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피해자 코스프레의 나라 본문
한국인들의 과도한 피해자 코스프레 문화를 볼 때마다 한 인기 남초 커뮤니티에서 몇 년 전에 우연히 클릭했던 글의 내용이 떠오른다. 글의 내용은 팀장인지 과장인지 하여간 조금 직책이 있는 상사가 새로 들어온 여성 직원을 '못생겼다'는 이유로 싫어하는데 다만 당사자 앞에서는 절대 티 내지 않고, 부당 대우를 한 적도 없다, 그저 남직원들하고만 못생겼다고 뒷담화를 하고 점심 먹을 때 못생긴 여자 있으면 밥맛 떨어진다면서 다른 직원들하고만 점심 합석을 하는 정도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런 것도 직장 내 괴롭힘이나 부당 대우라고 볼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질문도 웃기지만 댓글 꼬라지는 더욱 가관이었다. 그 중 특히 2개가 눈에 띄었는데 하나는 '안 그래도 사회 생활 힘들고 피곤한데 남자가 밥 하나 편하게 못 먹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사람이 점심이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어야죠'였다.
마치 예쁜 여자와 밥 먹는 게 남자의 당연한 기본권이라도 된다는 듯한 괴랄한 전제부터, 대놓고 왕따를 시켜놓고 '이것도 직장 내 괴롭힘이냐'고 묻기까지 하는 멍청한 판단력까지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닌 상황이지만, 이런 명백한 상사 갑질 상황에서조차도 순식간에 상사를 밥 한끼조차 제대로 편하게 못 먹는 청순가련 희생양으로 묘사하면서 감정 이입을 통해 자기 연민을 드러낸 댓글러들의 피해자 코스프레 전략은 그야말로 한국적 문화의 화룡점정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담이 아니고 이 정도 수준의 자기 연민이 진심이라면 정신병원에 가야 한다. 정신병원에 가서 제때 치료를 못 받으면 곧 감방에 가거나 법정에 설 운명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진심이든 아니든 한국에서는 이런 화법이 생각보다 일반적이다. 한국인들은 너도 나도 피해자 코스프레 전략을 구사한다. 불행 배틀 올림픽에서 우승하기 위해 죄다 기를 쓰고 울상을 짓고 나 죽는다며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 위의 사례에서 '못생긴 여자와 밥 먹기 싫다' 또는 '예쁜 여자하고만 밥 먹고 싶다'는 것은 그냥 개인의 욕망이다. 그런데 솔직하게 욕망 위주의 화법을 쓰면 지지를 못 받을 것 같으니까 갑자기 피해자 포지션의 화법을 구사한다. 같은 회사 동료의 외모를 비하하고 왕따를 시키며 남한테는 지옥의 현장을 유발해놓은 명백한 가해자가 갑자기 '밥 하나 내가 먹고 싶은대로 편히 못 먹고 고생하는 불쌍한 직장인'으로 둔갑한다. 네로 황제에 빙의한 듯한 전근대적 욕망의 표출이 갑자기 절체절명의 서민 가장 생활고 내러티브로 변하는 순간이다. 아마도 여기에 이 특정 상황과 전혀 상관 없는 가해자 당사자의 구구절절 개인 사정 읍소가 덧붙여지면 더욱 환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개인 사정은 타겟층의 버튼을 누를 것이 확실시되는 도식적이고 식상한 것일수록 좋다. 연로하신 부모님 생활비를 대느라 허리가 휘어요, 자식 새끼들 유학 보내느라 퐁퐁에 기러기 가장이예요, 하우스푸어라 대출금 상환이 너무 어려워요 어쩌고 저쩌고. 논리적으로야 애초에 문제가 된 상황과 아무 상관도 없고 타인이 연민을 가질 이유가 없는 일기장 수준의 징징거림이지만, 동일한 욕망을 가진 사람이 많으면 지지를 받게 마련이다. 엄연한 피해자는 따로 있지만 무슨 상관이랴. 여론전 승리로 가해자가 거꾸로 '피해자'라는 숭고한 타이틀을 가져가는 건 의외로 흔한 일이다.
