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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자의 노하우 - 권력자가 되는 손쉬운 트릭

Dirt Mentalist 2021. 9. 23.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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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관계에서의 권력 구도를 파악할 때 한국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저지르는 오류는 정량적으로 평가한 누군가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특정 상황에서의 상대적 권력과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어떤 경우에는 다분히 의도적이기도 한데, 이를테면 병원 경영진 조직이 권력으로 휘두르는 비합리적인 횡포가 괴롭다고 느끼는 봉직의에게 “전문직씩이나 되면서 무슨 대단한 권력의 횡포를 당한다고 그러냐?”고 비아냥거린다거나, 서민 집안의 가정폭력범 사례에서 유교 문화가 부여하는 가장의 권력에 대해 이야기하면 “서민 집안 가장에게 무슨 권력이 있다고 그러냐?”며 엉뚱한 반박을 하는 식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관계의 상대성을 고려한 전자의 ‘권력’과 한 사람의 사회적 영향력 범위를 나타내는 후자의 ‘권력’은 단어만 같을 뿐,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을 지칭한다. 권력 관계는 상대적인 것이며 또한 상황적인 것이다. 한 사람의 객관적 사회경제적 위치가 모든 경우에 적용되지도 않고, 모든 대인관계에게 동일한 효과를 발휘하지도 않는다. 웬만한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의사라 해도 조직 내에서 더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선배 의사 앞에서는 권력자가 될 수 없으며, 사회에서는 찌질이 취급을 받는 남자라 할지라도 가족에게만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 역시 충분히 가능하다. 삼척동자도 이해할 수 있을만큼 쉬운 논리이지만 의외로 한국에서는 한사코 부정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권력 관계의 상대성과 상황성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그러한 속성에 의존해 이익을 보고 있거나 보려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즉, 한국에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상대적 권력을 없다고 포장하면서 남몰래 권력의 이익만을 취하려는 이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권력자 포지션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비난을 당하거나 반대로 권력자 포지션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도 동정을 받기가 쉽기 때문이다. 미국 문화가 승리자를 찬양하고 패배자를 멸시하는 경향 때문에 명백한 피해자 포지션에 있는 사람마저도 어떻게든 센 척을 하게 만든다면, 한국 문화는 거꾸로 패배자의 자기 연민과 자기 모에화가 잘 먹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명백한 가해자 포지션에 있는 이들마저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기 바쁘다.

이러한 문화 차이로 인해 한국의 나르시시스트/소시오패스/사이코패스 유형들은 특권의식적 정신세계의 상당 부분이 겉으로 표출되는 도널드 트럼프식 전략보다는 피해자를 자처하며 동정표를 사는 전략을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한다. 한국형 사기꾼들의 대표 전략인 피해자 코스프레에 속지 않으려면 “내가 무슨 사회적 권력자도 아닌데…”라는 식의 자기 서술을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제아무리 가진 것 없는 동네 찐따라 해도 누군가를 협박해 공포를 느끼게끔 한다면 그 관계에 한해서는 명백한 권력의 비대칭 상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모든 대인관계에서의 상대적 권력관계는 그 자체의 역학 구도만을 떼어놓고 볼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공인하는 사회적 권력자가 아님에도, 심지어는 사회경제적 계급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각종 물리적/심리적 수단을 동원해 상대적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하게 많으며, 이런 관계에 걸려들면 제아무리 모두가 공인하는 사회적 권력자마저도 누군가의 퍼펫으로 놀아날 수 있다. 이런 방법은 때로 위법일 수도 있고 법적 처벌이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법적 해결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당연하지만 나르시시스트/소시오패스/사이코패스 유형의 착취자들은 어떻게든 법적으로 걸려들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부당 이익을 챙기기 위해 노력한다. 다음은 사회가 공인한 권력이 없는 상태에서도 개인적인 관계에서 상대적 권력을 창조해낼 수 있는 사기꾼들의 대표적인 방법들이다.


첫 번째, 상대방의 기본권을 기본이 아닌 것처럼 말하기

근대 이후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기본권은 천부인권이며 이는 상식의 영역이다. 그러나 아무리 천부 개념의 기본권이라 해도 이를 침해당하는 경우는 현실적으로 비일비재하다. 세상 어디에선가 매일 누군가는 살해당하고, 폭행당하고, 돈을 떼인다.

