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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 부모의 걱정을 빙자한 조종/저주 구별법

Dirt Mentalist 2022. 7. 10.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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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남을 깎아내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는 말을 뱉어놓고 가장 많이 하는 변명이 있다. 바로 "걱정돼서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서로 친하지도 않고 걱정할 사이가 아닌 경우에도 저런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다들 거짓말이라는 것을 내심 알면서도 한국 문화의 특성상 겉으로나마 '걱정해주는 사람'에게 화내면 화낸 사람이 비난받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속으론 화가 나도 아무 대꾸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부모가 이런 말을 한다면? 부모는 당연히 자식을 걱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부모가 걱정을 빙자해 다른 목적의 말을 하는 상황 자체를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걱정할 수 있는 권리'를 악용하는 경우는 굉장히 많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모종의 이유로 자신이 자식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거나 부정적인 감정 표현을 퍼붓고 싶을 때, 이 모든 것을 '걱정'이라고 포장한다. 부모를 객관화하기 힘든 어린 시절부터 이런 경험에 익숙해지면, 무엇이 나에 대한 진짜 걱정의 표현이고 무엇이 걱정을 빙자한 다른 것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이렇게 흐릿한 판단력으로 인해 나중에 사회에 나오게 되면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도 누가 날 정말 걱정해주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다음은 부모를 포함한 타인이 나를 진짜 걱정하는지, 걱정을 빙자한 다른 말을 하고 있는지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다.

 

1. 그 사람을 떠올렸을 때 저절로 내 마음 속에서 신뢰감과 호감이 용솟음칠 정도로 그 사람이 평소에 나를 잘 알고, 좋아하고, 존중하고, 도와주는 사람인가? 또는 중요한 이해관계가 묶여있는 운명 공동체인가?

 

: 막말로 당신이 평생 가야 몇 명 만날까 말까한 좋은 사람 또는 중요한 동업자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둘 다 아니라면 그 사람이 당신을 걱정해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원래 세상에서 당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줄 사람은 많지 않다. 본인이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많은 사람의 정체성을 구원해준 리더로서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당신을 감정적으로 걱정해주지는 않아도 객관적으로 유용한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조금 더 많다.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태도가 개방적인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좋은 조언을 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과 '걱정'은 다르다. 그런 사람들은 당신이 아니라 비슷한 위치의 누구에게라도 해줄 수 있는 조언을 해주는 것 뿐이다.

 

이를 판단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관계명을 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이니까, 부모니까 등의 이유로 이런 질문에 자동으로 '그렇다'는 대답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부모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고 자신의 가족 관계가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마저도 실제로 집에서 부모에게 자신의 사생활이나 생각을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는 경우는 부지기수이다. 그냥 부모는 바뀌지 않을 테니 소통을 포기하고 부모가 원하는대로 겉으로만 '네네' 하면서 원활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이에 대한 답이 '그렇다'라고 할 수 없다. 겉으로는 원활한 관계일지 모르나 부모가 자식을 잘 모르는 상태이며 거기엔 더 중요한 기저 이유도 깔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사람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것은 애초에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만에 하나 감정적으로 그게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해도 걱정의 핀트가 어긋나기 때문에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2. 걱정된다는 이유로 나에게 변화를 강력하게 요구하는데 애정이 아닌 사적인 분노와 집착이 느껴지는가?

 

: 누군가에 대한 걱정은 말 그대로 그 누군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걱정의 최종적인 목표는 걱정 대상이 되는 사람의 안녕이며, 상황의 주인공도 어디까지나 걱정 대상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 자기 판단상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 변화를 강력하게 요구할 수도 있고, 이를 상대가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싶으면 화가 날 수도 있다. 아끼는 가족이 폐암에 걸렸는데 계속 담배를 피운다면 담배를 끊는 것을 요구할 수 있고, 이를 상대가 따르지 않을 때 화가 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걱정된다고 말하면서 걱정 대상과 무관하게 순전히 사적인 분노와 집착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진로를 택하지 않았다고 자기 인생 계획을 망친 것처럼 분노하는 부모, 자식이 스스로 번 돈으로 물건을 샀는데 마치 부모 돈을 빼앗아가 쓴 것처럼 화를 내는 부모, 밖에서 안 좋은 일을 당했는데 짜증을 내고 오히려 자식을 공격하는 부모 등이 그러한 예다. 걱정의 최종 목적지가 자식이 아닌 부모 본인의 이해관계와 관련되어 있으면 이는 걱정이 아니라 걱정을 빙자한 조종 또는 책임 전가이다.

 

물론 말로는 '나 좋자고 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겠지만 감정선을 잘 살펴보면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걱정하는 모습과 괘씸해하는 모습은 분명히 다르다. 자기 맘대로 조종하고픈 자식이 말을 안 들어 괘씸해하면서 이를 걱정으로 포장할 경우, 부모의 모습에서는 무언가 주객이 전도된 요인이 보일 것이다. 말로는 나를 위한다면서 실제로는 나를 가장 미워하고 파괴하려는 듯한 적개심이 더 강하게 느껴질 것이다. 나를 정말로 위해서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화를 내는 순간에도 분명히 애정이 느껴지게 되어 있으며 그게 뚜렷하게 보여야 정상이다. 

