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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인 부모의 애정을 맹신할 수 없는 생물학적인 이유

Dirt Mentalist 2022. 8. 16.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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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

사실상 증명 가능하지 않은 이 명제가 이토록 맹신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일부 동물에서 관찰되는 새끼 보호/양육 모습을 보고 이를 사람에게 직접 적용해 부모의 자식 사랑을 '지능이나 교육 등과 무관하게 절대 지울 수 없는 생물학적 본능'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무언가를 먹고 싶어지고 졸리면 자고 싶은 것처럼 부모의 자식 사랑도 거부할 수 없는 필연이며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에서는 유교가 만들어낸 '혈통'과 '집안'에 대한 미신적 집착도 더해진다.

그러나 자연계에서 자신의 새끼에 대해 애착을 보이고 보호/양육하는 것은 정말 일부 동물에 그친다. 인간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동물 몇 개의 모습만을 보고 다른 종에 이를 직접 적용하는 것은 별로 과학적인 사고가 아니다. 물론 새끼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모습을 뚜렷하게 보이는 개, 고양이 등의 포유류가 알만 낳고 떠나버리는 물고기보다 인간과 근연 관계에 있고, 새끼를 적게 낳되 일정 양육 기간을 통해 새끼의 생존 확률(=부모 개체의 DNA 전달 확률)을 높이겠다는 전략을 공유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현재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서 부모의 자식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믿을 수 있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첫 번째, 새끼를 비교적 정성껏 돌보는 동물들도 모든 경우에 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반려동물의 새끼 출산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대부분 알겠지만 새끼가 태어난 후 어미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환경 관리를 해주지 않으면 어미 개체는 새끼들을 죽이거나 잡아먹기도 한다.

자신의 새끼가 분명한데 모종의 이유로 이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애착 형성에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길고양이 새끼가 멋모르고 귀여워하는 사람의 손을 타면 냄새가 달라져서 어미에게 버림받을 수 있으니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즉, 새끼에게 애착을 나타내는 동물들이라고 해서 자신의 새끼를 모든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지키는 것은 아니다. 어미 개체의 생존이 충분히 확보되고, 과도한 스트레스나 위협을 받지 않고, 자신의 새끼라고 알아볼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야만 새끼에 대한 양육이 제대로 이루어진다.

이를 인간에게 직접 적용해 보면 어떨까. 인간 역시 부모-자식 관계가 출생과 동시에 안정적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부모가 스트레스를 받거나, 좋지 않은 환경에 있다면? 자식이 자기를 별로 닮은 것 같지 않거나 미운 사람을 닮은 것처럼 보인다면? 주변인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출산이라면? 아이에게 눈에 띄는 단점, 병, 장애가 있다면? 이런 요인들이 자식에 대한 애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을까?

두 번째, 자연계에서 새끼를 정상적으로 돌본 이후 새끼가 성년에 가까워지면, 새끼와 부모의 관계는 해제된다. 야생에서 부모는 새끼를 두고 떠나거나 강제로 집단에서 퇴출시키는 경우가 많다. 집에서 돌보는 반려동물은 이것이 불가능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이상 새끼와 부모의 역할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동일하다. 서로의 원래 관계를 기억하지 못하므로 중성화 수술 등을 통해 관리를 해주지 않으면 근친상간이 일어날 위험도 상존한다(야생에서 부모가 새끼를 떠나거나 떠나게 만드는 것은 이를 방지하기 위한 행위라 볼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이 동물 사례를 통해 그토록 맹신하는 '유전자에 새겨진 부모의 사랑 본능'에 명백한 유효기간이 있다는 뜻이다. 각종 호르몬 등으로 인해 거부하기 힘든 '본능'이 만들어지더라도 이는 영원하지 않다. 자식이 성체에 가까워질수록 이런 생물학적 본능은 약화되고 어느 시점부터는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다.

