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영화를 빙자한 멘탈 이야기 - 탑건: 매버릭 본문

흙멘탈리스트/흙진주(리뷰)

영화를 빙자한 멘탈 이야기 - 탑건: 매버릭

Dirt Mentalist 2022. 7. 8. 00:41
반응형

본격 '영화' 리뷰를 할 생각은 없다. 영화를 보고 생각난, 이 블로그의 주제에 맞는 이야기를 토막으로 남기는 것에 가깝다.

 

# 매버릭(그리고 현실 톰 크루즈)의 캐릭터, 그리고 이런 성향에 대한 시선에서 느껴지는 미국적인 분위기. 며칠 전에 봤던 뉴스가 떠올랐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17세 소녀가 5피트 깊이의 바다에서 패류를 캐다가 상어의 습격을 받고 구출은 됐지만 결국 다리 한쪽을 절단하게 됐다. 절단 수술을 앞둔 아이의 병실은 어떤 모습일까. 침대 곁에는 전국 각지에서 보내준 상어 인형이 넘쳐나고 소녀는 선물에 기뻐하며 "다 나으면 바다로 돌아갈 거예요. 두려움에 지면 안 돼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거예요."라고 말한다. 관련 뉴스에는 정확히 1년 전, 데칼코마니같은 사건을 겪은 15세 소년의 이야기가 뜬다. 반응도 같다. 다 나으면 돌아갈 것이라고. 이제 이런 것에 놀라지 않을 때도 됐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치사량 수준의 양키 센스를 접하면 잠시 아득해진다. 대체 양키들은 뭘 잘(못?) 먹고 이런 것인가.

 

# 어느 문화나 다 강점을 가지고 그 강점이 맥락에 따라 바로 약점이 된다. 미국 문화도 마찬가지. 그러나 한국인의 입장에서 미국인들의 이런 태도와 사고 체계는 상당히 신선한 자극제가 될 수 있다. 언제나 비극을 전시하기 바쁜 한국인과 달리 미국인은 행복을 전시하기 바쁘다.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강하다, 나는 도전한다, 나는 승리한다로 가득한 플롯. 어릴 때부터 줄기차게 세뇌하는 진취성과 건강함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한국은 아무리 잘나도 국평오 앞에 고개 숙일 줄 아는 겸손한 인물을 좋아하지만 미국은 반대다. 아무리 별볼일없어도 내가 최고야, 난 행복해, 난 끝내줘를 외칠 줄 알아야 사람 대접 받는다. 객관적 스펙이 아무리 뛰어나도 스스로를 믿지 않는 자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거만하고 시끄러운 미국인들'을 한국적 시선에서 쌍놈같다고 무시하거나 제국주의적이라고 경멸하기 전에, 그러한 태도가 어떤 면에서 한국 문화의 단점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있는지는 따져볼만하다.

 

# 나의 중심을 가장 우선시하는 미국인들은 행동력과 행동 범위 면에서 한국인보다 훨씬 앞선다. 한국인은 미국인에 비해 좋은 말로 하자면 신중하고, 나쁜 말로 하자면 소심하다. 미국적 행동력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나쁜 모습은 무뇌아적 사고뭉치일 것이다. 한국적 신중함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나쁜 모습은 무기력한 산 송장이다. 한국인의 멘탈 건강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자면, 한국인은 생각을 줄이고 행동 지분을 늘려야 한다. 한국적 신중함이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생각은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니고 해가 된다. 쓸데없는 걱정, 온갖 개똥철학, 한도 끝도 없이 바뀌는 생각에 휘말려 한 발짝도 떼지 못한다. 상어에게 물린 아이들이 한국인이었다면 어땠을까. 다시 바다로 가겠다는 아이들은 민폐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혼나고도 정신 못차리냐!' 

 

# 그러나 상어 습격은 우연히 일어난 사고이지 누구에게 '혼난' 것이 아니다.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결정적 문제가 여기에서 나온다. 외부 환경에서 우연히 발생한 일에도 쓸데없는 서사와 의미를 부여해 존재하지도 않는 인과관계를 만들어낸다. '나쁜 일이 일어났으니 빨리 극복하자'와 같은 단순한 미국식 사고가 되지 않는다. 왜 나쁜 일이 일어났을까, 왜 하필 나한테, 내가 무슨 문제가 있나, 사주팔자가 안 좋은가, 이런 일을 하면 안 되는 건가, 절대 하지 말라는 계시인가 등등 개똥철학이 줄을 잇는다. 외부 문제는 어디까지나 외부에 놓고 재빨리 프레임화해 극복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게 안 되고 문제를 끝없이 확장시키며 내면화하기까지 한다. 우연한 사고와 자연재해의 피해 등도 '혼났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한국어 관습에서도 잘 드러나는 문제다.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외부의 역경을 이겨낸다'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성립할 수 없다. 외부의 역경은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 내가 혼이 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감히 극복해서는 안 될 것이 되고 만다. 나에 대한 심판으로 겸허히 받아들이고 무릎을 꿇어야 하는 대상이 된다. 어른이 아이를 혼내는데 아이가 반항하고 무시하면 어른은 더 혼을 내기 마련 아닌가. 역경을 극복 대상이 아닌 '혼나는 것', '천벌' 같은 것으로 보면 '역경 극복'은 건방진 짓, 더 혼쭐이 나야 할 죄악이 되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다.

 

# 이러니 많은 한국인이 다들 일이 조금만 안 되어도 금세 포기한다. 난 재능이 없어, 난 잘 될 운명이 아니야 운운하면서. 그리고 자신과 달리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띄면 이런 자기비하를 그대로 뒤집은 태클을 시전한다. 건방지게 네가 재능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네가 뭐 대단한 사람이 될 줄 아느냐. 

 

# 다리를 잃게 된 17세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 "원래 바다에는 상어가 있어요. 언제나 있었어요." 무슨 뜻일까? 인간에게 무해한 환경이라는 게 애초에 존재하는가? 리스크가 없는 도전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는가? 도전 없는 삶은 가능한가? 어느 시점에서는 완벽하게 통제되는 것처럼 보이는 안전한 도시 환경도 사실은 전방과 경계마다 리스크 가득한 작업과 씨름해야 유지 가능한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예측 불가능성과 리스크를 적대시하고 완벽한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꿈꾸는 자는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과거를 반복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 그 아이는 다리를 잃었어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잘 살 것이다. 

 

# 한국에서 이런 영화는 나오기도 힘들고 억지로 만들어도 어색할 것이다. 이미 탑 수준에 오른 한국의 프로덕션 능력이나 기술 문제가 아니다. 캐릭터의 문제다. 한국의 전체적인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매버릭과 같은 캐릭터로 이런 플롯을 쓰면 너도나도 개뻥인 걸 다 아는 억지춘향이 되거나 관객들에게 '주인공이 비호감'이라고 찍혀 흥행이 요원해질 것이다. 미국 문화를 가장 모범생처럼 배운 한국이지만, 캐릭터까지 미국적인 욕심을 내면 리얼함이 급 떨어지면서 유치해지거나, 핵심을 놓친 이상한 묘사가 되거나, 정말 핵심을 담아 리얼하게 로컬화했다간 마녀사냥을 당하는 경향이 강하다(ex. 청연).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