 

3. 객관적으로 전혀 걱정할 상황이 아니고 걱정거리가 없는데 자꾸 막연하게 걱정을 만들어내거나 걱정을 핑계로 연락을 지속하는가?

 

: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전혀 걱정을 할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계속 '걱정된다'며 대화를 요구하고 연락을 줄기차게 해대는 경우에는 필시 다른 목적이 있는 경우이다. 사실은 자식에게 다른 것을 원하는데 이것을 대놓고 요구하기 어색하거나, 명분이 없거나, 영 가오가 서지 않을 때, 부모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일부러 자식을 걱정하는 구도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자식이 독립을 했을 경우,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식 걱정을 핑계로 자주 연락을 하려 하지만 막상 대화를 시작하면 자식 상황은 뒷전이고 자기 하고 싶은 요구와 수다만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또한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네가 걱정된다'라고 말할 때, 이는 거꾸로 '나를 걱정해달라'의 의미인 경우도 많다. 자식을 위해서 연락을 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본인을 위해달라고 간을 보는 것이다. '네가 밥이라도 제대로 챙겨먹는지 걱정이 돼서 전화했다'로 대화를 시작했다가 결론은 '내가 요새 영 입맛이 없어서 보양식이 필요한 것 같은데'로 끝나는 식이다. 자식과 합가해 살며 의존성이 심각한 노인 중에서는 자식들이 잠깐이라도 자신을 두고 외출을 하면 금세 전화를 하는 이들이 많은데, 누가 봐도 본인이 불안하고 혼자 있기 싫어서 전화를 해놓고도 한사코 '네가 걱정돼서 전화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본인이 자식에게 의존하고 있으면서 이를 인정하지 않고 거꾸로 자식이 오히려 자신에게 걱정을 끼치고 신세를 지고 있는 척 정신승리를 하는 것이다. 

 

4. 걱정된다면서 내가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끔찍할 정도로 구체적으로, 자주 묘사하는가?

 

: 누군가를 걱정한다면서 그 사람이 처할 수 있는 좋지 않은 상황을 가정해 경고하는 것은 일종의 충격 요법이다. 충격 요법을 한 두 번 사용했다고 해서 모두 이상한 부모는 아니다. 드라마 <CSI> 시리즈에서 반항아 10대 딸을 둔 CSI 요원 캐서린은 범죄가 넘쳐나는 도시인 라스베이거스 시내를 밤새 쏘다니는 딸의 안전이 걱정되어 온갖 설득을 해 보지만 잘 되지 않자 결국 자신이 맡은 사건의 피해자 시신을 보여주며 '이 사람은 너보다 어른이고 너보다 힘도 셌지만 이렇게 됐다'고 말하는 극한의 방법을 쓴다. 이 방법에 대해 동료 요원은 '글쎄,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고 캐서린 역시 본인이 잘한 일인지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다. 이런 경우는 적어도 부모의 의도가 정상 범위에 있는 경우이다. 정상 범주의 부모는 이런 방법이 정서에 대한 충격 요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극히 제한적으로만 사용하게 마련이며, 사용하더라도 썩 기분 좋은 선택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충격 요법을 심하게, 자주,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부모는 굉장히 위험한 부모이다. 걸핏하면 조그마한 것도 부풀려 최악의 상황이 될 것이라고 성토하고, 논리적 비약이나 궤변을 통해 최악의 상황에 대한 비합리적 예상을 강요하면서 자식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부정적 상황을 쉽게 입에 올리는 부모는 사실상 걱정이 아니라 반대로 저주를 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특히 자식이 처할 수 있는 나쁜 상황의 정도를 과장하는 정도가 심할수록, 또한 이를 매우 시각적이고, 구체적이고, 길고, 장황하게 묘사하는 사람일수록 위험하다. 어떤 부모들은 정말 신이 난 것처럼 자식을 상대로 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달변으로 읊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일지 모르겠으나 정신이 건강치 못한 나르시시스트 엄마가 딸에게 '너같은 X는 조두순같은 놈한테 걸려서 XXXX같은 짓이나 당할 것이다.' 식의 욕을 퍼붓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물론 표면적 이유는 '딸이 진짜 그런 일 당할까봐 걱정되어서'이지만 사실은 반대로 (딸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런 일을 당했으면 하고 바라는 심리에 가깝다. 진짜 애정이 있는 대상이라면 그렇게 구체적으로 끔찍한 상상을 하지 않는 게 정상이다. 

 

왜 그런 끔찍한 바람을 가지느냐고?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자식은 양날의 검이다. 완벽한 자신의 부속품이 되면 더없이 좋은 트로피이지만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면 인생 최고의 오점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제거해야 할 제1의 적이 된다. 이 긴장으로 인해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는 필연적으로 자식에 대한 무의식적 증오가 생성된다. 부모가 걱정을 빙자해 자식이 처할 수 있는 끔찍한 상황을 신나게 묘사하는 것은 여차해서 수틀리면 언제든 발동될 수 있는 증오의 버튼이 보이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이런 부모를 가까이에 두면 시도때도 없이 무의식적으로라도 자식에게 테러를 가할 가능성이 높다. 자식이 부모와 분리된 독립 개체라는 팩트가 수면 위로 드러날 때마다 이에 대한 처벌로서 자식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심지어 본인이 이를 직간접적으로 유도하기까지 할 것이다. 이러한 부모는 본인의 목숨을 위해서 반드시 멀리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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