진화론적 입장에서 당연한 귀결이다. 부모의 사랑이 생물학적으로 새겨진 본능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대로 '유전자를 퍼뜨리고 싶은 본능'이 자식 사랑의 본질이라면, 성체가 된 자식과의 연결/친밀함/집착/사랑은 이런 본능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생물학적으로 완성된 성체에게 부모란 필요 없는 존재이며, 부모 역시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려면 성체가 된 자식을 무조건 외부 세상에 내놓아야지 자신이 끼고 돌며 통제해서 좋을 것이 없다. 이런 행위는 자식의 독립(=번식 기회 생성)을 막고 근친상간의 위험성만 높인다.

이쯤 되면 '부모 사랑'교 맹신자들은 '생물학적 본능설'과 반대되는 '사람이 짐승하고 같냐!' 논리에 기대고 싶어질 것이다.

지당한 지적이다. 사람은 짐승과 다르다. 그래서 사람의 부모-자식 관계는 자연계의 생물학적 본능에 귀속시킬 수 없으며 그것만으로 설명해서도 안 된다. 부모-자식 관계는 인간 고유의 문명적 능력이 필히 개입되는 관계이며, 문화의 영역으로 해석해야 한다. 대뇌가 웃자라 가분수 운명을 사는 인간은 그 어떤 동물보다도 사회문화적 압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존재이다. 이는 종종 생물학적 본능과 생존 욕구까지도 침범할 정도로 강력하다. '본능이니까 누구나 똑같겠지', '본능이니까 영원하겠지', '본능이니까 예외가 없겠지', '본능이니까 당연하고 절대적이겠지' 이런 식으로 볼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성인이 된 자식과 부모 사이의 관계는 동물에서 관찰되는 생물학적 본능이니 진화를 위한 본능이니 하는 것과 무관하다. 자연계에는 이미 성체가 된 자식과 부모 간의 관계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의 독립과 결혼에 의견을 내고, 철마다 만나 인사를 받고, 손주 양육에 참여하고 이런 것은 전부 다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것이다. 성인이 된 자식과 부모 간 관계는 다른 생명체와 달리 인간의 대뇌가 유별나게 크기 때문에 기억으로 유지되는 것이며, 인간만이 가진 사회 문명 속에서 해석되고 만들어져 가야 할 관계이다. 때문에 부모가 다 큰 자식을 여전히 어린애 취급하거나, 아무런 변화 및 발전 없이 자식이 어릴 때의 관계를 그대로 가져가려 하면 충돌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문명 세계에서 문명 세계의 규칙에 따라 유지되어야 할 관계를 이미 없어진 생물학적 본능에 따라 유지되는 관계처럼 다루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문명인 세계에서 인간의 능력이 천차만별이듯 부모-자식 관계를 제대로 유지하는 능력 역시 천차만별이다. 어릴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성인이 된 자식에 대한 '애정'은 생물학적 본능에 의해 저절로 샘솟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문명인으로서의 자질과 직결된다. 이상적인 케이스를 기준으로 놓고 '모든 부모는 똑같이 자식을 사랑한다'는 말은 아인슈타인이라는 천재가 존재하니까 '모든 인간은 아인슈타인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다름없다. 배고프면 먹으려 하고 졸리면 자려는 본능은 모든 인간이 같을지 몰라도, 문명 세계에서의 문화적 능력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야생에서 독립한 새끼들은 부모 개체와 일부러 다시 만나는 경우가 없다. 어쩌다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어도 그건 그냥 성체 대 성체의 관계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세계에서 성인이 된 자식은 부모와 성체 대 성체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동물처럼 예전의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리거나 추억을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돌리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그렇게 해야 된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관계가 지속적으로 (좋게) 유지되려면 관계가 시간에 따라 적절하게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이든 부모가 말로만 자식 걱정을 하는 척하며 실제로는 점점 이기적이 되어가고 자식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하는 사례는 굉장히 많다. 장수 노인 중에는 자식이 먼저 죽어도 전혀 슬퍼하지 않는 경우도 꽤 있다. 심지어 악성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식/사위/며느리가 먼저 죽었을 경우, 생존 경쟁에서 젊은이를 이겼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부모-자식 관계의 생물학적 기억이 이미 사라진 상태에서 그 이후에 이렇다할 문명인 대 문명인의 관계를 수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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