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미국식 강약약강 vs 한국식 강약약강 본문
보잘 것 없는 위치에 있었거나 초라한 신분 배경 등을 가졌던 사람이 모종의 성취를 통해 사회적 위치가 바뀌었거나 훌륭한 스펙의 소유자로 변모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에 주변인의 반응와 태도 변화를 도식적이지만 크게 3가지로 분류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예전에는 무시하다가 이제 인정해주고 친해지려는 경우
2. 변화가 없는 경우(위로나 축하 등을 할 때 보이는 자연스러운 감정 톤 변화 제외)
3. 어렵던 예전 시절보다 오히려 잘 된 다음에 (더) 서먹해지거나 적대적으로 되는 경우
쉬운 정답이지만 가장 이상적인 반응은 2번이다.
1번과 3번은 둘 다 불쾌한 경우이지만 그 결이 다른데, 사람들이 보통 쉽게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1번과 같은 태도이다. 막말로 힘들 때는 외면하거나 무시하다가, 좀 잘 되었다 싶으니 떡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잘 보이려 하고 친해지려 하는 전형적인 강약약강 태도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생각은 맞다. 승자의 편에 서고 싶어하고 화려한 쪽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것은 기회주의적 강약약강 태도로, 당연히 진정성 있는 소통 욕구가 아닌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발현되는 태도이다. 3번은 사실 1번에 비해 언급도 훨씬 덜 되고 그래서인지 비난과 불쾌감의 대상으로 이야기되는 경우도 훨씬 적다.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후(대략 대학 입학 후) 만났거나, 서로 개인사를 잘 모르는 사이인 경우에는 대개 상대방의 겉으로 보이는 상황에 따라 1번과 변화를 보이는 경우가 더 많다. 표면적이고 얄팍한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3번과 같은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3번과 같은 태도를 표출하는 이들은 대개 알고 지낸지가 상대적으로 오래된 사람들, 또는 당사자의 어려운 시절을 가장 자세히 목격한 사람들, 또는 선천적인 출신 성분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ex. 혈연, 지연) 가운데서 많이 나타난다. 문제는 3번과 같은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1번의 사례보다 수는 더 적을지 몰라도 위험성 면에서는 더 위험하다는 데 있다.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3번의 태도 역시 강약약강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언뜻 거꾸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3번의 태도 같은 경우는 1번과 동일하게 강자에게 잘 보이려 하고 약자를 무시하지만 '강자'와 '약자'에 대한 기준이 1번과 다르기 때문에 태도가 정반대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어떻게 다르냐고? 쉽게 말해 1번 태도가 강/약을 나누는 기준을 후천적 성취에 둔다면 3번 태도는 이 기준을 '타고난 신분'에 둔다. 즉, 1번 태도가 누군가의 성취에 대해 그 사람이 예전에 약자였다고 해도 이제 강자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잘 보이려 하는 것이라면, 3번 태도는 누군가가 강자인지 약자인지 여부는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으며 그 뒤의 성취가 그것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이 애초부터 무시하던 사람이 어떤 발전을 하게 되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3번 유형의 경우, 자신이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누군가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어색하다, 안 어울린다는 식으로 느끼게 되는데, 그나마 감정이 거기에서 그치면 그래도 양반이다. 이들은 심한 경우에는 타인의 변화와 발전을 주제 넘음, 오만함, 부도덕, 하극상, 사회 비리, 심지어 신성 모독으로까지 연결시키기도 한다. 근거는? 천차 만별이다. 가장 흔해 빠진 것으로는 타고난 관계('부모인 내가 널 가장 잘 알아'), 출신 계급('가난한 집 출신이?'), 학벌('형편 없는 대학 나온 주제에'), 성별('여자가?'), 어릴 때 기억('급식 시절에 병x같았던 주제에'), 예전 기억('너 원래는 게을렀잖아') 등이 있지만 때로는 너무 자의적인 페티시 수준으로 황당한 경우도 많다(ex. 젓가락질을 저렇게 이상하게 하는 사람이 성공을 하다니 믿을 수 없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걸음걸이조차 야무지지 못한 사람이 무슨 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저런 자리에 올라가다니 말도 안 된다).
