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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자연인이 아니다 - 득도한 척 하는 늙은 부모

Dirt Mentalist 2022. 9. 29.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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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인이다>는 대표적인 중년 남성(데모그라픽 통계상 대개 기혼이고 '가장'으로 불릴) 취향 프로그램으로 알려져 있다. 중년 남성 시청자 중에는 실제로 당장 실행에 옮기지 않더라도 이 프로그램에 나온 사람들의 삶(비록 하나로 묶기에는 스펙트럼이 다양하기는 하지만)을 동경/상상하거나 나중에라도 비슷하게 살아보겠다고 계획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듯하다. 이 프로그램이 중년 남성에게 어필하는 메커니즘은 제목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 프로그램은 시청자에게 '자연인'이라는 콘셉트를 통해 세속의 체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안빈낙도를 누리는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 의무, 책임 등에서 벗어나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실제 출연자의 면면을 살펴보면 거창한 카타르시스를 예고하는 이 프로그램의 제목은 기만에 가깝다. 과연 무엇이 진짜 '자연인'인가의 정의를 두고 심각하게 논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상당수의 출연자는 정말 세속을 벗어나거나 극복했다기보다는 자기 편의적으로 세속의 일부만 벗어나 있는 상태이거나, 은퇴 후 좀 더 특별한 전원 주택에 살고자 하는 매우 평범한 로망을 실행 중인 것에 불과하거나, 자기만의 이상한 이론이나 철학에 대한 인정욕구를 1인 왕국 건설과 같은 기인 행각으로 충족시키려는 상태이거나, 그도 아니면 그냥 사회에서 낙오된 사례에 불과하다. 보여주는 시각적 풍경에 비해 실제 정서는 그다지 탈속적이지가 않다는 것이다. 프로그램 제목의 '자연인'이라는 표현은 정말 현대 사회나 문화에서 벗어났다기보다는, 그냥 사회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사회의 공적 압력에서만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상태가 그 자체로 나쁘다거나, 그런 내용의 콘텐츠를 즐기고 소비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중년이 넘어가는 즈음부터 이 프로그램 제목의 '자연인'과 같은 콘셉트를 자기 편의적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다시 말해, 나이가 들수록 현대 사회는 피로하고 경쟁에도 지쳤고 이거저거 다 귀찮고 허무하니 세상 만사 다 무의미하고 고즈넉한 안빈낙도가 최고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주장하며 득도 코스프레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한때 자신이 세속적인 기준(성적, 학벌, 경제력 등)을 가지고 어지간히도 괴롭혔던 자식들에게도 느닷없이 '그딴 거 다 필요없다'며 자신의 갑작스레 변한 가치관에 맞춰 움직여주길 기대한다. 또한 본인도 젊은 시기에 집착했던 많은 가치나 행위를 추구하는 요즘 젊은이들을 손쉽게 손가락질하며 '어리석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본인이 늙어보니 자식 얼굴 많이 보는 게 최고라며 (한때 성공을 강요하던) 바쁜 자식에게 아무렇지 않게 업무 방해를 시전한다든가, 본인이 늙어보니 외모 따위 다 소용없다며 젊은이들의 외모 관리를 비난하는 식이다. 

 

노년기를 앞두고 정말 인생의 허무함과 소확행의 중요성을 깨달아 지혜로워진 것일수도 있지, 이걸 굳이 '득도 코스프레'라고 시니컬하게 칭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득도는 어떤 식으로든 세속의 유혹이 강하고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는 강박이 강하게 남아있던 젊은 시절에 했어야 진짜 득도지, 자신들 말마따나 '늙어서 다 소용없어진' 마당에 하는 것은 득도가 아니라 그냥 이해관계 변화이다. 이들이 (자식을 포함한) 젊은이들에게 노인의 지혜 운운하며 윽박지르는 '다 필요없어!'라는 코멘트는 '내가 여자친구가 없으니 세상 사람을 다 죽여야겠다'는 인셀 테러리스트 마인드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본인이 이제 인생에 남은 가능성이 없어 다 포기했으니 젊은 너희들도 다 포기하라는 요구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한국인의 일반적인 생애주기상 부모가 50대의 나이 정도일 때까지는 부모 역시 아직 세속적 욕심이 많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자식들에게 번듯한 사회적 위치, 남에게 자랑할 만한 소식들을 바라는 것이 보통이다. 자식들이 보통 어릴 때부터 경험한 부모의 기대치가 비슷하게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이를 더 먹어 완연한 노년기에 접어들면 그때부터 대개 부모의 욕구는 사회적인 것에서 보다 생물학적이며 원초적인 것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본인의 생명이 꺼져가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젊은 시절까지 유지하던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 신상의 변화 때문임을 정확히 인지한 상태에서 개인적인 선택을 바꾸는 것에 그친다면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현명한 처사일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심경변화를 무슨 대단한 깨달음으로 착각하고 현인이라도 된 것인 양 남들의 우선순위까지 바꿔놓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 부모일수록 이 경향이 극심하기 때문에 득도 코스프레도 극에 달한다. 젊은 시절에는 자식을 트로피로 만들기 위해 온갖 학대를 서슴지 않던 부모가 막상 늙은 다음에는 그렇게 트로피가 된 자식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성공이 다인 줄 아느냐', '돈이면 다냐', '그렇게 바쁘게 살아봤자 인생 허무하다' 등등 단편적으로만 보면 맞을 수도 있는 입바른 소리를 주워섬기지만 사실 알고 보면 성공이 다이고 돈이 다인 줄 알았던 것은 젊은 시절의 본인 모습인 경우가 많다. 본인은 이렇다할 반성도 없이 철저히 본인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을 바꿔놓고, 이제 와서 자식을 세속에 찌든 어리석은 인간으로 몰아부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본인의 실패와 가능성 없음에 대한 변명 욕구도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득도는 어느날 갑자기 '나 득도했다'고 선언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인 역시 '나는 자연인이다'라고 선언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내가 '득도한 자연인'이라는 것을 무기삼아 젊은이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그 어떤 욕구보다도 끔찍하게 세속적이다. 이런 욕구를 뻔뻔하게 내비치는 자들의 태반은 자연인이 아니라 그냥 낙오자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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