이런 당위와 현실의 격차를 이용해 천부인권을 마치 누가 준 것처럼, 또는 몰수할 수 있는 것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주로 기본권까지 침해당하는 극단적 사례를 들먹거리며 상대방의 기본권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암시를 준다.

인건비를 부당하게 착복해놓고 항의하면 갑자기 아프리카의 아사자를 운운한다거나, 연인의 옷차림을 검열해놓고 이에 불만을 가지는 상대에게 아프간의 부르카를 운운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상대방의 기본권 경계를 무너뜨리고 얼마든지 침해 가능한 대상으로 인식시켜 본인 인생에 대한 권한을 축소시키기 위해, 삶의 기준을 당위에서 가장 동떨어진 최빈국의 비극적 긴급 상황으로 잡아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시궁창같은 현실은 어디까지나 해결 대상일 뿐이지 거꾸로 당위 기준을 무너뜨릴 수 있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가장 저열한 수준의 사례를 자주 언급하면서 타인의 기본권을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거래 가능 대상으로 들먹거린다면 그 사람은 타인을 상대로 범죄적 사고를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두 번째, 위해를 가하겠다고 협박하거나, 위해를 가하지 않는 것에 감사하라고 요구하기

실질적 위해를 가하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이며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권력 창출 방법이다. 은행원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돈을 담으라는 요구는 사회적 권력과 무관하게 순수 물리력만으로 상황적 권력을 창출하는 대표적 상황이다. 은행원은 자연인으로서의 은행 강도를 존중하지도, 그가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있기 때문에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순순히 돈을 담는다.

보다 일상적인 상황에서 이런 물리적 위해 협박과 비슷한 효과를 내면서도 법적 처벌을 피해갈 수 있는 심리적 전술이 있는데, 바로 위해를 가하지 않는 것에 대해 과시하는 것이다. 갈등 상황에서 누군가가 “때려죽이지 않은 것에 감사한 줄 알아라.”와 같은 말을 했다면 이는 간사하게 직접 협박의 형식만을 피해갔을 뿐, 실질적으로는 협박과 유사한 효과를 낸다.

본인은 얼마든지 위해를 가할 힘이 있지만 자기 의지로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자화자찬식으로 어필하면 상대방은 본인의 관대함 덕분에 일상을 유지하는 모양새가 된다. 이런 화법을 통해 상대방의 무의식적 공포를 자극하면서 안전해지고 싶다는 상대의 간절한 생존본능을 잘 이용하면 아무것도 해 준 것 없이도 상대방의 감사를 이끌어낼 수 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지 않을 짓이라 감사를 요구하지도 않을 상황에서 이런 화법만으로 관대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끌어내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다.

세 번째, 상대방을 평가 대상으로 만들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누구나 사회적 평판과 남의 시선에 어느 정도는 신경을 쓴다. 때문에 만인은 만인에 대해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선거철에 제한된 일이라 해도 높으신 국회의원들이 굳이 재래시장을 찾아 상인들의 손을 붙잡고 공손한 척을 할 이유가 없다.

누군가를 평가 대상으로 삼는 것은 본인을 권력자의 위치에 올려놓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비록 순간일지언정 권력자가 된 기분에 취해 다른 사람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뒷담화를 하거나, 상대에게 오지랖을 부린다.

일반적으로 평가를 하는 사람은 평가를 당하는 사람보다 사회적 위치가 높거나 높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사회 체제 내에서 각종 시험을 통해 테스트를 당하는 쪽은 거의 언제나 신입이거나 아직 증명되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역이용하기 쉬운 고정관념이기도 하다. 적극적으로 평가질을 선수쳐서 자신이 실제보다 잘난 사람인 척 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점수가 나오는 시험 체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잘난’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주관의 영역이므로, 누가 누구를 평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 역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딱히 누구를 평가할 만한 자격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선수를 쳐서 누군가를 평가 대상으로 도마 위에 올려놓으면,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제3자들은 무의식중에 평가자가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처음에는 방관자였던 제3자들이 평가자의 시선을 공유해 도마 위에 올려진 대상을 함께 평가질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상당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본인도 권력자로서의 쾌감은 느끼고 싶은데 앞장서서 희생자를 만들기에는 부담스러우니 나르시시스트/소시오패스/사이코패스 유형이 알맞은 자리를 만들어주면 굶은 좀비마냥 달려들기도 한다. 이것이 나르시시스트 관련 심리학에서 표현하는 ‘플라잉 몽키(Flying Monkey)’가 만들어지는 이유 중 하나이다.

