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나르시시스트의 투사 전략 - 뒤집어씌우기와 정체성 도둑질 pt. 1 본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영화답지 않게 흥행이 매우 부진했지만 만듦새에 대한 평가가 좋았던 2021년작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1961년에도 만들어진 적이 있다. 그 작품도 당시 유명 감독과 배우가 참여한 대작이었고 결국 영화는 할리우드 고전으로 남았지만 전혀 몰입을 못 하고 봤던 기억이 있다. 개인적으로 뮤지컬 알못이라는 점, (뮤지컬인만큼) 다소 단순한 스토리 등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스필버그 버전의 최근작 스틸샷을 처음 본 순간 다른 이유를 하나 더 깨달았는데 그건 옛날 버전 영화의 색감(특히 배우들 얼굴에서 느껴지는)이 굉장히 이상해보였다는 것이다. 색보정이 잘못된 건가 의심하며 봤던 기억이 나는데, 알고 보니 이는 배우들을 백인 고정 관념 속 푸에르토리코계 히스패닉처럼 보이게 하려고 모두에게 동일한 톤의 메이크업을 적용해 '브라운페이스'로 만들어놓고 찍은 탓이었다. 당연히 얼굴이 이상해보일 수밖에.
두 작품 모두에 출연한 배우이자 본인이 푸에르토리코 출신인 리타 모레노의 말에 따르면 1961년 옛 버전 촬영 당시 메이크업 제품의 톤은 자신의 피부 톤과 전혀 맞지 않아 마치 '진흙을 바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이 점에 대해 항의를 했을 때 당시 스태프로부터 돌아온 말은 충격적이게도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이었다.
기가 막힌 이야기이다. 푸에르토리코 출신 배우 당사자가 실제 자기 피부 톤을 말하는데 이를 부정하고 자기 멋대로 '푸에르토리코인은 이렇게 생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상대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하다니? 막상 인종차별을 하는 것은 본인이면서 도리어 피해자에게 '인종차별주의자' 딱지를 거꾸로 붙인 이 스태프의 행동은 나르시시스트가 자주 사용하는 투사 전략의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스태프 개인이 나르시시스트였다기보다는 당시 백인들이 가진 인종에 대한 관념 자체가 집단적으로 백인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흔히 사람의 정체성을 빼앗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하거나 훔친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등 외형적 정체성의 '일부'를 '임시'로 탈취할 수는 있어도 사람의 내면에 자리한 재능, 기술, 생각, 지식, 감정, 아이디어, 자의식, 자신감 그리고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 명예, 권력, 타인으로부터 받는 존중, 사랑 등 무형적 자산은 빼앗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내면의 것은 남이 빼앗을 수 없고 온전히 나만의 것이니 소중히 여기고 내면의 성장에 힘쓰라는 식의 조언도 자주 듣는다.
그러나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의외로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사람이 전 재산을 잃고 나면 자신감도 내려가고 생각도 바뀌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내면과 외면의 요소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적인 것으로 보이는 요소도 사회적 상황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바뀐다는 것이다.
시험 공부만 열심히 해 놓으면 주변에서 매일같이 '멍청이' 소리를 들었다 해도 시험 결과가 그렇지 않은 경우와 동일하게 나올까? 나만 진실하고 당당하다면 나의 사회적 정체성과 정당성을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까? 수많은 연구 결과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심지어 시험을 보기에 앞서 자신의 인종을 표기하도록 하는 행위만으로도 유색인종의 평균 시험 점수가 유의미하게 낮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물론 단순히 '멍청하다'는 모욕 몇 번만으로 아인슈타인을 돌고래로 만들 수는 없겠지만, 일회성 모욕만으로도 결정적인 순간에 작은 차이를 만들어내거나 주변인을 눈속임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수십 년간(특히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피드백을 주입했을 경우에는 실제로 아인슈타인급 두뇌를 돌고래로 퇴행시키는 것도 것도 가능하다.