한국인들은 이렇게 자신(또는 자신과 동일한 욕망/상황을 가지고 있어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해서는 피해자 코스프레 전략을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한편, 타인(또는 자신과 다른 욕망/상황을 가지고 있어 타자화하는 대상)의 피해자 포지션은 극혐한다. 피해자 코스프레가 사회의 주요 생존 전략이니만큼 그에 대한 검열과 혐오도 만연하다. 나보다 그 전략을 더 잘 쓰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해관계가 겹치고 캐릭터가 겹치니 경쟁 관계가 되는 게 당연하고, 그러니 남이 피해자 포지션에 있으면 색안경을 끼고 거의 신경증적으로 해부하려 든다. 본인이 코스프레 개수작을 부린 적이 많으니 남도 그럴 것이라 추정하게 된다. 그렇게 스토커 수준으로 남을 해부하다가 조금이라도 상대방이 자기보다 잘난 부분이 있거나, 자기 생각만큼 초라하지 않으면 '진짜 피해자가 아니'라고 목이 터지도록 외쳐댄다.
그래서 한국에는 실제 피해자 코스프레가 많은 만큼, 잔인하고 부당하게 코스프레 낙인을 찍고 마녀사냥을 유도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이 어떤 면으로는 '피해자' 입장에 과도한 감정이입을 하는 문화임에도 실제 피해자나 약자들이 정말로 살기 좋은 사회라고 볼 수는 없는 이유 중 하나이다. 사회 주요 생존 전략이란 건 어떤 종류든 언제나 강자들에게 유리하다. 아무리 그 사회의 문화가 겉으로 봤을 때 '약자/피해자 멘탈리티'에 휘둘리고 있는 것 같아도 이것이 실제로 약자/피해자가 살기 좋은 사회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정말 그랬다면 애초에 그 사람들이 약자/피해자가 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막말로 '약자에게 더 유리한 주류 사회'라는 건 형용모순이며 존재할 수도 없다(그리고 이는 탁월한 정치질 실력을 가진 소수 몇몇이 어쩌다 약자/피해자 정체성을 비롯해 여러 사회 고정관념의 유리한 점만을 활용하여 과도한 이익을 취하거나 독점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사회적 강자는 물리력이나 경제력에서만 우위를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 내러티브와 개념을 둘러싼 여론전에서도 유리한 고지에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가난, 피해자, 약자 정체성 도둑질도 쉽게 해낸다(한국의 흙수저들이라면 누구나 중산층/상류층의 가난 개념 도둑질에 어이가 없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결국 피해자 코스프레로 이익을 보는 쪽이 도리어 가해자/기득권인 경우가 매우 많아진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논리와 무관하게 '동일한 욕망을 가진 사람'이 많으면 여론전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가해자/강자마저도 피해자/약자 코스프레를 생존 전략으로 삼는 것은 식민지 경험에 익숙한 국가 특유의 현상이다. 제국의 경험이 많은 국가에서는 이와 상반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미국인들이 곧 죽어도 'victim'이라는 단어를 거부하는 것이 전형적인 사례이다. 미국인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강함과 생존력을 어떻게든 드러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피해자 코스프레가 사회의 주요 생존 전략이 될 수 없는 문화라 그렇다. 실제로 어떤 사건의 피해자라 하더라도 피해자 '멘탈리티'를 드러내는 것을 꺼린다. 진심이 아니더라도 습관적으로 나는 그래도 살아남았다, 나는 그래도 강하다, 나는 그래도 행복하다를 외친다. 그렇게 했다간 '너 살만하구나' 싶어서 지지를 거두고 대신 질투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이 넘쳐나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문화이다. 미국에서는 제아무리 심각하고 부당한 피해를 당한 피해자라 할지라도 희망의 실마리가 보이는 이들만 존중과 동정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결론을 내리자면,
각각 약함과 강함을 드러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양쪽 문화의 탄생에 다 그럴듯한 역사적 배경이 있고 장단점이 다르지만
멍청이 버전으로 가면 둘 다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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