평가자가 여러모로 뒤떨어지는 사람이라거나 사회적 기술이 모자라 수가 다 읽히는 수준이라면 거꾸로 미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사회적 기술이 조금만 받쳐줘도 오히려 이런 착취자 유형들이 조직 내에서 추종자를 더 쉽게 만든다. 조사관마냥 반드시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해야만 하는 동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일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일에 대해 굳이 진실을 알아야 할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재미있으면 그만이고, 본인이 안 당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거짓말을 하거나 정보를 차단하기

당신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으로 걸어가는 중이다. 그런데 멀쩡해 보이는 누군가가 다가와 친절하게 알려준다. “오늘 서울역에 문제가 있어서 기차가 모두 취소되었다고 하네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당신은 이를 진실 혹은 거짓 중 무엇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이 진실일 가능성 쪽에 무게를 실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종일 본인이 접하는 대부분의 소식에 대해 사실일 거라는 추정을 훨씬 더 많이 한다. 직접 본 것도 아니고 근거가 없어도 그렇게 한다. 의심이 많아질수록 생활이 피곤해지기 때문에 하는 편의주의적인 선택이기도 하고, “왜 그 사람이 나한테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와 같은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적 맹점을 파고드는 착취자들은 고의적으로 큰 일부터 작은 일에까지 습관적인 거짓말을 하며 상대를 본인의 시나리오에 맞는 매트릭스로 몰아넣는다. 서울역 기차야 직접 확인하면 간단하게 팩트가 드러날 일이지만 본인의 확인이 불가능하거나 확인하고자 하는 동기가 떨어지는 일이라면 어떨까?

“왜 그 사람이 나한테 거짓말을 하겠어?”
왜냐하면 거짓말 하나로 상대를 내가 지어낸 가상의 세계를 믿는 멍청이로 만들 수 있기 떄문이다. 거짓말은 없는 권력을 손쉽게 만들어내는 가장 빠른 방법 중 하나이다. 실제로 병리적인 거짓말쟁이들은 장난전화로 경찰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며 순간적인 권력감을 느낀다. 본인이 경찰관에게 명령을 내릴 사회적 위치는 없지만 장난전화를 통하면 단 몇 분이라도 자기가 원하는대로 그들을 움직일 수 있기 떄문이다. 이런 식의 장난전화로 만들어낼 수 있는 권력은 단기적인 해프닝에 그치지만, 지능이 높고 사회적 위치도 있는 착취자라면 얼마든지 이러한 원리를 훨씬 더 정교하고 교활하게 이용해 더 많은 사람을 본인이 원하는 가상의 세계에 집단적으로 빠뜨릴 수도 있다.

다섯 번째,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이간질하기

착취적 관계를 통해 부당 이익을 얻으려는 이들이 언제나 가장 경계하는 대상은 관계 밖에 있는 ‘제3자’들이다. 자신과 이해관계를 공유하지 않고 자신의 통제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제3자의 존재란 언제든 객관적인 의견과 판단으로 기껏 공들여 놓은 착취 시스템을 망가뜨릴 수 있는 잠재적 위협이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소시오패스/사이코패스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고 순종하길 바라지만 이는 불가능한 미션이다. 차선책으로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고 순종하지 않는 모든 이들이 죽거나 병들거나 사회에서 추방당하거나 비참하게 실패하길 바라지만 이 또한 (북조선 김씨 왕조 일가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미션이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그들에게 남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옵션은 최소한 본인이 주요 먹잇감으로 선정한 착취 대상자 주변의 제3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관계망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고립이 먼저 선행되면 관계에서의 권력 창출은 훨씬 쉬워진다.

누군가의 사회적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서 정체성의 상당 부분을 강탈하는 것이다. 사회적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은 이론적으로는 여전히 동일한 권리를 보유한 시민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단과 방법을 잃어버린다. 때문에 정말로 공권력이 출동하지 않고서는 안 될 만큼의 큰 피해 증거가 만천하에 드러나 인터넷이 들끓고 유튜브가 폭발하는 수준이 되기 전(이게 어떤 상태인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까지는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갇히게 된다.

