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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멘탈리스트/한국인의 행복과 불행

'남의 의견'과 '객관적 의견'은 다르다

Dirt Mentalist 2023. 3. 9.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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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이라는 개념은 현 시대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럼에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합의된 객관성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 문명 유지를 위해 포기할 수 없는 행위이기도 하다. 결국 어떤 기준이 있어야 판단을 내릴 수 있고,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관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결정에는 기회비용이 있게 마련이고 이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가장 큰 깨달음이기도 하다. 

 

한국인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한국인의 특성 중 하나로 '남의 눈을 의식한다'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 남의 눈치를 많이 본다, 남이 하는 건 다 하려고 한다, 다들 똑같은 유행만 따르려고 한다 등등이 다 비슷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살펴보면 자기가 느끼는 감정마저도 남에게 '이게 맞는 건가요?'라고 확인하듯 묻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인터넷에서 조언을 구하기에는 영 부적절한 고민 글도 자주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잘 아는 분야/사안에 대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정말 어이없는 답변이 쏟아지는 경악스러운 상황 속에서 '제발 저 조언 듣지 말라'고 속으로만 외친 적도 여러 번 있다(가지고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 아이디가 없다).

 

한국인은 왜 남의 의견에 많이 휘둘리는가. 여기에 '자신감이 없으니까', '주관이 없으니까' 식으로 대답하는 것은 동어반복이다. 왜 한국인은 자신감이 없고 주관이 없는지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상당수의 한국인이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대상화시켜 평가 대상으로 놓고 '남'들은 전부 심사위원의 자리에 올려놓는 비합리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관은 왜 생기는 걸까? 기본적으로 어릴 때부터 개인/아동 존중이 모자라는 문화 속에서 훈육과 교육을 빙자한 모욕과 후려치기를 듣고 자란 탓이 크다. 젊은 세대일수록 이 경향은 덜하고 특히 지금처럼 출생률이 저조한 시대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그런 말을 들을 가능성이 적겠지만, 현재 사회 중추를 담당하고 있다는 40대만 해도 국가에서 출산을 줄이라고 강조하던 시대에 태어난 에코 베이비 붐 세대라 머릿수가 어마어마하다. 따라서 40대 이상 세대는 사회에서 '너 아니라도 일할 놈 많아', '너 하나 잘못돼도 세상 멀쩡하게 잘 돌아가' 따위의 말을 수시로 듣고 자란 세대이며, 타인 시선의 내재화가 굉장히 심하다. 그리고 이들의 문화는 아직도 당연히 2030 청년 세대에 영향을 미친다.

 

대놓고 대체 가능한 소모품 취급을 받는 데 익숙해져 스스로를 타자화하게 된 이들은 조금이라도 타인에게 나쁜 평을 듣게 되면 원초적 생존 본능이 자극되어 멘탈이 나가 버린다. 백 번 양보해 그 '타인'이 정말로 자신에게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직장 상사나 감독관이라면 그나마 여기에는 실제적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스스로에 대한 대상화가 내재화되면 실제 권위가 있는 사람에게만 휘둘리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모든 평에 휘둘리게 된다. 하다 못해 웬 랜덤 미친놈이 길을 지나다 내뱉은 의미 없는 욕지거리에 대해서도 '내가 왜 그런 말을 듣게 되었을까'를 과도하게 해석하다가 저 혼자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감이 없어졌다고 생존 욕구와 본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감은 없는데 강한 생존 본능은 그대로이면 자의식만 비대해진다. 코어가 흔들려서 불안하니까 껍데기만 웃자라는 것이다. 나 자신의 중요성을 스스로 무시하는 자기 경멸이 내재화되면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오로지 '남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목표가 설정된다. 그런데 '남의 눈'이라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다 보니 그 목표를 위해 달리다 보면 종종 이게 맞는 건지 헷갈리고, 주기적으로 번아웃이 오고, 더 기가 막히게는 '남'이 한 사람이 아니다 보니 남들끼리도 시선이 달라 이랬다 저랬다 지시하는 방향이 계속 달라진다. 결과적으로 잡히지 않는 것을 잡아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공회전하다 고장나는 엔진 마냥 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남'이 어떤 존재들인가? 그 사람들도 '나'보다 특별할 것이 없는 한 명의 유한한 인간일 뿐이다. '남의 의견'과 객관적 의견은 다르다. 나 자신의 의견은 주관적인데 남의 의견은 덮어놓고 객관적일 것이라고 믿는 것은 심각하고 위험한 오해이다. 그 사람의 의견도 한 사람의 주관적인 의견일 뿐이다. 타인이 나보다 특별히 잘나고,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러면서 나와 이해 관계도 전혀 부딪치지 않고, 나에게 성심성의껏 진실만을 말해줄 것이라는 신뢰를 할 만한 분명한 이유가 없다면(심지어 이 모든 것을 충족해도 그 사람 역시 한계가 있는 사람일 뿐이다) 당신은 그 사람의 말을 참고해서는 안 된다. 

 

권한도 없는 놈에게 거절당하지 말 것.

- 엘레노어 루즈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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