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멘탈리스트

흙조선의 거짓말: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 본문

흙멘탈리스트/한국인의 행복과 불행

흙조선의 거짓말: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

Dirt Mentalist 2020. 12. 28. 08:25
반응형
반응형

노력을 ‘노오력’으로 바꿔부르는 요즘 젊은이들의 시니컬한 시선으로 인해 많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한국은 아직도 개인의 노력을 통한 ‘환경 극복’ 신화가 맹위를 떨치는 나라다. 아무리 푸념 섞인 수저론이 유행하고 공정하지 못한 대물림에 대한 비판이 빗발쳐도, 기회의 불평등함에 대한 개인의 호소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진짜 능력있는 사람들은 불평을 안 한다’는 부정확한 팩트부터 ‘될놈은 어떻게 해도 된다’는 결과론적 순환논리에, ‘**살 이후로는 부모나 환경 탓이 아니라 본인 탓’이라는 자의적인 원칙까지, 환경의 강력한 영향에 대한 부정 논리는 다양하고도 강고하다. 환경 탓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직도 삶에 대해 유효한 조언으로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본인에게 그 말이 적용될 때는 분개하는 사람들조차도 타인을 평가할 때는 환경의 영향을 인식하지 못하는 순응적인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칭찬하고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환경은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 가능하지 않다. 환경이 노력만으로 극복 가능하다면 인간은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본인의 뇌파만으로도 지식을 알아낼 수 있어야 하고, 사회화 과정 없이도 사회인의 요소를 갖출 수 있어야 한다. 막말로 타잔마냥 태어나자마자 야생에서 늑대가 키웠다 해도 성년이 되는 즉시 바로 대기업 면접장에 나타날 수 있는 사회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영어 책 없이도 영어를 터득하고, 피아노 없이도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이게 가능할까? 

당연히 아니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과 기술은 몇 개 되지 않으며, 사회화 과정에서 타인의 도움을 통한 자극과 확장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고립되면 제아무리 동물보다 훨씬 높은 지능을 타고났어도 그 능력의 대부분은 사장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말의 뜻은 다른 사람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며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동물과 차별되는 인간 특유의 능력이 집단 문명을 이루고 사는 인간 사회의 맥락에서만 유효하다는 말이다. 사자의 무시무시한 앞발 힘은 개체일 때에도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인간은 제아무리 최고의 무기인 좋은 머리를 이용해 도구를 발명해도 혼자서는 맹수를 상대해 살아남기 힘들다. 모여서 전략을 짜고 분업을 해야 생존이 가능하며,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들이 대부분 이런 맥락에서 강화되고 훈련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사회화 환경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인간 특유의 높은 지능과 언어적 본능도 설 자리를 잃는다. 그리고 많은 전문가들이 관찰하고 연구한 바, 이러한 사회화는 미성년자 시기에 이루어져야 하며 결정적인 시기를 놓치면 영원히 사회적 인간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환경 극복’이라고 말할 때 실제로는 환경 극복이 아니라 ‘신분/계급 극복’을 말한다. 이를테면 ‘가난한 집에서도 본인만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 갈 수 있다’와 같은 인식이 대표적이다. 이건 환경 극복이 아니다. 학교에서 계급에 따라 시험 점수를 조절한다면 모를까, 경제적 가난은 그 자체로 공부를 잘 할 수 없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가난하지만 집에 와서 책을 보고 공부할 수 있는 본인만의 시간과 공간이 허용된다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은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굳이 현재의 환경 조건을 바꾸지 않아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경우라면, 환경을 극복했다는 선언은 허상이다. 환경이 적대적이었던 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으로 인해 중간에 다른 현상이 일어나 공부에 적대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예를 들어 경제적 가난으로 인해 부모가 매일 싸워 집안이 항상 시끄럽고 불안하다거나, 경제적 가난을 이유로 부모가 학교를 보내지 않는다거나, 경제적 가난 때문에 일을 하느라 물리적으로 공부를 할 시간이 없다거나 하는 경우이다. 이렇게 공부를 할 시공간이 허용되지 않는 적대적 환경은 극복이 불가능하다. 제아무리 천재를 갖다놓아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거나 공간이 없거나 재료가 없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물리적으로 당연한 결과이다. 

적대적 환경은 오직 탈출할 수 있을 뿐,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한때 적대적 환경에 있었다가 이후 성공했다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결국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적대적 환경을 벗어난 과정을 반드시 담고 있다. 벗어나지 않고는 기회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를 학대한다면 도망을 가든 신고를 하든 쥐도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고 차라리 감옥에 가든 상황 종료와 전환을 위한 뭔가를 해야 현재의 고난을 극복할 가능성이라도 생긴다. 학대자와 그가 조성한 환경을 그대로 두고 극복을 하네 마네 하는 것은 뜬구름 잡는 얘기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주어진 환경을 탈출하고자 하는 능동적인 행동을 피하고 그냥 남이 제시하는 조건에 순응한 채 어찌저찌 버티고 노력하다보면 어느 순간 고난이 해결되고 좋은 날이 오겠지 하는 망상에 빠져 세월을 낭비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명확하지 않은 환경 극복론에 오염돼 적대적 환경을 묵묵히 버티는 것을 노력으로 착각하고, 이렇게 노력 포인트를 쌓다 보면 산신령이 복을 내려주시듯 환경이 극복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열심히 기도만 하면 산에서도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도 같다. 한국에서 노력을 노오력으로 만드는 가장 큰 착각이기도 하다. 미안하지만 노력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물고기를 원하면 누가 뭐라든 다 던져버리고 강으로 내려와야 한다. 환경은 극복할 수 없다. 오직 탈출할 수 있을 뿐이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