이런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라 해도 사회적 관계망이 특정 누군가의 방해와 강요로 인해 계속해서 약화되고 있다면 그만큼 본인의 사회적 영토가 줄어들고 있으며, 그 사람과 본인의 관계에서 권력의 저울추가 상대방에게 유리하게끔 기울어지고 보면 된다.

여섯 번째, 의무와 도리를 멋대로 정해서 강요하거나 면제해주는 척 하기

사람의 법적 의무는 성문화되어있어 비교적 외연이 명확한 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 속에서 법적 의무 외에도 수만 가지 다른 의무를 지고 살아가며 대부분 이러한 의무는 외연이 명확하지 않다. 사회적 통념이나 상식의 이름 하에 해석한 의무의 범위는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다를 수 있다.

착취적 관계에서 착취자가 ‘의무’와 ‘도리’ 같은 개념을 이용해 상대에게 멋대로 무언가를 강요하는 일은 매우 흔하다. 특히나 다른 문화권에 비해 다소 획일적인 사회적 ‘통념’이 존재하고 별다른 생각 없이 이를 따르는 것이 도덕적인 삶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 ‘의무’와 ‘도리’는 매우 강력한 주문이 된다. 원하지 않는 일이고 본인의 인생이 불행해지는 일인데도 '의무'와 '도리'라는 개념에 갇혀 억지로 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는 굳이 통계를 내지 않아도 한국인이라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위의 두 번째 방법에서 언급한 '위해를 가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를 요구하기'처럼, 의무와 도리를 직접 강요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해 감사를 요구하는 것도 동일한 권력 행사 효과를 낸다. 시가에서 며느리에게 합가 시집살이를 하도록 강요는 하지 않지만 만날 때마다 '우리는 너한테 합가하자고 하지 않으니 너는 얼마나 복 받은 며느리냐'라는 식으로 자화자찬을 한다면 이는 여전히 합가를 올바른 기준으로 놓고 합가하지 않는 며느리의 인생 하루하루를 빚으로 계산하고 있다는 뜻이다. 의무와 도리를 면제해주는 척 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보상을 요구하기 위한 포석을 까는 것이다.

일곱 번째, 신체적, 경제적, 시간적, 정서적 손해를 입히기

위와 같은 방법들로 상대방에게 직접 본인이 원하는 일을 시키거나 본인이 원하는 존재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일단 상대에게 단순히 손해를 입히는 것도 권력 확보를 위한 일종의 사전 작업이 될 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이 손실을 보게 하면 상대방의 사회적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기회를 잃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 이렇게 약해진 상대는 조종하고 착취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또한 누군가에게 손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착취자에게는 짜릿한 정복감이라는 명백한 정서적 이익을 가져다준다. 누군가에게 손해를 입히는 데는 별다른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아무리 사회적 권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누군가의 업무에 필요한 물건을 자꾸 망가뜨린다거나, 중요한 업무 처리 시간에 험악한 문자 폭탄을 보내 정서적으로 괴롭힌다거나, 주변인에게 이상한 메시지를 보내 사회 생활을 어렵게 만든다거나 하는 등 유치하면서도 법으로 처리하기는 애매한 수준의 방법으로 얼마든지 상대방에게 손해를 입힐 수 있다.

평소에 정정당당한 경쟁의 장에서는 절대 이길 수도 없고, 심지어 아예 대면할 만한 기회조차 없는 상대방이라도 일방적으로 괴롭히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정당한 룰이 적용되는 게임에서 이길 수 없거나 아예 상대로 만날 일도 없는 대상에게 손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본인의 공식적인 위치를 넘어서는 권력의 행사를 뜻한다. 반대로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합당한 이유 없이 본인이 겪을 필요가 없는 손실을 수용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비록 그 끝이 비록 모두가 손해를 보는 Lose-Lose 게임으로 종결된다 해도, 이 방법을 사용하는 순간만큼은 착취자가 무에서 권력을 창출해낼 수 있는 것은 명백하다. 정당한 방법으로는 해칠 수 없는 상대방을 해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착취자들은 특히 본인이 표적으로 삼은 상대에게 더 이상 정상적인 접근이 불가능해졌을 때, 무조건 상대방 또는 그 지인들에게 최대한 손해를 입히려는 이런 테러식 전략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충동적 성향이 강할수록 본인이 감당할 수 없을 뒷일이 뻔히 예상되는 심각한 수준의 테러(ex. 살인)를 저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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