 가끔 조씨라는 성씨 자체를 문제 삼는 이들이 있었다. 물론 이게 조국 스캔들과 관련해서 별로 중요한 여론이었던 건 아니지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성씨니 관상이니 혈액형이니 MBTI니 하는 것들에 미신적으로 집착해서 이를 판단 기준으로 삼으려는 건 한국인들의 사라지지 않는 보편적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편견은 사회에서 공적인 아젠다로 채택되기는 힘들어도 의외로 개인의 일상 속에서는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조씨들이 유독 문제인 것 같아요."
이런 웃기는 판단 기준이 등장했을 때 '성씨로 사람을 싸잡지 말라'는 지당한 반박이 나오면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한국식 대응이 있다.
"뭐죠? 조국 편드시나요?"
"본인이 조씨라서 찔리나 봄 ㅋㅋㅋㅋ"
여기에 아니라고 하면 믿지도 않거니와 한층 더 괴랄한 논리가 등장한다.
"아니라면 왜 발끈하시죠? 그럴 이유가 없는데?"
"본인이 조씨라서 찔리는 거 아니면 진심 반박할 이유가 없지 않나?"
이런 사람들은 '조씨들이 문제'라는 주장 자체가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어서 지적당했다는 생각은 신기하게도 전혀 하지 않는다. 본인이 연루된 게 아니라면 저 주장에 찬성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니까 조국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김씨나 이씨는 '조씨들이 문제'라는 주장에 찬성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 모든 사람들이 모든 문제를 좁디 좁은 사적 맥락에서만 파악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막말로 '난 김씨니까 조씨 욕은 내 욕이 아니고, 내 욕만 아니면 상관없다'는 사고 회로만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대부분 당연하게도 본인이 그런 좁디 좁은 사유화의 사고 회로를 가진 사람이다. 이들은 만물의 척도가 자신의 이해관계와 정체성이고, 세상 만사를 죄다 자신의 사적인 문제로 사유화해서 생각한다. 본인이 그러니까 남들도 그렇게 할 거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보편적인 논리와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 본인이 최씨라면 '김씨들은 멍청하다', '이씨들은 재수없다', '박씨들은 못생겼다' 같은 주장이 사회에 넘쳐날 때에는 주장 자체가 아무리 말이 안 되어도 문제를 못 느끼고, 심지어 타인을 까며 자신이 높아지는 기분에 손해 볼 거 없다 싶어 신나게 동조하다가 '최씨들은 거짓말쟁이다' 같은 주장이 등장하면 그때서야 억울하다며 목놓아 울어제끼기 시작하는 격이다.
정말 좆병신같아서 설명할 필요조차 못 느낄 수준의 논리력인데 문제는 이런 식의 몰이도 여론 지지를 좀만 받으면 아무렇지 않게 합리적 주장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데 있다.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논리적으로 무언가를 비판하기보다는 그냥 남을 욕하고 배제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집단 소속감을 강화하고 생존을 보장받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순수 논리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그리고 정말 해당 스캔들에 대한 정의 실현을 중요한 문제라고 여기는 것이 맞다면, 문제가 된 특정 조씨가 아니라 전체 조씨로 비난 대상을 확장시키는 것은 논쟁에서 절대 유리하지 않다. 조국의 스캔들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머리채 잡아 끌고오는 것은 쓸데없이 전선을 확장하고 적을 늘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논점 이탈로 초점을 흐리게 만들고 집중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당연히 현재 문제가 된 일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런 식의 전선 확장을 밀어부치는 이들이 많은 이유는 자신도 행동 여부에 따라 언제든 걸려들 수 있는 보편적 논리에 기여하는 것보다, 자신이 걸려들 위험이 없어보이는 선천적이고 고정된 정체성 따위로 최대한 많은 이들을 배제시켜 생존 경쟁력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욕망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기회주의적 경쟁자 제거 본능이 발동되는 것이다. 물론 인터넷상에서 특정 성씨를 욕하는 글을 올려댄다고 해봤자 진짜 유의미한 사회적 보상이 돌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겠으나, 인간의 더러운 사회적 본능은 때로 순간의 우월감을 가장 큰 이익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러한 기회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집단적인 배제 시도는 끊이질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한국인 열 명 중 세 명은 이 글을 읽고 분명 내가 최씨한테 원수진 조씨라고 확신할 것이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봤자 믿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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