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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멘탈리스트/흙진주(리뷰)

영화: <The Wonder> - 내러티브에 지배당하는 인간

Patricidal Jubilee 2024. 3. 5.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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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 없이 존재할 수 있는 문명인은 없다. 사회화된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에 자기도 모르게 기승전결의 구조를 덮어씌운다. 인간의 역사 자체가 내러티브와 함께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이야기를 창조하고 거기에 의존해 집단을 유지하고 문명을 창조했다. 수많은 전설, 신화, 경전들, 이미 과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판명난 것이 부지기수여도 고전적인 이야기들은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현대인에게까지도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한때 한 집단의 모든 사람이 믿고 따르도록 강요된 성경과 같은 고전적 이야기의 힘이 크게 약화된 21세기라 해도, 현대인의 내러티브 의존 역시 고대인들보다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이야기가 좀 더 다양해지고 다채로워졌다고 해서 인간의 내러티브 의존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미디어가 생산해내는 수많은 이야기가 현실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막강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영화나 소설처럼 내러티브 자체가 상품이 아닌 곳에도 내러티브는 넘쳐난다. 한 사람의 인생이 결코 매끄러운 하나의 이야기일 수 없지만 그렇게 보이도록 써야 하는 자소설, 고도로 편집된 뉴스, 말 한 마디 없이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스타 사진 한 장, 심지어 가장 원초적 욕망의 대상이어야 할 음식에도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모든 인간은 거의 내러티브 중독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은 크게 달라진다. 같은 것을 보고도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이란 여성들이 히잡을 벗어던지며 시위를 하는 것을 예로 들어 보자. 세속주의와 보편주의에 입각한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예정된 진보의 수순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한 종교적 관점에서는 반대로 말세의 징조로 보일 것이다. 같은 행동을 어떤 이야기 속에 넣고 보느냐에 따라 정의가 될 수도, 죄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당연히 누구나 자신이 믿는 이야기가 정당하고 가치있다고 주장하며, 세상은 언제나 그렇게 이질적인 존재들의 동상이몽 상태였다. 

영화 <더 원더>는 순전히 이야기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상황을 그린다. 1862년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에 사는 한 소녀가 몇 달에 걸쳐 단식을 한다. 자신은 신이 내려 준 만나만으로 살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물론 가능하지 않은 일이며, 실은 소녀는 엄마의 입맞춤을 빙자한 어미새 방식의 먹이 전달로 연명하고 있다. 가족들은 이를 의식적인 차원에서 열심히 부정 중이다. 이들이 이런 기만을 저지르는 것은 쇼 비즈니스적인 이유에서일까? 

 

나중에 밝혀지는 일이지만 그렇지는 않다. 소녀는 무언가를 진심으로 속죄하는 의미에서 장기간의 단식을 행하고 있으며, 결국 진정성을 검증하기 위해 이들을 관찰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간호사가 엄마의 입맞춤을 금지하자 소녀는 정말로 굶어죽기 직전에 이른다. 종교적 환상에 빠져 있으면서도 아이에게 무언가를 먹여야 아이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잠재의식 속 상식을 무시하지 못해 기만적인 방식으로 아이에게 먹을 것을 전달하던 어머니마저도 이제 딸이 죽어 천국에 가는 것이 운명이라고 여기며 포기하기에 이른다.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간호사는 ‘사람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과학적 사실과 ‘나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의료인으로서의 임무에(만) 충실하다. 그러나 지당하면서도 건조한 이 명제들은 아직도 전근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종교관에 빠져 있는 이 아일랜드 시골 구석의 가족에게 좀처럼 먹혀들지 않는다. 이들이 집착하고 있는 것은 종교적 구원 서사이며, 따라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단식을 멈출 수 없다. 아이가 그저 죽기 싫어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순간, 자신들이 지키려 애를 쓰던 모든 내러티브는 파괴되고 자신들은 그야말로 아무 가치있는 이야기에도 속하지 못한 무의미한 존재들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간호사는 자신이 훈련받은 근대적 상식 명제만으로는 아이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 자신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바로 아이가 믿고 있는 내러티브를 치료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기아 상태에 빠져 자꾸 혼절하는 아이에게 다음에 깨어나면 너는 완전히 속죄하고 전혀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 말해주며,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아예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 이야기를 믿게 된 아이는 정말 제대로 식사를 하는 건강한 아이로 거듭난다.

영화 자체는 아름다운 마무리로 끝나지만 멀쩡한 목숨을 왔다갔다 하게 만드는 인간의 내러티브 중독 증세는 일견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지구상의 그 어떤 다른 생명체가 이렇게 같은 상황에서 내러티브에 따라 전혀 다른 전개를 보일 수 있을까? 아이는 거식증에 걸린 것도, 삶의 의지를 완전히 잃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사회적 내러티브를 찾지 못했을 뿐이다.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정신적 출구를 찾지 못하자 육체조차 지워버리기로 한 것이다.

간호사의 처방은 현대 심리 테라피스트들의 단골 처방과도 일치한다.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개발하고 그 속에 나쁜 경험과 어려운 상황을 넣어 맥락과 의미를 부여하세요.” 효과적일까? 어느 정도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환상과 믿음을 다른 환상과 믿음으로 끊임없이 대체해야 하는 이런 시지프스적인 사이클의 반복의 부작용은 없을까? 인간은 내러티브 없이, 믿음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지만 때로는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의 족쇄임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때로 나를 살리고 죽이는 것이 실질적인 것이라기보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지겨운 표현이지만)임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러티브 중독, 그것도 단 하나의 내러티브에 대한 장기간의 중독은 약물 중독과 동일한 결과를 가져온다. 특정 내러티브를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제아무리 우리가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독창적으로 창조하고 지키려 해도, 모든 사회화된 인간은 우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주입당한 수많은 주류의 내러티브 속으로 자꾸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론상 사상과 취향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100명의 사람이 각자 100개의 내러티브를 가질 수 있지만, 실상은 대부분이 사전 프로그래밍된 내러티브 속에서 반강제로 주어진 역할만을 수행할 뿐이다. 

영화 <더 원더>는 처음과 마지막에 영리한 영화적 장치를 집어넣었다. 내러티브 트위스트만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이 이야기의 시작과 끝 부분에 영화 세트장과 현실의 경계를 보여주며 이것조차도 하나의 이야기이자 내러티브임을 분명히 했다. 단 하나의 샷으로 이야기 내부와 외부의 분명한 경계를 보여줌으로써, 다른 유형의 예술에서 보여줄 수 없는 영화만의 방식으로 원작의 주제를 강화한 것이다. 이 수미상관의 짧은 순간은 그래서 본 영화의 기승전결만큼이나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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