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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청 공무원 살인 사건 - 다시 한 번 피해자 비난 논리에 대해

Dirt Mentalist 2022. 7. 6.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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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간 대부분이 대략 80년간의 수명을 당연히 기대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신생아를 보고 그 중 몇이나 살아남을까, 30세의 성인을 보고 저 사람이 언제 죽을까와 같은 생각을 더이상 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100세 만기 보험 상품과 연금 상품이 팔리고, 최소 12년 이상의 공교육 투자가 합당한 세상이 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태어나면 대략 80년간 살게 되겠거니 하는 추정을 하고, 이 추정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기치 못하게 침해되면 우리는 이를 비극으로 인식한다. 고작 몇 백년 전만 해도 한 집안에서 아이 열 명을 낳으면 절반 이상 어릴 때 죽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물리적 힘이나 사회적 권력이 우위에 있는 자가 공공연하게 다수의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흔했지만, 이제는 홍수 때문에 전국에서 5명만 사망해도 '무서운 일', '정부가 해결해야 할 일'로 인식한다. 지구상 어떤 생명체보다도 자신의 생존에 대해 어마어마한 통제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통제력이 강화되면서 비극의 당사자들은 소수자가 되어버렸다. 물론 피해자의 수는 아직도 절대적으로는 적지 않다. 그러나 상대적으로는 분명 소수에 속한다. 때문에 억울한 범죄 피해자, 우연한 사고에 휘말린 피해자 등은 우리의 문명과 사회가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때로는 심각한 결점과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본의아니게 죽음으로 드러내버리는 내부고발자의 기능을 한다. 본인들이 그 역할을 자처한 적이 없지만 필연적으로 그러한 기능을 하게 된다. 이것은 그 사회 전체, 특히 사회 주류와 강한 일체적 소속감을 가짐으로써 자의식에 뻥근육을 더하려는 자들의 나르시시즘에 큰 상처를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해자를 혐오하고 배척하게 된다. 나는 안전하다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를 옹호하고 가해자에게 필연적인 서사를 부여하면서 피해자에게서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마치 상사에게 아부를 떨듯 현 체제에 대한 자신의 충성도를 과시하면 사회 또는 잠재적 가해자가 이를 인정해주고 데스노트에서 영원히 제외시켜주기라도 할 것처럼. 피해자가 정말 완벽하게 순결한 피해자였는지 증명될 때까지 탈탈 털고,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죽었네!'라고 말하려 한다.

 

대뇌로 사실 피해자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 적어도 죽을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아도 타인의 죽음을 이용해 자신의 운 좋은 생존을 더욱 화려하게 치장하려는 나르시시즘적 쾌감에 대한 욕구가 그러한 이성을 짓눌러버린다. 본인도 예외 대상이 될 수 없을 문제점에 대한 인식은 피해버리고 '쟤는 죽어 마땅하지만 나는 절대로 죽지 않을' 근거를 찾으려고 혈안이 된다. 그 속에 숨은 진짜 메시지는 '나는 저 피해자랑 다르니까 안 죽겠네! 난 생존 경쟁에서 저 피해자를 이기고 승리했네! 적어도 저 피해자보단 내가 잘났네! 피해자는 루저지만 나는 위너네!'와 같은 저열한 상대적 우월감이다. 겉으로는 부인하겠지만 이들이 가진 공식은 명확하고 단순하다. 이들에게 '피해자'란 곧 루저이거나 죄인이거나 배신자이다. 자신의 상대적 우월감을 위한 땔감으로 피해자를 소비하기 위해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전방위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이유를 정말로 찾지 못했거나 자신의 가설이 반박당했을 때, 피해자 비난 논리를 펼치던 사람들은 겉으로 인정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심히 불쾌해하고 절망한다. 피해자를 타자화하는 데 실패하면 나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게 싫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만 삐쭉거리며 돌아선다. 반성도 없고 사과도 없다. 없었던 일 취급한다. 피해자가 억울하고 순수할수록, 역설적으로 사건이 더 빨리 잊혀지는 경우가 많은 이유이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가해자를 욕해야 하는 사건보다 피해자를 욕할 수 있는 사건을 훨씬 더 좋아한다. 그게 강자의 편에 서기 쉽고 자신의 안온한 일상에 대한 환상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 스토커가 자신의 세계관에 맞지 않는 사람, 자신의 예측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어 칼을 갈듯이, 현실을 인정하는 대신 현 체제에 대한 미화로 자신의 환상을 유지하려는 이들은 거대한 시스템의 플라잉 몽키가 되어 시스템의 결점을 드러내는 사건을 재빨리 묻어버린다.

 

아가페적인 관대한 입장에서 보자면 한낱 유한한 존재인 인간들의 이기적 생존 본능 표출을 어찌 막겠나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제 목숨을 정말 현명하게 지키고 싶은 자, 그리고 문명과 사회의 안전성을 정말 더 개선하고 싶은 자라면 순간의 안도감과 상대적 우월감을 위해 죽은 이를 밟고 기회주의적으로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는 멍텅구리들의 카니발을 강력하게 경계해야 한다. 이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겁에 질려 대뇌의 판단을 마비시키고 사건을 자신만의 흥청망청 '생존 경쟁 승리 파티'로 만들어버리는 이들은 어리석고 근시안적인 사고 패턴 때문에 타인과 집단에 해를 끼치며 그토록 지키고 싶어하는 본인들의 목숨도 사실상 지키지 못해 사회적 비용을 야기하는 이들이다. 이러한 멍텅구리들을 최대한 민주적 방법으로 하드캐리해야 하는 것이 현대 사회 리더들의 가장 큰 난제라 할 수 있겠다.

 

 

피해자 분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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