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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멘탈리스트/한국인의 행복과 불행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이상한 면책 특권

Dirt Mentalist 2020. 11. 18.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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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법적 면책특권을 누린다. 법적으로 위법 행위를 저질러도 몇 가지 제한 사항에만 걸리지 않으면 기소나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법적 조치와는 무관하고 아무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사회/문화적으로 이와 비슷한 특권이 존재한다. 윤리적으로 비판받을 짓, 또는 심지어 법적으로 처벌받을 짓을 했는데 그 당사자의 사회/문화적 지위로 인해 다른 이들에 비해 사회적으로 비판을 덜 받거나 안 받는 경우는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여론의 심사에서 이렇게 까방권을 얻기에 좋은 지위 중 하나로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게 있다. 주로 사회적으로 권력이 있거나 문화적으로 다수의 통념과 욕망에 부합하는 유형일 때, 나이가 많을수록, 남성일수록 이런 사람의 지위에 오르기 쉽다. 도저히 내가 어떻게 바꿔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사람 또는 바꿀 필요가 없는 완벽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핵심이다. 한국인들 중 일상생활에서는 온라인에서든 누군가의 행동을 비판했을 때 '그 사람은 원래 그냥 그런 사람'이라는 식의 말을 한 번도 안 들어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단지 누군가의 문제가 만성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중립적인 말로 쓰일 때도 있지만, 교묘하게 비판을 무력화하려고 할 때도 많이 쓰인다. 

'트럼프가 대선 불복이라는 유례 없는 기행을 저지르네요!' 
'트럼프 원래 그런 캐릭인데요?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지지자들도 원래 그런 사람인 거 다 알고도 대통령 뽑아준 거니까 달라질 것도 없고 꼭 몰랐던 것처럼 이제 와서 더 욕할 필요도 없어요.'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말은 누군가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정당화하지 않고도 비판 의견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쏠쏠한 효과를 발휘한다. 트럼프를 옹호하기 위해 '대선 패배 불복은 나쁘다'를 뒤집어 '대선 패배 불복은 나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승산 없는 싸움이다. 사회적 가치 기준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안의 시시비비라는 기준을 걷어차버리고 판단의 기준을 트럼프의 '캐릭터 일관성'으로 옮기면 대화의 상황이 심리적으로 크게 달라진다. 갑자기 그의 캐릭터는 우리가 감히 평가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그저 적응해야 할 상수가 되어버리고, 그에 대한 비판은 당연한 상식을 모르는 무식의 표현처럼 보이게 된다. 사실 트럼프의 개인적 캐릭터 일관성이란 건 제3자들에게 좆도 의미 없는 기준이기 때문에 가치 판단에서 그걸 고려해 줘야 할 이유는 1도 없지만 의외로 이런 꼼수를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는 무의미한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논리적으로는 비판의 수위를 높여야 하는 이유가 될 뿐이다. 누군가의 캐릭터가 개인적으로 일관성이 있건 말건 그게 타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쁜 일도 일관성만 있게 저지르면 좋은 일로 둔갑할 수 있는가? 적어도 좋다가 중간에 배신감 느낄 일은 없으니 안정감에 점수를 줘야 하는 것일까? 운 좋게 20년간 법망을 피하면서 범죄를 저질러오다 드디어 잡힌 살인자를 변호사가 '판사님, 판사님이 잘 몰라서 그러시나본데, 피고는 이번 피해자에게만 나쁘게 한 것도 아니고, 모두한테 장기간 나쁜 짓을 해 온,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라고 변호하면 과연 선처가 될까? 

하지만 이 웃기는 논리가 법정 밖의 세상에서는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법정 싸움까지 갈 수 없는 관계에서 '원래 그런 사람'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원래 그런' 규칙을 체득하고 적응하기로 마음 먹은 이들에 의해 종종 무소불위의 기득권자로 추대된다. 해당 규칙에 이미 적응이 끝난 이들은 '원래 그런 사람'이 바뀌는 것을 더 이상 원하지도 않는다. '원래 그런 사람'이 보스인 세상에서 기껏 순응하며 익혀 놓은 자신의 핵심적 생존 기술이 똥값이 되어 상대적으로 유리했던 자신의 생존 경쟁력이 무의미해지는 걸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틀린 것을 논리적으로 인식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고, 자신의 과거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게 심리적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 보스가 한낱 병신으로 밝혀지고 그의 자장 밖에도 세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끝까지 남는 팬보이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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