나르시시스트 부모인 경우에는 하다못해 자식의 생물학적인 성장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자식은 부모 앞에서 아기로 보인다'는 식의 말이 애정이나 관심이 아닌 위계질서 면에서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자식이 아무리 성장을 하고 성인으로서 이런 저런 성취를 해도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식을 자신보다 약하고, 무지하고, 무능력한 존재로 취급한다. 자신이 전적으로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던 자녀의 어린 시절을, 자녀에게 영구적으로 수치심을 심어줄 수 있는 일종의 '흑역사', '약점', '태생적 신분 한계' 따위로 간주하는 것이다.
세상이 패배자에게 각박하고 냉랭하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는 보통 1번의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 때문이다. 보통 미국과 같은 사회에서 유독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1번식 기회주의적 강약약강이다. 1번의 태도는 한국인들보다 미국인들에게 상당히 심하게 나타난다. 꽤 티가 나게 1번의 태도를 보여도 본인이든 주변인이든 그게 어느 정도는 정상적이고 당연하다고까지 여기는 수준이랄까. 승리를 찬양하고 패배자를 싫어하는 것을 인간 심리상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는 한국 특유의 깨시민적 평준화 심리가 없는 자본주의 끝판왕 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3번은 한국인들에게 좀 더 자주 나타난다. 이는 유교적 신분 질서 세계관에 586 세대 깨시민 정서의 자장이 심어 놓은 평등과 정의에 대한 강박이 기괴하게 결합된 결과로 보인다(*이 말은 좌파들이 주로 이런 생각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대부분의 한국인 무의식에 큰 영향을 끼친 586 세대의 자장은 좌/우파를 가리지 않는다). 상당수 한국인의 무의식은 '뿌리는 속일 수 없다' 따위의 말에 지배당하는데, 때문에 한 번 사람에 대해 평가를 하고 나면 이를 잘 바꾸려 하지 않는다. 특히나 꼰대들 중에서는 누군가의 출신 성분, 타고난 배경, 선천적인 특질과 같은 것의 일부를 바탕으로 남에 대해 (제멋대로) 점수를 매긴 후, 자신이 매긴 점수와 현실이 일치하지 않으면 갑자기 대단한 사회 비리를 목격하거나 하극상을 당한 것처럼 길길이 날뛰는 경우가 많다. 남의 미래가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한 번 낮게 평가한 누군가가 성공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날 경우에는 무언가 세상이 크게 잘못된 탓에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강자와 약자의 지위,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의 지위는 (양반과 쌍놈 신분처럼) 타고나는 것이지, 후천적인 노력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이 이러한 자신의 전근대적 세계관과 삐뚤어진 통제욕을 모종의 '정의감'으로 착각하기까지 하면 한층 더 위험 인물이 된다. 심할 경우 이런 생각은 혐오성 테러나 살인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1번과 3번 중 대처하기가 쉬운 쪽 역시 1번이다. 1번은 그야말로 내가 하기 나름으로 관계 조절이 가능하다. 또한 상대방의 행동을 좌우하는 요인이 비교적 외연적으로 뚜렷하게 보이는 편이다. 그러나 3번은 상대방이 대체 무슨 근거와 기준으로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 것인지 알기도 힘들고, 안다고 해도 이를 어떻게 내가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에 막말로 아무 대처를 할 수가 없다. 3번과 같은 태도를 지닌 사람은 그냥 연을 끊어버리는 것이 좋다. 1번 유형은 그냥 사회 생활을 위해 관계를 데면데면하게 유지한다 해도 그다지 큰 위험이 되지 않지만, 3번 유형은 곁에 둘수록 점점 더 위험성만 높아지는 백해무익한 존재이다. 1번은 그저 상황에 따라 있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도 다시 나타나는 인물에 불과하지만 3번은 내가 넘어져서 일어나려 할 때마다 다시 밀쳐 쓰러뜨리려는 존재, 남몰래 뒤에서 내 일처리를 망가뜨리거나 심지어 내 커피에 약을 탈지도 모를 존재이기 때문이다.
(노파심에 더하자면 한국이라고 해서 1번이 없고 미국이라고 해서 3번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경향성 차이가 있다는 뜻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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