이처럼 내면의 것이라고 해서 '절대불변'이라거나 '절대 남에게 빼앗기지도, 파괴될 수도 없는 영구적 자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오히려 내면의 것이야말로 그 어떤 사회적 제도나 사법체제로도 보장할 수 없는 연약한 속성이 있기 때문에, 잘못된 사람과의 가벼운 일회성 상호작용만으로도 순식간에 파괴될 가능성이 있다. 대인관계를 조심하고 주변 지인 집단을 까다롭게 골라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과 이로 인한 자의식은 대인관계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친구가 '너 얼굴에 뭐 묻었다'라고 하면 스스럼없이 얼굴을 확인하고 더듬어보는 것처럼 타인은 우리의 사회적 거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주변이 온통 왜곡된 거울로만 가득하다면 어떻게 될까? 잘못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잘못된 피드백만 받다 보면 나의 인생도 잘못된 것들로 채워진다. 주관이 뚜렷하면 되지 않냐고?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주관이라는 것도 최소한의 사회적 지지를 필요로 하게 마련이다. 하다 못해 역사 속의 롤 모델이라도 있어야 유지되지 아무런 사회적 참고 기준도 없는 주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와 완전히 격리/분리된 '뚜렷한 주관'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은 인간과 사회화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이다. 사회의 영향력을 최대한 제한하고 나름대로 필터링하는 것은 노력에 따라 어느 정도 가능해도, 숲 속에서 들개처럼 살지 않는 이상 사회의 영향력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르시시스트는 주변인들에게 어떤 거울일까? 나르시시스트는 남들은 자기를 좋게만 이야기해주기를 바라면서 반대로 자신은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잘 내리지 않는다. 남들은 자신에게 옷 가게의 날씬이 거울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면서 자신은 반대로 남들에게 뚱뚱이 거울 노릇만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가장 약점/단점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런 콤플렉스를 상대에게 대신 살풀이하듯 뒤집어씌우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자신이 가장 자신없는 부분일수록 타인을 대상으로 그 부분을 집중 공격하면 남들 앞에서 자신은 그 약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연기할 수 있고, 자기 스스로도 그 약점이 해결되어 더 나은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르시시스트 곁에 오래 머무르면 나르시시스트의 이런 정체성 스와핑 대상이 되어 좋은 것은 계속 빼앗기고 나쁜 것은 계속 강제로 떠맡게 된다. 나르시시스트의 약점은 주변인의 약점으로 탈바꿈하고, 주변인의 장점은 어느새 나르시시스트의 장점이 되어버린다. 나르시시스트의 죄는 다른 사람이 뒤집어쓰고, 반대로 다른 사람의 공로는 나르시시스트의 것이 된다. 물론 이런 시도가 사회적으로 늘 성공적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르시시스트 본인은 언제나 상황이 그렇게 되도록 시도한다.
상대의 인종차별적 행위를 지적했다가 오히려 본인이 억울하게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몰린 리타 모레노의 사례처럼,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에게 가장 치명적일 수 있는 비난 딱지를 반사하듯 남에게 붙여버린 후 사회적 다수의 힘을 이용해 그 구도를 관철시키면 명백하게 보였던 가해자-피해자 구도도 뒤집힐 수 있다. 차별을 당한 당사자는 빌런이 되고, 반대로 명백히 인종차별을 자행한 백인 스태프가 오히려 '인종차별과 맞서싸우는 정의의 용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주변 상황만 받쳐준다면 말 한 마디로 순식간에 이렇게 당사자의 발언권을 빼앗아오는 정체성 도둑질이 가능하다. 백인이 히스패닉 정체성을 생물학적으로 훔칠 수는 없어도, 히스패닉 정체성을 정의내리고 대변할 수 있는 발언권과 영향력을 사회적으로 빼앗아 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런 투사 전략을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자식에게 사용할 때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글이 길어져 다음 기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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