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한국인의 미리 절망하는 습관 본문
꽤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한국인의 사고 특징 일면을 외국인의 그것과 1:1로 비교해 객관적으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던 경험이 있다. 어떤 서류를 외국 관청에 보내야 했는데 서류 기입 내용상 작은 실수가 발생해 그쪽에서 처리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실수 자체는 작은 것이라 그 해당 사항을 알리기만 하면 처리가 가능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원칙적으로 해당 담당자가 누구인지 정확하지 밝혀지지 않는 일이라 직접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고, 서류 처리 데드라인이 다소 급박한 일이었다.
나는 이 상황에 대해 정확히 동일한 설명을 하고 각각 한국인들이 모이는 사이트와 외국인들이 모이는 사이트에 조언을 구하는 글을 양쪽으로 올렸다. 한국인들이 모이는 사이트에 하루 정도 글을 먼저 올렸는데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대여섯 개 정도의 답변은 대동소이하게 모두 '아마 안 될 것이다', '포기하라'는 식의 결론을 내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해당 서류를 처리하는 조직의 내부 사정에 대해 한국인이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안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나름 확신에 찬 어조로 주장하는 답변도 있었다(물론 직접 소통을 하지 않는 해당청의 특성을 생각하면 아주 근거 없는 예측들은 아니었다). 그 사람들이 특별히 나보다 상황에 대해 더 잘 파악할 수 없는 경로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답변을 읽으면서 나 역시 어느 정도는 일 처리 결과에 대해 비관적인 결론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같은 질문을 영어로 올린 외국 사이트에 올라온 반응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답변을 한 이들은 모두 '해결책'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모든 답변은 '아무리 담당자가 누군지 몰라도 대표 번호가 있지 않느냐, 전화라도 해서 메시지라도 남겨라', '팩스 번호 있으면 무조건 긴급 상황이라는 제목을 달아서 눈에 띄게끔 서신을 보내라' 등 어떤 식으로든 연락을 취해서 상황을 알리라는 식의, 행동에 대한 조언만 하고 있었다. 일이 될 거라는 둥 안 될 거라는 둥 섣부른 예단과 추정을 하는 답변은 놀랍게도 단 한 개도 없었다. 이 엄청난 차이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던 나는 고민과 자책을 집어치우고 그곳의 조언대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행동에 나섰다. 이게 먹힌 것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서류는 원하는대로 다시 제대로 처리가 되었다.
이 경험은 나에게도 분명히 강하게 남아있는 한국인의 예단하는 습관, 특히나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방향으로 상황을 예단하고 추정하는 습관을 인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본적으로 예측과 추정은 추상화와 패턴화를 통해 우리에게 시행착오 경험을 건너뛸 수 있게 해주는 고급 사고 기능이지만, 심심찮게 과도한 통제욕 충족과 정신승리를 위한 손쉬운 도구가 되기도 한다. 불안 때문이든 게으름 때문이든 무언가 직접 해보기 싫거나 새로운 영역에 노출되는 게 싫으니까 자꾸 예측하고 추정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강박적으로 따지고 모든 상황에서 단 한 개의 정답 옵션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성향은 섣부른 예단을 한층 더 부추긴다.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자신이 답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떤 일이나 상황에 정해진 코스가 있으며, 자신이 그 코스를 훤히 다 내다보고 있다는 식의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 한국에는 유독 많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직접 만들어나가는 행동력보다 정해진 정답을 빨리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한국인의 사고 체계 속에서는 자신이 세상 물정을 잘 알고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자의식이 자존감의 큰 구성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 체계에서 유독 예측이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쪽으로 많이 기우는 것은 필연적이다.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예측은 시도와 행동을 불러오고(된다고 생각하는 일은 당연히 시도할 수밖에 없다), 안 됐을 경우에 그것이 실패로 기록되므로 '노력 대비 결과' 수치로 보았을 때 비효율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예측은 미리 절망을 선수쳐놓았기 때문에 밑져야 본전처럼 느껴진다. '노력 대비 결과' 수치로 보았을 때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타고난 먼치킨 캐릭터에 대한 환상이 많고 학창 시절부터 '공부 열심히 안 하는데 공부 잘 하는' 사람에 대한 올려치기가 습관이 된 한국인들에게는 돈키호테마냥 긍정적 예측을 동력 삼아 아득바득 칠전팔기하는 사람보다는, 미리 절망해서 노력도 안 하고 심드렁하게 신경 안쓰는 척 하다가 우연히 결과가 '생각보다' 좋게 얻어걸리는 사람이 훨씬 더 우아하고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 한국인들의 '미리 절망하기'는 대개 건강하지 못한 자기 방어 심리의 표출이다.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올 것이 무서워서 절망감을 선수치고는 '내가 미리 다 알고 있었다'는 통제감으로 일에 대한 실망과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미리 다 알고 있었다'는 거드름은 실제 일의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본인이 예측하고 있었다고 해서 실패의 결과가 경감되거나 해결책이 생길 리 만무하다. 순전히 심리적 자기 만족 외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인들의 정신적 에너지가 실제 일의 해결이나 실패 극복과 관련 없는 정신적 허영에 낭비된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렇게 절망감을 선수치면 일의 결과가 나오기 전에도 당연히 노력에 대한 동기 부여가 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과정에서도 최선을 다하지 않게 된다. 아직 행동 옵션이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보이지 않게 되거나, 심지어 보여도 회피하게 된다. 이게 장기적으로 습관이 되면 아예 최선을 다하는 것 자체를 못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심하면 일부러 최선을 다 하지 않아놓고 실패를 정당화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내가 머리는 좋아서 맘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는데 맘을 안 먹어서 못 한 거야' 라는 변명을 성립 가능하게 하기 위해 노력을 일부러 안 하는 어이없는 성향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부정적 '자기 예언적 충족'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이런 면에 대해서는 좀 더 결과론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일의 진행 과정은 나만 아는 것이고 나에게만 유의미한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결과가 중요할 뿐이다. 스스로의 불안감을 덜기 위해 알지 못하는 영역까지 억지 추론을 동원해 예측하는 대신,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일의 해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팔을 걷어부치고 하는 것이 더 낫다. 그것이 아직도 선비 문화에 젖어있는 한국인들의 눈에 조금 덜 우아하게 보일지언정 일의 결과에 실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언제나 행동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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